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리 군단' 이탈리아가 '축구 종가' 잉글랜드를 꺾고 53년 만에 유럽축구선수권대회 정상에 올랐다. 이탈리아는 12일(한국시간) 영국 런던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0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2020) 결승에서 연장전까지 120분 동안 1-1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으나 승부차기에서 잉글랜드를 3-2로 제압했다. 이탈리아는 자국에서 열렸던 1968년 대회 이후 반세기만에 역대 2번째로 유럽 정상에 등극하는   데 성공했다.

'명장' 로베르토 만치니 감독의 부임이 신의 한수였다. 이탈리아 축구는 불과 몇 년전만 하더라도 극심한 슬럼프에 빠져있었다. 잔 피에로 벤투라 감독 시절 이탈리아는 2018 러시아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한 스웨덴과의 유럽지역 플레이오프 맞대결에서 1무 1 패로 밀리며 무려 60년 만에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국제축구연맹(FIFA)랭킹은 한때 역대 최저인 20위까지 추락하기도 했다. 월드컵 우승 경력만 4회에 빛나는 축구 강국의 자존심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벼랑 끝에 몰린 이탈리아가 선택한 구세주는 만치니였다. 현역 시절 세리에A와 삼프도리아의 레전드로 불렸고 A매치에서도 36경기에 출전하여 4골을 넣었던 스타 공격수 출신이었다. 지도자로서도 인터밀란과 맨체스터시티의 우승을 이끌며 명장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던 시점에는 만치니의 지도자 커리어도 하향세에 놓여있었다. 갈라타라사이, 인테르 2기, 제니트 등에서 연이어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탈리아 축구대표팀의 전력도 더 이상 델 피에로, 토티, 피를로 같은 왕년의 판타지스타들이 넘쳐나던 호화군단과 거리가 멀었다.

이탈리아가 만치니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보다 '리빌딩'에 있었다. 만치니 감독은 클럽 감독 시절부터 팀 재건과 세대교체에 있어서만큼은 탁월한 면모를 여러 차례 증명한 바 있다. 그가 지도자로 명성을 쌓기 시작한 인터밀란이나 맨체스터시티 시절에도 성적에 대한 높은 기대치 때문에 가려진 감이 있지만, 성장 가능성이 높은 선수를 젊을 때 영입하거나 과감하게 중용해 팀의 스쿼드를 탄탄하게 꾸려놓은 덕분에, 만치니가 물러난 이후에도 이 선수들이 전성기에 돌입하며 후임 감독들이 수혜를 입은 경우도 많았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이런 면모는 빛을 발했다. 2018년 5월 아주리 군단의 지휘봉을 잡은 만치니는 부임과 동시에 무한 경쟁과 스피드 축구로 이탈리아의 대대적인 체질개선에 나선다. 만치니 감독이 부임한 3년 동안 대표팀을 거쳐간 선수만 60명이 넘는다. 소속팀이나 선수의 이름값에 연연하지 않고 다양한 선수들을 시험하면서 최적의 조합을 찾는가 하면, 끊임없이 현대축구의 트렌드를 따라가는 데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동안 이탈리아 축구하면 견고한 '빗장수비'를 바탕으로 한 지키는 축구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단기전인 국제대회에서 실리적이기는 했지만 창의성이 부족한 데다 지루하고 거칠고 심지어 더티하다는 오명을 안기도 했다. 만치니는 이탈리아의 전통적 강점인 수비 조직력은 유지하면서도, 점유율과 공간 장악, 무한스위칭으로 대표되는 유기적인 전술변화를 통해 이탈리아 축구가 공격적인 축구도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만치니호는 4-3-3 포메이션을 기반으로 하지만 공격 시에는 실질적으로 3-5-2나 3-4-3을 넘나는다. 선수들이 포메이션에 얽매이지 않고 유기적인 움직임 속에서 공간을 만들고 득점 루트를 창출하는 플레이를 추구한다.

특히 핵심은 중앙에 위치한 3명의 미드필드진이다. 만치니 감독은 조르지뉴, 바렐라, 로카텔리로 이어지는 탄탄한 조합을 구축했다. 이들이 수비진 앞에 위치해 공수를 넘나들며 상대 역습을 조기에 차단하는 수비를 보이는가 하면 공격에서는 후방 빌드업과 스위칭 플레이를 통하여 상대 수비를 교란시키고 전방에 킬패스를 찔러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유로2020 대회를 앞두고 주전이던 마르코 베라티가 부상으로 낙마하는 악재가 있었지만, 로카텔리가 바로 빈 자리를 메운 것은 만치니 감독의 꾸준한 선수실험과 경쟁체제의 효과였다.

