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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비어 금지’를 앞세워 ▲헌법 부정·개정·폐지 거론 행위 ▲학생의 불법집회·시위·정치관여를 금지하고, 부수적으로 ▲재산의 해외도피 금지 ▲사회 부조리의 제거를 수반한 “모든 국력을 총 집결하여 북괴의 흉계에 대처한다”는 것이 긴급조치 9호의 골자였다. 출처는 대한뉴스 제1031호 영상화면.
▲ 긴급조치 9호 ‘유언비어 금지’를 앞세워 ▲헌법 부정·개정·폐지 거론 행위 ▲학생의 불법집회·시위·정치관여를 금지하고, 부수적으로 ▲재산의 해외도피 금지 ▲사회 부조리의 제거를 수반한 “모든 국력을 총 집결하여 북괴의 흉계에 대처한다”는 것이 긴급조치 9호의 골자였다. 출처는 대한뉴스 제1031호 영상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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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진 열사를 추모하는 행사가 대학에서 확산되었다. 독재정권으로서는 두려운 현상이었다. 5월 13일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다. 유신체제 비판을 더욱 옥죄려는 폭거였다.  

그 내용은 △ 유언비어의 날조ㆍ유포 및 사실의 왜곡ㆍ전파행위 금지 △ 집회ㆍ시위 또는 신문ㆍ방송 기타 통신에 의해 헌법을 부정하거나 폐지를 청원ㆍ선포하는 행위 금지 △ 수업ㆍ연구 또는 사전에 허가받은 것을 제외한 일체의 집회ㆍ시위ㆍ정치관여 행위 금지 △ 이 조치에 대한 비방행위 금지 △ 금지위반 내용을 방송ㆍ보도 기타의 방법으로 전파하거나 그 내용의 표현물을 제작ㆍ소지하는 행위 금지 △ 주무장관에게 이 조치의 위반 당사자와 소속 학교ㆍ단체ㆍ사업체 등에 대해 제적ㆍ해임ㆍ휴교ㆍ폐간ㆍ면허취소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 부여 △ 이런 명령이나 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다. 헌법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초헌법적인 대통령명령으로 인신구속을 정당화한 이 조치의 첫 항은 바로 ‘유언비어 금지’였다. 출처는 대한뉴스 제1031호(75년 5월 17일) 영상화면.
▲ 긴급조치 9호 첫항은 유언비어 금지 박정희 대통령은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다. 헌법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초헌법적인 대통령명령으로 인신구속을 정당화한 이 조치의 첫 항은 바로 ‘유언비어 금지’였다. 출처는 대한뉴스 제1031호(75년 5월 17일) 영상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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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 9호는 1979년 12월 8일 해제될 때까지 4년 6개월 27일 정확히 1,669일간 헌법반대나 개헌에 관한 국민들의 입과 귀는 막혀졌고 말을 할 수도 들을 수도 없게 봉해졌다.  

긴급조치 9호 시대는 민주주의 암흑기로서 이 기간에 8백여 명의 구속자가 발생하는 등 '전국토의 감옥화' '전국민의 죄수화'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긴급조치 동안 학생ㆍ교수ㆍ문인ㆍ정치인ㆍ종교인ㆍ시민 등 모두 1천 4백여 명이 이 조치로 옥고를 치렀다. 긴급조치 시대야말로 우리 헌정사상 전무후무한 인권탄압과 독재의 암흑시대라 할 것이다. 2013년 헌법재판소는 긴급조치에 대한 위헌판결을 내렸다.

긴급조치 9호는 사실상 계엄령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잡혀갔다. 이런 와중에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군사정권과 첨예하게 대치해왔던 장준하가 8월 17일 등산길에 암살되었다.      

유신정변으로 영구집권 체제를 구축한 박정희에게 재야 반체제운동을 지도하는 장준하의 존재는 그야말로 눈엣가시였다. 무엇보다 박대통령은 장준하에 대해 도덕적으로 심한 열등감을 느끼는 관계였다. 일본에 충성을 다 바친 일본군 중위 출신인 박정희가 광복군 대위 출신인 장준하에게 갖게 된 피할 수 없는 열등감이었다. 

1975년은 정치적으로나 심정적으로 박대통령이 대단히 불안스러운 해였다. 한해 전인 74년 8ㆍ15기념식장에서 총격으로 부인을 잃어 정서적으로 크게 안정을 잃은데다가 학생ㆍ재야인사들의 반유신 투쟁으로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하기도 했지만, 대대적인 국민의 분노가 언제 폭발할 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상황이었다. 
 
1975년 8월 19일자 <동아일보>, 장준하 선생 사인에 의문점을 제기하고 있다. 이 기사를 쓴 기자는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옥살이를 했다.
 1975년 8월 19일자 <동아일보>, 장준하 선생 사인에 의문점을 제기하고 있다. 이 기사를 쓴 기자는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옥살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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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는 박정희의 사상과 도덕성을 가장 예리하게 찔러대는 재야인사였다. 5ㆍ16쿠데타를 가장 먼저 비판했고, 베트남 파병 때는 한국 청년의 피를 파는 행위라고 질타했으며, 재벌의 밀수사건 때는 "밀수왕초는 박정희"라면서 공격을 퍼부었다. 감옥에 처넣었지만 그는 옥중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기까지 했다. 유신 쿠데타에 반대하여 백만인 서명운동을 추진하면서 유신체제에 가장 먼저 '도전'한 것도 다름 아닌 장준하였다. 

더구나 정보에 의하면 당시 장준하의 거동이 심상찮았다. 임시정부청사에 게양했던 태극기를 대학에 기증하고, 선친과 김구 선생의 묘소를 찾아 맨손으로 때 이른 벌초를 하는가 하면, 각계 인사들을 은밀히 만나 무엇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8월 17일 암살당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암살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민주화운동가 장준하 선생
 박정희 정권의 암살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민주화운동가 장준하 선생
ⓒ 장준하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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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일인지 사제단은 장준하의 암살사건은 이슈화하지 않았다. 당시 보도대로 단순 실족사 아니면 의문사로 치부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8월 21일 명동성당에서 추모미사가 열려 김수환 추기경의 강론이 있었다. 김추기경은 "별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죽어서 새로운 빛이 되어 우리의 갈 길을 밝혀 줄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연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민주주의,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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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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