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바라기>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프로그램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 그대로 별, 스타, 그들을 '바라보는' 팬들의 이야기를 담은 프로그램이었다. 아이돌과 그 팬덤의 존재가 명실상부해지던 2014년, MBC 예능으로 등장한 이 프로그램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한 소녀, 오세연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소녀는 이 한복을 프로그램에만 입고 나온 게 아니었다. 그녀의 '오빠'에게 확실히 눈도장을 찍기 위해 오빠를 만나러 달려간 그 어느 곳이라도 한복을 입었단다. 10대 소녀이던 오세연에게 부끄러움을 저만치 물리치게 만들고 한복을 입힌 그 '오빠', 그는 현재 성범죄로 수감 중인 정준영이다. 
 
 영화 <성덕>의 한 장면.

영화 <성덕>의 한 장면. ⓒ 해랑사

 
슈퍼주니어, 동방신기 혹은 JYJ, 빅뱅, 그리고 슈스케는 대한민국의 가요사, 그리고 연예계에서 한 획을 그은 그룹이나 프로그램이다. 아마도 2000년대 이래 많은 이들이 이들 그룹이나, 이 프로그램 출신들을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걸 넘어, 이른바 '덕질'을 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그룹 출신인 강인, 박유천, 승리, 정준영은 어떨까? 아마도 이들이라고 예외는 아닐 것이다. 활동 당시 다들 그룹이나 프로그램에서 '얼굴' 격이던 이들이기에 더욱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팬들이 그들에게 사랑으로 달아준 날개를 이들은 스스로 꺾어 버렸다. 이들은 모두 범죄와 연루되어 죗값을 치르고 있거나, 그로 인해 연예계 활동을 더는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나의 수많은 처음에는 오빠가 있었다. 앨범도 처음 사보고, 서울도 처음 가보고, 기차도 처음 타보고, 외박도 처음 해봤는데....... 그렇다고 법원까지 처음일 필요는 없잖아.'
 
내 덕질은 잘못된 것인가? 

정준영, 그 '오빠' 때문에 오래도록 행복하게 했던 덕질이 본의 아니게 '종료'된 오 감독, 감독은 혼란스런 감정에 빠져 헤매인다. 이제 더는 덕질을 하면 안되는데, 그런데 그 오빠가 재판을 받는 법원까지 간다. 그리고 더는 덕질을 할 수 없는 자신과 달리, 여전히 오빠를 응원하겠다는 팬들을 보게 된다.

한때 한복을 차려입고 오빠를 만나러 달려가고, 오빠의 응원(?)에 힘입어 서울에 있는 대학, 그것도 영화과에 진학한 자신을 '성덕'이라 여겼는데, 이제는 어디 가서 정준영 팬이었다고 말하는 것조차 부끄러운 처지가 되었다. 과연 나의 덕질은 잘못된 것인가? 오빠가 범죄자가 되었는데 여전히 오빠를 믿는다는 팬들은, 아니 그 반대로 가차없이 욕을 하며 떠난 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 걸까? 영화는 이런 질문으로 시작된다. 

팬덤화 현상, 그 시작은 10대 소년들의 '별바라기'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사회적 현상이 되었다. 영화에서도 등장하지만 감옥에 간 전직 대통령을 여전히 '사모'해서 거리에 모여든 나이든 세대, 하지만 어디 그뿐일까, 지난 정권 내내 '정치의 팬덤화 현상'을 우려한 목소리들이 등장했고, 이른바 '확증 편향'이라고 하여 내가 믿고 좋아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넘어 '인간적 믿음'으로 이어진 집단적 움직임이 우리 사회를 휩쓸었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좋아했던 스타의 몰락을 계기로 자신의 '덕질'을 냉정하게 돌아보고자 한 영화 <성덕>은 그저 한 젊은이의 반성을 넘어 시대적 현상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 준다. 

본의 아니게 덕질을 마감하게 된 오 감독이 자신의 덕질을 돌아보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덕질은 스타에 대한 한량없는 지원으로 이어진다. 그를 사랑했던 시간만큼이나 쌓인 그의 앨범과 굿즈들, 그것들을 돌아보다 감독은 자신도 모르게 어느덧 자신이 사랑했던 그를 옹호하고 있는 자신에 자기 반성을 한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또 다른 상처입은 팬들을 찾아나선다. 

오 감독과 같은 팬들은 어디에나 있다. 굳이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더라도, 영화를 만들기 위해 도움을 청했던 조감독도 알고보니 승리의 팬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이를 통한 동질의 경험을 추억하고, 애도하며, 그리고 자신들을 되돌아 본다. 

