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에서 '희생'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유일한 종목이 야구라고 한다. 희생번트나 플라이처럼, 자신을 희생하여 팀에 승리를 안기는 것이 야구의 미학이라면, 그라운드 안에서 밖에서나 가장 완벽한 '야구 그 자체'의 삶을 살았던 인물하면 바로 최동원을 첫 손에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최동원은 그랬다. 평생 공 하나에 모든 열정을 바쳐 야구가 행복한 세상을 꿈꿨고, 많은 사람들도 그러한 최동원의 꿈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리고 이제는 최동원 그 자체로 사람들의 기억속에 영원히 지워지지않을 위대한 꿈이 되어 남았다. 선수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삶이 얼마나 있을까.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한 장면. ⓒ SBS

 
최동원의 일대기

10월 20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는 무는 이야기>에서는 '가을의 전설 최동원' 편을 통하여 한국 프로야구 초창기의 슈퍼스타이자 전설적인 투수였던 최동원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이야기는 1975년부터 시작된다. 당시 한국에서 고교야구의 인기는 지금의 프로나 아이돌 연예인 못지 않았고, 관중들은 혜성처럼 등장한 한 경남고 2학년 투수에게 시선이 쏠렸다.

연전으로 치러진 경기에서 이틀 연속 선발로 등판한 투수는 전날 9이닝 완봉승에 이어 이튿날까지 8회까지 무실점을 이어가며 무려 '17이닝 연속 노히트노런'이라는 한국야구사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웠다. 심지어 투수는 다음날 열린 결승전에 또 마운드에 올라 3일 연속 등판하여 3-2 승리를 이끌며 노히트노런-완투-완봉 각 1회라는 괴물같은 기록을 남긴다.
 
물론 지금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당시에는 혹사보다 이 어린 투수의 초인적인 활약에 더 주목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최동원, 한국야구사에 '무쇠팔'로 이름을 남긴 전설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롯데 자이언츠에서 최동원과 배터리로 호흡을 맞췄던 포수 한문연은 "신같은 존재"라는 표현으로 최동원을 정의했다. 롯데에서 우승을 함께한 강병철 감독은 "어릴때부터 최고의 선수고, 던지면 당연히 이기고 우승하는 투수"라고 극찬했다. 최동원의 최대 라이벌이자 또 하나의 전설적인 투수로 꼽힌 선동열은 "어릴 때 형을 보면서 이렇게 야구선수를 해야겠구나 생각하게 해줬던 롤모델"이라고 회상했다.

최동원의 모친 김정자씨는 어린 시절 최동원을 위하여 가족들이 힘을 모아 집에 전용훈련장을 만들었던 일화를 회상했다. 모든 것이 열악하던 그 시절에도 가족들의 헌신과 사랑 덕분에 최동원은 최고의 선수로 성장할 수 있었다. 특히 열성적이었던 아버지 고 최윤식씨는 당시 대한민국 최초로 최동원을 신체보험에 가입시켰고 항상 "투수는 어깨가 생명이니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당부했다.
 
최동원의 아버지는 6-25전쟁 때 당한 총상의 후유증으로 의족을 착용하고 다녀야했으며 밤마다 통증에 시달려야 했다. 최동원이 아픈 아버지의 다리를 주물러드리면, 아버지는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아들의 어깨를 주물러주면서 부자의 끈끈한 정을 쌓았다.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남달랐던 최동원은 생전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젊음을 다 바쳐서 제 뒷바라지를 해주셨다. 그 노력을 보람되게 해야한다는 생각 때문에 더 이를 악물고 절제된 생활속에서 야구를 하게 됐다"고 감사를 전했다. 그렇게 최동원은 경남고의 에이스이자 고교 최고의 투수로 성장했다.
 
최동원은 1977년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국가대표에 발탁되었고, 태극마크를 달자마자 에이스로 활약하며 '슈퍼월드컵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우승에 기여했다. 이는 한국야구 사상 첫 세계대회 우승 기록이기도 하다.
 
