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 <성덕>을 연출한 오세연 감독.

다큐멘터리 영화 <성덕>을 연출한 오세연 감독. ⓒ 부산국제영화제


역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영화 중 이처럼 큰 웃음과 박수가 터진 경우가 또 있었을까. 대학교를 휴학한 채 고스란히 지난 2년을 투자한 오세연 감독의 첫 영화 <성덕>은 말 그대로 팬덤이 직접 팬덤 문화 내부로 깊숙하게 들어가 스스로를 바라본 성찰의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지난 9일 공식 첫 상영을 마친 오세연 감독을 직접 만났다.

10일 오후 부산 해운대 영화의 전당 인근에서 만난 그는 "첫 상영이라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는데 생각보다 더 뜨거운 반응이라 놀랐고, 오히려 제가 더 감동받았다"는 소회부터 전했다. 그 열기는 어쩌면 상처받은 팬덤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그의 영화가 전달했기 때문일 것이다. 

흑역사를 백역사로

시작은 분노의 감정 때문이었다. 중학생 때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고, 그러면서도 한복을 입고 다니며 정준영 팬미팅 자리에 나타나는 행동으로 눈도장을 찍었다. 한 예능 프로에 나가 정준영을 향한 마음을 고백하는 장면이 영화에도 나오는데 감독 스스로도 "성격적으로 정준영에게 영향받은 게 컸다"고 고백할 만큼 마음을 다해 좋아했던 대상에게 큰 배신감을 느낀 셈. 

"2019년 3월 단톡방 사건이 터졌을 때는 이것에 대해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바로 못 했다. 정신 차리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1개월이 지난 뒤 주변 친구들이 성덕이니까 한번 영화로 해보라고 하더라. 그때까지 분노를 삭일 길이 없어서 다른 팬들을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범행이 사실로 밝혀졌음에도 여전히 정준영의 남은 팬들이 있다는 게 충격이었다. 왜 저러지? 같이 만나봐야겠다 싶었다.

남아 있는 팬들이 박사모와 비슷하게 보여서 박근혜 지지자분들을 만나는 식으로 영화가 좀 확장성을 가졌으면 했는데 만들다 보니 그것보단 (분노하며 지지를 철회한) 팬 이야기에 집중하고 싶더라. 기획과 구성을 오래 준비하진 못했다. 재판이 곧 있었기에 시급하게 찍을 일이 많았고, 주변 친구들도 마음이 변하기 전에 찍어야 했다. 거칠게 쓴 기획안이 다행히 여러 제작지원 사업에 선정되면서 시작해볼 수 있었다."


십시일반 모인 제작지원금에 사비를 조금 보태 제작비를 마련했다. 아무리 분노했다지만 소위 흑역사라 할 수 있는 자신의 과거를 드러내며 영화를 공개한다는 게 적잖은 부담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세연 감독은 "약간 수치심이 좀 있긴 하지만 본능적으로 재밌겠다는 걸 알았던 것 같다"며 말을 이었다.

"남의 고통은 나의 기쁨이라는 말이 있잖나. 제 고통으로 관객분들이 웃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날 봤을 때도 웃겼거든. 흑역사를 백역사로 만들어버리자는 생각이었다. 친구들도 좋아했다. (배우 조민기의 팬이던) 엄마도 직접 영화에 출연하셨잖나. 비범한 분이다. 막 웃으시며 재밌겠다고 하셨다(웃음).

사실 영화 준비과정에서 어떤 방해나 비난은 없었다. 작은 영화이기도 하고. 근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하기로 결정하며 SNS에 그 사실이 알려지다 보니 한 팬에게 장문의 메시지가 왔다. 정준영에 대한 이야기라는 건 전혀 알리지 않았는데 영화 스틸 이미지에 제가 그린 그림을 보고 알아채신 분이었다. 그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며 꼭 <성덕>을 보고 싶다고 하시더라."

 
 다큐멘터리 영화 <성덕>의 한 장면.

다큐멘터리 영화 <성덕>의 한 장면. ⓒ 부산국제영화제

 
박근혜 지지 태극기 집회에 간 사연

오세연 감독은 정준영 사건을 최초 보도한 기자를 직접 만나 출연을 제안했고, 태극기 집회에 나가 박근혜 전 대통령 지지자들을 만났다. 범법 행위가 증명된 스타를 여전히 좋아하는 팬들의 맹목적성과 박근혜 지지자들의 속성이 비슷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동시에 정준영 성범죄 사실을 보도한 기자를 오랜 시간 증오하고 조리돌림 한 감독 스스로에 대한 반성의 의미도 있었다. 