감독의 여정은 승리, 강인 등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스타들의 '지난' 팬들을 인터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말할 수 없다며 막걸리 칵테일을 만들다 난장판을 만들어 버린 또 다른 팬과의 만남, 그 난장은 곧 '아비를 아비라 말할 수 없는 홍길동'처럼 더는 사랑을 입 밖에 내놓을 수 조차 없는 그들의 모습이 된다. 
 
 영화 <성덕>의 한 장면.

영화 <성덕>의 한 장면. ⓒ 해랑사

 
덕질, 그 애증의 시간을 돌아보다 

자신들의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노래방에 가서 절규하는 이들, 하지만 뒷맛은 씁쓸하다. 그들이 자신의 마음을 달래려 부른 노래를 부른 이가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오 감독을 비롯하여, 영화 속 등장한 팬들은 대부분 그녀 또래의 젊은 여성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들이 응원했던 오빠가, 기꺼이 자신들의 응원에 힘입어 감사하다는 오빠가, 자신들이 쓴 돈으로 승승장구했던 오빠가, 자신들과 같은 젊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한 것을 넘어 범죄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로 인해 고통받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오빠에게 자신들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러기에 그들은 '변치않는 믿음'으로 더는 오빠를 응원하거나 지지할 수 없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범죄는 '오빠'가 저질렀는데, 왜 죄책감은 자신들의 몫이 되어야 하는가. 인터뷰한 한 팬처럼 자신이 좋아했던 이들은 모두 범죄자가 되는 현실에, 내가 잘못된 건가 했다는 고백처럼 자신들의 믿음이 범죄의 방조가 된 것처럼 혼란스럽다. 

오 감독은 오빠의 범죄 사실을 보도했다는 이유만으로 팬들한데 '몰이'를 당했던 기자를 만나 뒤늦게 사과한다. 그리고 기자는 직업적 사명감으로 했던 일임에도 마음 깊숙한 곳에 남아있던 트라우마를 말한다. 사랑해서 한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는 일, 덕질이 낳은 우리 사회의 왜곡된 결과들을 감독은 가감없이 드러낸다. 
 
 영화 <성덕>의 한 장면.

영화 <성덕>의 한 장면. ⓒ 해랑사

 
오빠를 사랑했다는 이유만으로 죄책감의 늪에서 헤매이게 되는 시간, 하지만 그건 여전히 스타와 자신을 '동일시'했던 시간의 잔재들일지도 모른다. 비벌리 엔젤의 <자존감없는 사랑에 대하여>는 이런 모습에 대해 자기 중심을 잃은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사랑에 맹목적으로 빠져든 많은 여성들이 사랑하는 대상과 자신을 분리하지 못한 채 자아 상실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영화는 '자아 상실'과 '혼란'에서 멈추지 않는다. 덕질의 연대기처럼 사람을 잘못보고 덕질한 어머니의 회고담을 인터뷰한 감독, 하지만 어머니는 의연하다. 외려 당당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 덕질의 대상을 질타한다. 그리고, 이제야 말한다. 그래도 고마웠다고. 덕질한 딸이. 바쁜 어머니 때문에 홀로 집을 지켜야 했던 딸이 헤드셋줄이 목에 칭칭 감기도록 듣던 오빠의 음악 때문에 그 외로운 시간들을 견뎌냈던 것이 아니었을까 안쓰러웠던 마음을 전한다. 

자신은 '덕질'에 힘을 얻어 공부도 해서 이제 영화를 만드는 데 이르렀다고 말하는 감독, 많은 이들을 만나고, 자신의 덕질을 돌아본 감독은 비로소 그 오빠와의 사랑에서 자신을 분리해 낸다. 그리고 그 사랑의 시간을 그대로 인정하고 보듬어 안는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사랑? 덕질을 향한 긍정적인 태도로 영화를 마무리한다. 

연예인을 좋아하던, 혹은 그냥 누군가를 좋아하다 본의 아니게 그 사랑으로부터 '배제'된 이들은 혼돈을 느낀다. 무엇보다 그 대상과 자신을 늘 동일시하던 이들은 그 대상이 부도덕한 인물이거나, 잘못된 모습을 보였을 때,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마저 느낀다. 영화는 '덕질'이라는 이제는 사회적 현상을 통해 한 개인의 자기 성찰을 솔직하게 담아낸다. 무엇보다 사회적으로 터부시되어 버린 존재를 사랑했던 자기 고백이 용기있다. 그런 용기와 성찰이 있기에 오세연은 정준영 바라기라는 과거의 족쇄에서 스스로 떨쳐나갈 수 있다. <성덕>은 그런 용감한 기록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https://5252-jh.tistory.com/에도 실립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성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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