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누가 텔레비전 보나요." 주변에서 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과거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50%를 훌쩍 넘는 일도 있었지만, 지금은 10%를 넘기기도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러나 유튜브도 넷플릭스도 없었던 시절, 우리는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방송 시간에 맞춰 텔레비전 앞에서 손 모으고 기다렸습니다. 그때 그 시절이 기억나시나요? 과거 우리를 즐겁게 만들었던 프로그램과의 추억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편집자말]
"어, 여보, <런닝맨> 한다! 빨리 와!"
"아유, 또 그러네. 그냥 먼저 봐."
"아니야, 같이 보게 빨리 와, 지금!"
"아이고, 알았어요. 가요, 가. 대충 끝났으니 형님, 같이 가세요."
"어? 어, 그래." 


언젠가 남동생네 집에 들러 저녁을 잘 얻어먹고 올케와 설거지 중이었다. 그런데, 거실에 있던 남동생이 뜬금없이 올케를 급히 재촉했던 것이다. 왜 그런가 알고 보니, 재미있는 프로그램은(전적으로 남동생 취향) 딸과 아내, 온 가족이 둘러앉아 함께 봐야 한다는 게 그 집의 룰이란다. 순전히 남동생 고집이란다. 

'쟤는 참 별 일로 사람을 괴롭히네' 생각하며 소파에 앉아 함께 웃고 떠들며 TV를 보고 있으려니 뭔가 그 이유를 설핏 알 것 같았다. TV를 보며 일단 가족 간에 오가는 말이 많았다. 장면별로 제각기 평을 해대느라 그랬다. 함께 깔깔대고, 아쉬워도 했다. 바쁜 일상에서 TV를 통해 온 가족이 같은 경험을 공유하며 대화와 감정을 손쉽게 나눌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동생네 가족들과 함께 있으니 자연스레 어린 시절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TV 앞에 가족들과 모여 앉아 좋아하는 프로그램에 빠져들던 날들 말이다. 동생이 TV를 온 가족이 함께 봐야 한다고 고집하는 이유도 어쩌면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센티멘탈한 감정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르겠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TV보던 시절
 
 KBS2 <전설의 고향>

KBS2 <전설의 고향> ⓒ KBS2

 
80년대 중, 후반 그 시절에 오락거리로 TV 만한 것이 없었다. 우리 집도 기다리는 프로그램이 있는 날이면 저녁상을 일찍 물려놓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TV를 봤다. 삶은 고구마나 옥수수, 홍시 같은 야식을 옆에 두고. 나를 포함한 3남매가 TV를 너무 많이 본다고 부모님이 걱정하곤 했지만, 그래도 두어 프로그램 정도는 온 가족이 의기투합하여 빼놓지 않고 챙겨보곤 했더랬다.  

그중에서도 단연 압권은 손에 땀이 흥건해질 정도로 벌벌 떨게 했던 KBS 2TV<전설의 고향>이란 프로였다. <전설의 고향>은 전설, 민간설화 등의 옛이야기를 고전 사극의 형식으로 담아내는 프로그램으로 납량특집 드라마의 원조격이다. 1977년 첫 방영 이후 1989년까지 12년 동안 매주 한 편씩 인기리에 방영되었고, 이후 90년대와 2000년대에도 다시 기획되어 일정기간 방영되기도 했다. 

그 프로그램의 열혈 시청자는 바로 엄마였다. 엄마는 웬만한 귀신 분장과 특수효과로는 눈 하나 꿈쩍 안 하시는 분이셨다. 매회 초긴장 상태로 애간장을 졸이던 나와는 차원이 다른 분이셨다. 그런 든든한 엄마의 등 뒤에 어린 3남매가 서로를 밀쳐가며 거머리처럼 붙어 '여우 각시', '귀녀의 한', '저승 할망', '구미호', '귀곡성' 등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에피소드들을 무수히 봤다. 

아니 청취했다. 눈 뜨고 지켜볼 깜냥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부엉이 울어대고, 푸르스름한 안개인지 연기인지가 짙게 깔리는 밤 장면만 나오면 왜 그리 심장이 졸아드는지. 한 여름에 이불까지 덮어쓰고도 더운지도 몰랐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내 다리 내놔"란 유명한 대사이다. '덕대골' 편에 나오는데, 당시 초등생들 사이에서는 한동안 이 대사가 대 유행을 했다.