공격진은 유로2020에서 3골 이상을 넣는 대형 공격수는 없었지만 무려 5명의 선수가 멀티골을 기록할만큼 공격루트가 다양해진 모습을 보였다. 주포 치로 임모빌레를 비롯하여 이탈리아 선수들은 활발한 활동량과 적극적인 압박 및 수비가담으로 공간을 창출하는 이타적인 플레이에 충실했다. 이탈리아는 이번 대회에서 13골을 넣으며 스페인과 최다득점 공동 1위에 올랐다.

만치니가 이끄는 이탈리아는 2018년 포르투갈과의 네이션스리그 경기에서 0-1로 패한 것을 마지막으로 놀랍게도 3년간 단 한번도 지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와 친선전 1-1 무승부를 시작으로 잉글랜드와의 유로2020 결승전까지 무려 A매치 34경기 연속 무패(27승 7무, 승부차기 승리는 무승부로 집계)행진이다. 이탈리아의 피파랭킹은 어느덧 7위까지 회복했다.

이 기간 이탈리아는 유로 2020 예선에서 10전 전승, 37득점 4실점을 기록하는 파죽지세로 조1위를 차지하며 여유있게 본선에 진출했다. 현재 진행중인 2020-21 UEFA 네이션스리그에서는 4강 진출, 2022 카타르월드컵 유럽지역예선에서도 3연승으로 조 1위에 올라 있다. 유로2020 본선에서는 조별리그 A조에서 웨일스(1-0승), 스위스(3-0승), 터키(3-0승)를 상대로 '무실점 3연승'을 거두고 16강에 올랐다.

다만 토너먼트에서는 고비가 많았다. 4경기중 3번이 연장전이었고 스페인과의 4강전-잉글랜드와의 결승전은 모두 승부차기까지 가는 대혈전이었다. 무실점 경기는 한번도 없었고 무승부없이 이긴 경기도 모두 한골차 승부였다. 이탈리아는 토너먼트 첫 경기였던 오스트리아(랭킹 23위)에게 대회 첫 실점을 허용하며 연장 접전 끝에 2-1로 신승하며 한숨을 돌렸다. 8강전에서 국제축구연맹 랭킹 1위 벨기에와 맞붙어 2-1로 신승했으나 대회 최고의 활약을 펼치던 스피나촐라를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잃는 악재도 겹쳤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기세는 멈추지 않았다. 4강에서는 FIFA 랭킹 6위이자 8년전 유로 결승에서 0-4 참패의 굴욕을 안겼던 스페인과 1-1로 비긴 뒤 승부차기 혈투 끝에 승리하며 빚을 갚았다. 결승에서 만난 상대는 유로대회 역사상 첫 우승을 노리는 잉글랜드, 결승전이 열리는 장소는 잉글랜드의 축구성지인 웸블리였다. 이탈리아는 전반 2분만에 루크 쇼에게 '유로 결승역사상 최단시간 골기록'으로 불의의 선제골을 허용하며 어려운 경기를 펼쳤으나, 후반 22분 세트피스에 이은 혼전 상황에서 보누치의 동점골로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승부차기에서는 이탈리아의 2번째 키커 안드레아 벨로티가 조던 픽포드의 선방에 막히며 위기를 맞이했으나, 잉글랜드의 3번째 키커 마커스 래쉬포드가 실축하고 4번째 키커 제이든 산초의 슈팅을 골키퍼 잔루이지 돈나룸마가 선방해내며 이탈리아가 역전에 성공했다. 이탈리아는 다시 5번 키커 조르지뉴의 슈팅이 픽포드에게 막혔지만, 돈나룸마가 잉글랜드 마지막 키커 사카의 슈팅을 저지해내면서 이탈리아가 극적인 역전 우승을 확정했다.

공교롭게도 사우스게이트 잉글랜드 감독이 승부수로 투입한 3-5번 키커들이 모두 10대 후반 -20대 초중반의 어린 선수들이었다는 감안하면, 중요한 순간에 대처하는 압박감에서 상대적으로 메이저대회 결승 경험이 풍부한 이탈리아 축구의 노련미가 판정승을 거둔 셈이었다. 또한 홈 이점과 대진운, 준결승에서의 PK 논란 등을 등에 업고 비교적 수월하게 결승까지 올라온 잉글랜드에 비하여 토너먼트 들어 매경기를 어렵게 치르고 올라온 것도 이탈리아에게는 끝까지 집중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전화위복이 됐다.

이탈리아가 메이저대회 우승을 차지한 것은 2006 독일월드컵 이후 무려 14년 만이다. 2018 러시아월드컵의 부진을 말끔히 털어냈을 뿐 아니라, 전통적으로 유럽선수권에서 약하다는 이미지를 벗어나 지난 2000년과 2012년 준우승의 상처도 2전 3기만에 씻어냈다. 클럽 감독 시절에는 리그 경기에서는 강하지만, 유럽클럽대항전같은 토너먼트 단기전에서 약하다는 이미지가 있던 만치니 감독도 '유로 우승 감독'이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을 얻어내며 지도자 인생의 정점을 찍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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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2020 이탈리아우승 만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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