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누가 텔레비전 보나요." 주변에서 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과거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50%를 훌쩍 넘는 일도 있었지만, 지금은 10%를 넘기기도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러나 유튜브도 넷플릭스도 없었던 시절, 우리는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방송 시간에 맞춰 텔레비전 앞에서 손 모으고 기다렸습니다. 그때 그 시절이 기억나시나요? 과거 우리를 즐겁게 만들었던 프로그램과의 추억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편집자말]
1983년, 그해는 밤잠을 설쳐가며 TV를 보던 때로 기억하는데 내가 본 최초의 미국드라마(아래 미드) '브이(V)' 때문이었다. 아직 알파벳도 제대로 배우기 전이었지만, 제목 'V'가 VICTORY(승리)의 첫 글자를 땄다는 사실도 그때 알게 됐다. 
 
어느 날 지구에 불쑥 나타난 외계인 군단. 빨간 유니폼을 입은 멋진 사람들은 지구인에게 자신들의 과학지식과 지구의 화학물질을 교환하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이들의 속내는 다른 데 있다. 그들은 지구정복을 꿈꾸는 파충류였고, 이들의 실체를 알게 된 용감한 지구인들은 이 파충류 집단에 맞서 싸운다는 게 '브이'의 대략적인 줄거리다.
 
 미국드라마 <브이> 스틸이미지.

미국드라마 <브이> 스틸이미지. ⓒ 케네스존슨

 
물론 외계인이 나온 영화라면 그 전에 < E.T >도 있었지만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특성상 허구라는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브이'는 달랐다. 심지어 외국 어딘가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람의 탈을 쓴 파충류라니!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브이'가 방영된 후 학교에 가면 난리가 났다. 친구들도 온통 '브이' 이야기였다. 짓궂은 애들은 애먼 친구의 볼살을 꼬집으며 (파충류처럼) 피부를 벗겨내려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거의 '브이병'에 걸렸다고 해도 무방한데, 당시 일주일에 1회 방영했던 '브이'를 보고 나면 며칠 동안은 꿈 속에서 파충류에 시달려야 했다. 그 다음 주를 애타게 기다리면서 말이다. 끔찍하고 무서운데도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다. 지구인 주인공 도노반(마크 싱어 분), 줄리엣(페이 그란트 분)보다 외계인 다이애나(제인 배들러 분)가 매력적이었다.
 
다이애나의 사자 머리와 앙칼진 눈매, 똑부러지는 입술, 다부진 턱. 게다가 몸에 딱 달라붙는 빨간 스판 재질의 유니폼은 또 어떤가. 파충류가 저렇게 멋진 몸매를 갖고 있다는 게 이상했고, 꼬리는 어디에 숨긴 것인지 그게 궁금했다. 참 순진한 시절이었다. 
 
목 빠지게 기다리던 드라마
 
 미국드라마 <브이> 스틸 이미지.

미국드라마 <브이> 스틸 이미지. ⓒ 케네스존슨

 
고백하건대 내가 파충류라는 생물을 알았던 것도, 파충류(중 일부)는 허물을 벗는다는 것도 그 드라마를 보고 알게 됐다.
 
정보가 워낙 부족하던 시절이다 보니, 혼자 마음껏 상상하고 유추하고 추론했다. 또 보고 싶은데 재방송은 안 하고, 지금처럼 짤이나 하이라이트는 고사하고 예고조차 볼 수 없었으니, 그저 애타게 본방송만을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당시 '브이'는 5화까지만 방영하고 마무리됐다(1983년 5부작으로 방영된 후 1984년 19부작으로 다시 안방극장을 찾았다. 이후 2009년 '브이' 리메이크 시즌 1이, 2011년 '브이' 리메이크 시즌 2가 각각 방영됐다).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언제 시즌2를 방영한다는 건지, 이대로 끝난다는 건지 누구도 속시원히 알려주지 않았다. 그렇게 야속한 아쉬움을 남기고 '브이'는 내 기억 뒤편으로 점차 사라져갔다.
 
그리고 몇 년 뒤, TV에서 다시 '브이'를 재방영해줬다. 얼마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봤는지 손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초등학교 때 보았던 그 강렬하고 선명한 쇼크는 더 이상 없었다. 꿈 속에서도 더 이상 파충류와 싸우지 않았다. 
 
만약 지금 '브이'를 본다면?
 
요즘에야 미드가 워낙 흔한 세상이 되었고,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브이'의 신선함을 능가하는 영화나 드라마도 정말 많다.
 
만약, 내가 '브이'를 처음 봤던 그때도 지금처럼 영상 플랫폼에 접근하기 쉬웠다면 어땠을까. 다음 날 아침 일찍 포털 뉴스에 쥐 먹방 신의 비하인드 스토리, 특수효과, 배우 인터뷰, 동물단체의 입장, 제작진의 해명 등이 이어졌다면? 그만큼 '브이'의 재미도 반감됐을 것이다.
 
내 이웃 중 한 명이 파충류일지 모른다고, 어디선가 몰래 쥐를 먹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어린 몽상가는 이제 더 이상 외계인의 존재를 믿지 않을 만큼 나이를 먹었다. '브이'보다 양질의 콘텐츠가 넘쳐나는 세상이 됐지만 무엇보다 아쉬운 건, 어릴 적 순수함을 추억인 양 곱씹어야 하는 세월의 무게일 테다.
추억의 미드 브이 80년대 드라마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