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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시대의 광풍에 지식인(법조인·검찰·교수·언론인)이 제 구실을 하지 않을 때 음지 쪽에 서서 역사적 소임을 맡게 되었다. 피할수도 있었고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었다. 산민 한승헌 선생의 파란 많은 삶, 그 사이사이에 유머가 깃든 음지와 양지를 향해 지금 떠난다.[편집자말]
한승헌 변호사 (자료사진)
 한승헌 변호사 (자료사진)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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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 실로 평탄치 않은 기복이 드러나 있다. 인생의 명암을 놓고 말하면 명과 암의 극과 극을 한 몸으로 겪어야 했다. 내 이력서에는 양지도 보이지만, 연보에는 그와는 달리 음지가 짙게 번져 있다. 고백컨대 나는 음지 속에서 더 많은 깨달음을 얻었고, 인간적으로 성숙했으며 본색을 키웠고 보람을 찾을 수 있었다. 음지의 체험은 그런 의미에서 내 삶의 양지였으며, 그래서 나는 나를 키워준 음지에 감사한다."
 

고 한승헌 변호사가 자서전 <한 변호사의 고백과 증언> 표지에 뽑은 '자화상'의 한 대목이다.

사람은 물론 초목들까지도 양지를 향한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사와 세상사는 '양지쟁탈전' 이래도 과언이 아닐 터. 해서 인간군상에는 '양지족(陽地族)'과 '해바라기족'이 득세하는 경우가 흔하다. 초목이 햇볕을 향하는 것은 자연현상이지만 '인간 양지족'의 경우는 무슨 현상이라고 할까. 대체 무슨 조화인지, 나무는 음지에서 자란 목재가 더 결이 곱고 단단하다고 한다.

8.15 해방 후 이승만 -> 박정희 ->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반세기의 정치사는 거칠게 말해 야만의 시대였다. 간판으로 내건 민주공화의 헌정질서는 저들에겐 거추장스러운 장식품일 뿐 지키고 보호할 가치가 아니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이후 선출된 집권자 중에는 민주신봉자와 여전히 독재자의 아류 그리고 부패무능한 존재로 갈린다. 우리 헌법의 골격인 민주공화제의 핵심은 권력분립이다. 독재자와 그 아류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권력을 휘두른다. 마치 왕조시대의 군주인양 행세한다. 

야만의 시대 지식인 그룹은 다양한 존재방식과 가치관이 주어진다. 축약하면 독재자들이 악법과 제도를 만들고 준법을 강요할 때, 순응하는가 거부하는가이다. '악법도 법'이라며 추종하는 무리와 이에 저항하는 소수로 갈린다. 추종에는 양지가, 저항에는 음지가 주어진다. 

일반적으로 변호사는 양지그룹에 속한다. 돈과 권력과 명예를 차지하는데 적합한 직종이다. 변호사와 검사는 흔히 양날의 칼을 든 검투사에 비유되기도 한다. 한쪽은 불의를 베는 칼잡이로, 다른 쪽은 정의를 지키는 보검의 역할이다.

긴 세월 멀리에서 혹은 가까이서 지켜본 고 한승헌 선생은 정의로운 법조인이었다. 젊은시절의 비판정신과 정의감은 연륜과 더불어 또는 타성에 젖어 보수화되기 쉬운 것이 현실인데, 그는 청·장·노가 한결 같았다. 연치는 늘어도 정신은 항상 싱싱한, 그래서 활동과 필력에서 영원한 현역, 영원한 청춘임을 보여주었다. 그는 늙어도 결코 낡지는 않았다. 

선생은 심장이 뜨겁고 영혼이 맑은, 우리  사회의 흔치않는 원로였다. 다산 정약용이 "시대를 가슴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으면 글(시)이 아니다"라고 갈파했듯이, 그의 변론과 글에는 뼈가 있고 유머와 재치가 넘치지만, 진실호도나 음풍농월은 찾을 수 없다. 올곧고 강직한 선비 법조인이었다. 
 
대통령 자문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는 2006년 11월 20일 오전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마지막 회의를 마친 뒤 기자회견을 열고 국회에 계류중인 사법개혁 법안의 조속한 처리를 촉구했다. 공동위원장인 한승헌 변호사(가운데)가 조속한 통과를 촉구하는 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다.
 대통령 자문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는 2006년 11월 20일 오전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마지막 회의를 마친 뒤 기자회견을 열고 국회에 계류중인 사법개혁 법안의 조속한 처리를 촉구했다. 공동위원장인 한승헌 변호사(가운데)가 조속한 통과를 촉구하는 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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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수의 법조인이 재물과 허영을 좇으며 시류에 영합하고 보신 출세할 때 선생은 타고난 반골정신과 학문적 탐구심으로 법전은 물론 시·서·문·사·철을 넘나드는 필봉으로 광기의 권력, 이를 추종하는 학기(學妓)·기레기와 맞섰다. 

31세 때에 5년 간의 검사직을 사임하고 사회적 약자들의 변론 길에 들어 처음 맡은 것이 기행으로 유명한 천상병 시인의 이른바 동백림사건이었다. 34명이나 되는 이 사건 피고인 중 유일하게 변호인이 없음을 알고 직접 구치소로 찾아가 선임계에 도장을 받았다. 착수금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이런 초심으로 평생 사회적 약자, 문인·양심수, 학생·노동자의 편에 섰다.

선생은 인권변호사이면서 시인·수필가로서도 필력을 날리고, 촌철살인의 유머는 암흑시대에 신음하는 민초들에 생기를 불러일으켰다. 유신시대 추방자들과 '으악새모임'을 만들어 산천과 싸구려 술집을 거닐며 시름을 달래는 풍류의 모습도 보인다.

서예 스승인 검여 유희강 선생이 "소외받는 사람들의 가까이 있으라"며 주신 '산민(山民)'이라는 호를 실천하며 법조 60년을 한결같은 자세를 유지했다. 정치적인 시국사건의 단골 변호인이 되고, 그래서 독재 권력에 찍혀 피고인이 되었다. 8년 5개월간 변호사 자격이 박탈되어 출판업을 시작하고 생계형으로 시작한 출판사 삼민사는 값진 책을 펴내었다. 문화계에 남긴 과외의 소득이다. 

판사·검사·변호사·피의자·방청인을 모두 겪은, 한국 법조사 유일의 기록을 갖고 있는 선생은, 그리고 짧은 기간 감사원장과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이를 두고 '양지'를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도지사와 정부각료, 비례대표 국회의원 등을 모두 사절할만큼 세속적인 권세를 탐하지 않았다. 그리고 짧은 관직을 스스로 내려놓고 재야의 본업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1991년에 쓴 <시대의 격랑 속에서>의 마지막 대목은 지금 다시 읽어도 산민 선생의 올곧게 산 삶의 지침이 후인들에게 무겁게 다가옴을 느낀다.

"자랑스럽게는 못 살망정 부끄럽게  살지는 말자는 것, 지식인의 도리는 다하지 못 할지라도 학기(學妓)는 되지 말자는 것 - 이런 자계(自戒)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 말은 내가 산민 한승헌 변호사의 평전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한승헌, #시대의양심_한승헌평전, #한승헌변호사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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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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