최동원은 당시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150 Km/h대의 빠른 구속에 '마구'로 불리우는 낙차큰 커브를 결정구로 보유하고 있었다. 김시진은 "당시 선수들이 최동원의 커브를 '오란씨'라고 불렀다. '하늘에서 별을 따다'~는 가사로 유명했던 유명 음료의 CM송처럼, 하늘에 뚝 떨어진 것 같은 공이었기 때문"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무엇보다 최동원의 진가는 '강심장'에 있었다. 최동원은 이전 타석에서 자신에게 홈런을 때린 타자를 다시 상대해야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씨익 미소를 짓는가 하면, 홈런맞은 코스에 똑같은 공을 다시 뿌려서 정면승부를 걸 정도로 배짱이 두둑했다.

80년대 당시만해도 관중문화가 과격하여 그라운드로 술병이나 각종 이물질을 투척하는 위험한 경우도 흔했는데, 그럴 때 최동원은 "그쪽까지 공이 안날아가게 해주겠다"며 외야수들을 안전한 내야까지 불러들이고 타자를 상대하여 삼진으로 잡는 폭풍 간지를 선보인 일화도 유명하다.

이러한 최동원의 엄청난 잠재력에 해외에서도 주목했다.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최동원에게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는 해외진출이 보편화되지 않은 시절이었고, 1982년 프로야구 출범과 맞물려 이미 국내 야구계의 슈퍼스타였던 최동원의 메이저리그행은 무산됐다.
 
최동원의 야구인생에서 1984년을 빼놓을 수 없다. 최동원은 그해 정규리그에서 롯데가 치른 100경기중 절반이 넘는 52경기에 등판했다. 당시 필승보증수표였던 최동원에게는 선발-중간-마무리라는 분업화 개념이 없었고, 롯데에 이길 수 있는 경기에는 거의 무조건 등판했다.
 
롯데는 최동원의 활약을 앞세워 1984년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한다. 상대는 전기리그 우승팀인 삼성, 롯데는 삼성에 비하여 전력상 크게 열세라는 평가를 받았고 정규리그 상대 전적에서도 크게 밀렸다.
 
당시 롯데의 한국시리즈 운용 전략은 에이스 최동원을 이틀간의 휴식 간격을 두고 1,3,5,7차전에 투입한다는 것. 지금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고, 혹사 개념이 희미했던 당시 기준으로도 황당한 계획이었다. 최동원 본인도 처음에는 무리라고 생각했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우야겠노"라는 감독의 부탁 한마디에 "알겠습니다 해보입시더"라고 수락했다. 훗날 최동원은 "나 혼자만의 영광이 아니니까, 이 기회를 놓치지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라며 기꺼이 도전을 받아들인 이유를 밝혔다.
 
롯데는 1차전에서 최동원의 역투로 4대 0 승리를 거뒀고, 2차전을 패했지만 3차전에서 2일 휴식만에 다시 등판한 최동원을 내세워 3대 2로 승리했다. 최동원은 1차전 완봉에 이어 3차전에서도 완투승을 거뒀다.
 
하지만 롯데는 4,5차전을 연패하며 벼랑 끝에 몰린다. 특히 5차전은 최동원을 다시 투입하고도 완투패를 했기에 타격이 더 컸다. 롯데는 6차전에서 호투하던 임호균까지 5회에 부상을 당하여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그때 놀랍게도 최동원이 구원투수로 코칭스태프에게 등판을 자처했다. 최동원은 남은 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며 6-1 승리를 이끌었다. 경기 후 "무리한 등판이 아니었냐"는 질문에 최동원은 "무리라는 건 안다. 그래도 나갈 수 있으면 끝까지 나가서 이겨야 한다"며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운명의 7차전, 강병철 감독은 모든 투수를 총동원하는 벌떼작전을 준비했다. 그런데 최동원이 찾아와 등판을 또 자처했다. 강 감독은 "또 한다고?"라고 경악하면서도 최동원의 투지에 고마움을 드러냈다. 그렇게 최동원은 7차전에서 3일연속 등판-한국시리즈 5번째 경기에 나서게 됐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서울 하늘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7차전 경기가 하루 뒤로 우천 연기되었고, 최동원의 휴식일을 번 롯데 선수들은 숙소에서 일제히 환호했다.
 