"남아 있는 팬들이 도무지 이해 안 된다며 마치 난 다른 사람인 듯 말하고 다녔는데 3년 전 일기장을 보고 나도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비난했다는 걸 알게 됐다. 쪽팔리고 너무 죄송하더라. 그 기사 직후 무혐의가 나왔다고 해서 기자님이 엄청 폄훼 당했다. 일베 사이트에서도 공격했다. 일단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다. 구구절절 엄청 길게 메일을 보냈는데 기자님께서 위로가 됐다며 도움이 혹시 필요하면 말해달라고 답장하셨다. 오잉? 도움이라 하시길래 덥석 출연을 부탁드렸더니 흔쾌히 수락하셨다. 

박근혜 태극기 집회에 가선 우리가 나름 전문 장비를 갖고 들어가니까 질문들을 되게 많이 하셨다. 지금 대통령이 누구야? 하시길래. 문재인이요 했더니, 아니지! 박근혜지 이러셔서. 아아 맞아요! 맞장구치기도 했다. 일종의 사상검증이었다(웃음). 나중엔 젊은 친구들이 개념도 있다면서 부산지부 회장님을 연결시켜 주시기도 했다. 다음에 부산서 서울 올 때 돈 내지 말고 그 버스를 타라면서."


자학과 유머, 나름의 성찰이 담겨 있는 <성덕>을 두고 오세연 감독은 "만약 제가 아닌 타인의 삶에 대한 영화였다면 이렇게 만들진 않았을 것"이라며 "내 이야기라 자학할 수 있는 것이고, 사실 나름 전 진지한 사람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분명한 사실은 이 영화로 팬덤의 속성과 그 구성원들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누군가의 팬이었다가 그 마음을 접게 된 감독 스스로는 팬덤 문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어려운 질문이다. 어쨌든 살면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잖나. 우린 그 대상이 연예인이었던 거다. 뭔가 좋아하지 않고 살기 어렵다. 그 대상에게서 삶의 돌파구를 찾거나 설렘과 기쁨을 얻을 수도 있다. 현실이 힘들더라도 날 무조건 행복하게 해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 내가 사랑을 줄 존재가 있다는 건 삶을 한층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팬덤이 특별한 존재들은 아니다. 제 친구들 중 70% 이상이 덕후다. 덕질이 우리에겐 당연한 일상이라 개인적인 특별함은 없는데 이 영화를 만든 감독으로서 바라보면 그 자체가 특별한 것 같긴 하다. 살면서 누군가를 전폭적으로 사랑하긴 힘들잖나. 자신보다 상대를 더 귀하게 여기고, 내 행복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행복을 진심 빌어주는 마음이 주변에 퍼지기도 하니 특별한 것 같다."

 
 다큐멘터리 영화 <성덕>의 한 장면.

다큐멘터리 영화 <성덕>의 한 장면. ⓒ 부산국제영화제

 
오세연 감독은 스스로를 웃음 욕심이 있으면서도 진지한 사람으로 정의했다. 감독이면서 작가기도 한 아녜스 바르다를 좋아한다며 그는 "극영화도 잘하고 다큐도 잘 만드는 감독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성덕>을 하면서 나름 힘들었던 게 제가 좋아하는 영화와 많이 달라서였다. 미학적이고 진지한 걸 좋아하는데 이건 시끄럽고 엉뚱하잖나. 이 영화를 편집할 때 마음이 안 좋기도 했다. 첫 영환데 완성한다는 게 두렵기도 했고 어떤 반응이 올지 매일 아침 떠올리면 무섭기도 하더라. 아예 손을 못 대던 기간도 있었다.

한편으론 영화에 유머가 담기는 게 중요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제가 좋아하는 진지한 영화들도 보면서 미소짓게 하는 순간이 있기에 사랑했단 것 같다. 물론 <성덕>은 웃음이 좀 과하긴 한 것 같다(웃음). 근데 울리는 것보다 웃기는 게 더 어렵잖나. 일단 그걸 해냈다는 게 뿌듯하다. 앞으로도 재밌게 영화 일을 하고 싶다."


<성덕>의 제작사 이름은 해랑사다. 홍상수 감독의 팬인 오세연 감독은 무작정 홍 감독의 전원사처럼 '사'자로 끝내는 제작사 이름을 갖고 싶었고, 한 친구의 제안으로 탄생한 게 지금의 제작사다. "사랑해를 거꾸로 한 단어다"며 오세연 감독이 밝게 웃어 보였다. 1인 가내수공업 제작사의 대표인 그가 제작사 이름처럼 영화에 대한 사랑을 무한 증식시키길 바라본다. 참고로 <성덕2>의 가능성도 열려 있다고 하니 기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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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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