대강의 줄거리는 이렇다. 병든 남편을 돌보던 아내에게 어느 날 지나가는 도사가 장사를 지낸 지 3일이 지나지 않은 시체의 다리를 잘라서 푹 고아 남편에게 먹이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알려준다. 아내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한밤중에 묘지로 가서 낫으로 시체의 다리를 뚝 잘라 들고 왔는데, 그것이 다음날 아침에 보니 산삼 뿌리여서 남편도 낫고 큰돈도 벌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KBS2 <전설의 고향> '덕대골 편'

KBS2 <전설의 고향> '덕대골 편' ⓒ KBS2

 
 KBS2 <전설의 고향> '덕대골 편'

KBS2 <전설의 고향> '덕대골 편' ⓒ KBS2

 
특히 나를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던 부분은 바로 아내가 다리를 자르는 순간 시체가 "내 다리 내놔!"라고 외치면서 벌떡 일어선 장면. 한쪽 발로 깡충깡충 뛰면서 여인을 쫓아오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심장이 벌렁거린다. 얼마나 무서웠으면 어린 시절 이 장면이 꿈에 나와 한동안 괴로웠다.

프로그램이 끝나면 그제야 긴장이 풀려 긴 한숨을 내쉬며 이불을 벗어젖혔다. 그러면 엄마가 물어보셨다. 

"저게 그렇게 무섭니? 잘 봐봐. 그냥 분장일 뿐이잖아." 
"엄마는 저게 안 무서워? 난 엄청 무서운데..." 
"무서울 게 뭐가 있니? 엄마 젊은 시절엔 늦은 밤 공동묘지도 혼자 지나가곤 했는데, 뭐. 저건 아무것도 아니지." 


그렇게 듣게 된 엄마의 공동묘지 이야기에는 외할머니에 관한 아픈 사연이 녹아 있음을 뜻밖에 알게 되었다. 

공동묘지에 얽힌 아픈 추억

엄마가 결혼 전 외할머니께서 큰 병으로 입원 중이셨단다. 엄마는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야 병원에 들려 할머니를 돌봐 드린 후 늦은 밤 귀가하곤 했는데, 하필 공동묘지가 지름길이었다고 한다. 젊은 엄마는 그 길을 걸으며 쌓여가는 병원비와 외할머니에 대한 걱정으로 눈물 흘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한다. 감당해야 할 현실의 무게 앞에 제 아무리 을씨년스러운 공동묘지라도 무슨 거리낌이 되었겠나 싶다.

삶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이 TV 속 귀신보다 더 두렵고 무서울 수 있음을 막연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철없는 어린 시절이었기에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도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각양각색의 귀신들은 여전히 무서웠다. 콩알만 한 담력에도 <전설의 고향>을 쭉 시청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함께 둘러앉은 가족들 덕분이었을 것이다. 방송이 끝나면 의지가 되는 가족들 속에 함께 있음을 언제나 안도하곤 했으니 말이다.

이제 온 가족이 둘러앉아 TV를 오순도순 보는 일은 그야말로 옛일이 되어간다. 각자 보고 싶은 콘텐츠를 휴대폰이나 PC로 보기 때문이다. 취향이 제각각이고 여유 있는 시간대도 다르니 당연한 일이다. 아쉬운 건, 동생네 집처럼 룰을 정해 함께 보지 않는 한, 온 가족이 모여 앉아 감정과 사연을 나누던 시절이 영 가버린 것 같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다행스러운 점이 있으니 유행이 돌고 돌아 우리가 좋아했던 콘텐츠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드라마 tvN <응답하라 1988> 덕분에 40대 엄마와 고등학생 딸이 80년대 가요들, 이적의 '걱정 말아요 그대'나 신해철의 '그대에게' 등을 함께 즐길 수 있다.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덕분에 70대의 할아버지와 2010년대 태생의 손자가 달고나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 나눌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우리 가족도 오랜만에 옹기종기 앉아 재미난 프로그램을 함께 볼까 싶다. 혹시, 또 아나, 가족 중 누군가의 엄청난 이야기가 프로그램의 어떤 내용에 꿰어져 술술 풀려 나올지. 설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기자의 개인 브런치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온 가족 TV 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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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궁금한 게 많아 책에서, 사람들에게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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