하지만 하루 정도의 휴식으로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최동원의 체력을 회복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최동원은 초반부터 이전과 달리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고 6회에는 홈런까지 내주며 4-0으로 끌려갔다. 어머니 김정자씨는 "너무 무리해서 공 하나 던질때마다 숨이 제대로 안쉬어지는 것 같더라. 피로해서 입이 삐뚤어지는게 다른 사람 눈에는 안보여도 엄마 눈에는 보였다"면서 "동원이가 더 실망하고 힘들어할까봐 차라리 내려줬으면하고 바랬다"며 안타까웠던 순간을 회상했다.
 
강병철 감독도 최동원의 몸상태를 체크하며 여러 차례 마운드에서 내려올 것을 권유했다고. 하지만 그때마다 최동원은 포기하지 않고 "한 회만 더 해보겠십니더"라고 고집했다. 그런 최동원의 의지를 보면서 동료인 롯데 타자들도 각성하며 심기일전했다.

경기 중반부터 롯데 타선이 살아나기 시작하면서 추격에 나섰다. 동료들의 분발에 자극받았는지, 7회부터 거짓말처럼 최동원의 구속과 구위도 살아났다. 포수 한문연은 "볼끝이 갑자기 쭉쭉 올라오더라. 사람이라는게 참 희한하더라. 그래서 사람들이 최동원을 '철인'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회상했다.
 
그리고 8회초 롯데의 공격, 1사 1.3루의 찬스에서 유두열의 극적인 3점홈런이 터지며 마침내 롯데가 역전에 성공했다. 끝까지 마운드를 지킨 최동원은 9회 마지막 타자를 삼진으로 잡고 완투승을 거두며 드라마틱한 한국시리즈 우승을 완성했다.
 
시리즈 7경기중 5경기에 등판하여 40이닝간 4승 1패 투구 평균자책점 1.80 WHIP 1.08, 완투 4회, 최동원이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남긴 불멸의 기록이다. 롯데의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최동원의 가족들을 비롯하여 부산 일대가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가 됐다. 우승을 확정짓고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뭐냐는 질문에, 그야말로 혼신의 역투를 마친 에이스의 대답은 "그냥 자고싶어요"였다.
 
최동원이 한국야구사에 남긴 발자취는 단지 우승이나 개인의 영광만이 아니었다. 최동원은 1988년 9월 한국야구계 최초의 선수협회 창설을 추진했던 핵심인물이었다. 당시 한국사회는 노조 결성이나 단체 행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고, 프로야구를 주도하던 기업구단에게 선수협회를 결성하겠다는 것은, 한마디로 '공공의 적'을 자처하겠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부와 명예가 보장되었던 스타 선수였던 최동원이 굳이 앞장서서 총대를 매야 할 이유는 없었다.
 
최동원은 1995년 인터뷰에서 "몇몇 스타선수들은 높은 연봉과 계약금을 받고 혜택을 누리지만, 그 뒤에 프로야구 유니폼을 입고 서 있는 선수들이 더 많다. 야구는 단체운동이다. 덕아웃과 2군에 있는 선수들의 도움이 있기 때문에 저도 제 이름 석자를 얻을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강조하며 "그런데 스타가 아닌 선수들의 연봉은? 말도 못한다. 생계유지는 하고 나와야 그라운드에서 힘을 쏟아부을수 있고, 그래야 프로야구 선수라는 이름을 얻을수 있는 것" 이라면서 당시 선수협 창설을 추진했던 이유에 대하여 설명한 바 있다.
 
최동원은 선수협을 통하여 연봉 하한선제와 연금제도 도입을 통하여 야구선수들의 처우를 개선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나'가 아니라 '우리'라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동원은 당시 선수들의 열악한 훈련 환경과 복지 상태를 보며 심각성을 느끼고 선수들을 대변하는 단체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구단들의 조직적인 반대와 탄압으로 선수협 출범은 끝내 무산되었다. 훗날 최동원은 당시 심경에 대하여 "아쉬운건 그때 좀더 좋은 체제를 마련해줬다면 후배들은 더 나은 조건속에서 선수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미안하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고백했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미운털이 박힌 최동원은 1988년 말 선수협 주동자들과 함께 롯데에서 라이벌팀인 삼성으로 보복성 트레이드됐다. 평생 고향팀으로 생각했던 부산에서 내쳐졌다는 정신적 충격과 극심한 혹사의 후유증까지 겹쳐, 최동원은 불과 트레이드 2년 뒤인 32살의 나이에 조용히 현역 유니폼을 벗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의 대투수였지만 은퇴식조차 없었던 초라한 마무리였다.
 
그러나 최동원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12년뒤 송진우-양준혁 등 후배들에 의하여 결국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선수협이 출범하는데 성공했다. 최동원이 먼저 씨앗을 뿌리고 토대를 쌓았기에 가능한 기적이었다.
 
최동원은 현역 은퇴후에도 2005년 한화의 2군 감독으로 활동하며 또다른 슈퍼스타 류현진을 지도하는 등 야구와의 인연을 이어왔다. 하지만 지도자로 한창 활동할 시기에 최동원은 뜻하지 않은 대장암 투병으로 다시 그라운드를 떠나야 했다.
 
2011년 7월 22일 모교인 경남고과 군산상고간의 레전드 리매치에서 최동원은 오랜만에 유니폼을 입고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나 암투병으로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하고 수척해진 몸상태가 공개되며 팬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당시 언론과 야구인들은 최동원의 암투병을 알고 있었지만 본인의 의사를 존중하여 공개를 자제했다. 그리고 이 경기는 최동원이 팬들과 만난 마지막 자리가 됐다.
 
최동원은 병상에서도 항상 TV를 통하여 프로야구 중계를 놓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자씨는 임종을 앞둔 아들의 손에 평생 사랑했던 공을 쥐여줬고 최동원은 위독한 상태에서도 있는 힘을 다하여 그 공을 잡았고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않았다. 김정자씨는 "동원아, 너 때문에 엄마는 너무 행복했다. 내 아들로 태어나줘서 고맙다"며 작별인사를 전했다. 2011년 9월 14일, 그렇게 전설 최동원은 53세의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나갔다.
 
세상을 떠나기 두달전 최동원은 친분이 있는 기자와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내가 선수 시절에 그라운드에서 뭘 쫓아다녔는지 압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쫓아다닌건 하얀 야구공이 아니라, '별'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별은 하늘에만 떠있다고 별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길을 밝혀주고 꿈이 되어줘야 그게 진정한 별이다"라고.
 
이어 최동원은 "그래서 이제 나도 야구계를 위하여 뭔가 하려고 한다. 이젠 그냥 최동원이라는 이름 석자가 빛나는 별이 아니라, 젊었을 때 나처럼 별을 쫓는 사람들에게 길을 밝혀주는 그런 별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안타깝게도 최동원은 그로부터 조금 일찍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정신은 유산이 되어,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어지고 누군가의 꿈을 지켜줄 빛으로 거듭났다. 오늘도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걸으면서 다른 이의 빛을 밝혀주는 삶을 살아가고있는 '세상의 또다른 최동원들' 이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우리가 그들의 헌신과 희생을 기억하고 박수를 보내야 할 이유다.
꼬꼬무 최동원 프로야구 1984한국시리즈 선수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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