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21 시즌 여자배구는 학폭(학창시절 폭력)-김연경-GS칼텍스라는 3가지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차상현 감독이 이끄는 GS칼텍스 KIXX는 30일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열린 도드람 2020-2021 V리그 여자부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와의 챔피언 결정 3차전 경기에서 세트스코어 3-2로 승리하며 시리즈 전적 3-0으로 우승에 성공했다. 컵대회와 정규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GS칼텍스는 챔프전에서도 '여제' 김연경이 이끄는 흥국생명에게 3연승을 거두며 통산 3번째 챔프전 우승이자 첫 통합우승을 차지했다.

올해 여자배구는 그야말로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건의 연속이었다. 흥국생명은 지난 오프시즌만 해도 V리그 남녀부를 통틀어 가장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배구 여제' 김연경이 국내 무대에 전격 복귀하고 국가대표 세터 이다영의 FA 영입과 이재영의 잔류까지 그야말로 막강 전력을 구축했다.

'어차피 우승은 흥국생명(어우흥)'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일 정도로 빈틈이 없어보였다. 다만 일각에서는 국내 복귀를 위하여 페이컷(자발적인 연봉삭감)까지 감수한 김연경 때문에 샐러리캡 제도의 취지가 무력화되었다는 지적과 함께 지나친 전력불균형으로 리그의 재미가 반감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승승장구할 것 같았던 흥국생명의 질주는 학폭 논란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변수에 발목이 잡혔다. 시작은 이다영의 SNS에서 제기된 팀동료와의 불화설이었다. 이다영은 흥국생명 이적 이후 기대에 못미치는 부진을 보이며 여론의 비판을 받았고, 이다영은 SNS를 통하여 팀동료에게 괴롭힘을 당하여 힘들다는 뉘앙스의 글을 연이어 게재하여 도마에 올랐다. 실명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많은 이들은 이다영이 저격한 대상이 김연경이라고 추측했다. 김연경도 인터뷰를 통하여 팀내에 불화가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이다영의 SNS가 부른 나비효과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과거 이다영-이재영 자매에게 학창 시절에서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했다는 피해자가 등장하며 온라인에서 쌍둥이의 학폭 전력을 폭로한 것. 피해자가 폭로에 나서된 계기는 가해자였던 이다영이 SNS에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데 격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다영-이재영 자매는 각종 의혹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자 결국 학폭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쌍둥이 자매는 올 시즌 소속팀 전력에서 제외되었고 국가대표에서도 무기한 자격정지 징계를 받으며 배구계 퇴출 위기에 몰렸다. 이들로부터 시작된 논란은 이후로도 이상열 전 KB손해보험 감독, 송명근-심경섭(OK금융그룹), 박상하(전 삼성화재)의 폭력 사건에 대한 폭로로 이어지는 등 배구계를 넘어 우리 사회 전반에 '학폭 미투' 현상이 활발하게 제기되는 계기가 됐다.

쌍둥이 자매의 소속팀이었던 흥국생명은 학폭 논란의 직격탄을 맞았다. 2라운드까지만 해도 10연승을 질주하며 선두를 굳건히 했던 흥국생명은 3라운드부터 외국인 선수 루시아의 부상이탈과 이다영의 부진 등으로 주춤하기 시작하더니 학폭 논란이 터진 4라운드 이후로는 급격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흥국생명은 이다영-이재영 자매가 이탈한 공백을 끝까지 메우지 못했고, 대체 외국인 선수로 영입한 브루나의 기량도 평균 이하였다. 이는 자연히 김연경의 부담이 가중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흥국생명은 정규리그 마지막 8경기에서 2승 6패에 그치며 GS칼텍스에 정규리그 1위와 챔피언결정전 직행티켓를 내줬다. 플레이오프에서는 김연경의 분전에 힘입어 IBK기업은행을 2승 1패로 물리치고 결국 챔프전에 오르는 데는 성공했지만, 탄탄한 조직력으로 맞선 GS의 벽을 넘지 못하고 단 한 경기도 따내지 못한 채 돌아서야 했다.

결국 흥국생명은 컵대회를 비롯하여 정규리그-챔프전까지 올 시즌 3개 대회를 모두 2등으로 마치는 진기록을 남기며 무관에 그쳤다. 다음 시즌 김연경의 국내 잔류 여부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인 데다 배구계 퇴출 여론이 극심한 이다영-이재영 자매의 거취도 불투명한지라 흥국생명으로서는 다음 시즌이 더 걱정이다. 불과 반년전만해도 어우흥 소리를 듣던 것을 감안하면 아이러니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흥국생명은 비록 용두사미로 시즌을 마감했지만 김연경의 '스타 파워'는 여전히 돋보였다. 11년 만에 국내로 돌아올 때부터 김연경의 경기력에서 일거수일투족까지 모두 뉴스거리로 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그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뜨거웠다. 김연경의 존재가 있어서 올 시즌 여자배구에 대한 관심과 화제성이 더 높아진 것도 분명하다.

전문가들은 흥국생명에 그나마 김연경마저 없었다면 준우승조차도 어려웠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GS칼텍스와의 챔프전에서 압도적인 열세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김연경의 열정적인 프로의식과 리더십은 배구계에 많은 귀감이 되었다는 평가다.

김연경은 이미 포스트시즌 미디어데이를 앞두고 "한국 무대에서 뛰는 마지막 무대가 될 수 있다"며 이별 가능성을 암시한 바 있다. 적지않은 나이에도 김연경은 여전히 해외무대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서 각종 사건사고와 여론의 과도한 관심에 지친 김연경이 해외무대 재진출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올해 열리는 도쿄올림픽 출전을 위한 경기력 유지를 명분으로 국내 복귀를 선택했던 김연경은, 이번 올림픽을 끝으로 국가대표팀에서도 은퇴할 가능성이 유력한 만큼 향후 거취에 대한 운신의 폭이 넓은 편이다. 팬들은 김연경이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해야 한다며 지지를 보내고 있다.

'최후의 승자'가 된 GS칼텍스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GS는 올시즌 내내 흥국생명에게 여론의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며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은 측면이 있다. 하지만 GS는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격언을 모범적으로 증명하며 진정한 승자로 등극했다. 단일시즌 3관왕은 여자배구 사상 최초다.

GS는 이미 컵대회에서 '완전체' 흥국생명의 무실세트 행진을 저지하며 첫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정규리그에서도 흥국생명의 10연승을 가로막고 첫 패배를 안기는 등 학폭논란이 터지기 전부터 유력한 대항마로 손색이 없는 모습을 보였다. 지난 2월 28일에는 6라운드 흥국생명과의 시즌 최종전에서 승리해 마침내 정규리그 1위를 역전하는 데 성공했다. 직행한 챔프전에서 다시 만난 흥국생명을 상대로는 내리 3연승을 스윕하는 압도적인 전력을 과시하며 대망의 트레블을 완성했다.

GS칼텍스는 무리한 외부 투자나 페이컷같은 꼼수없이도, 오로지 착실한 육성과 리빌딩만으로 지금의 우승전력을 구축한 모범사례로 꼽힌다. 2016년 차상현 감독 부임 이후 신인드래프트에서의 성공적인 선수 영입을 통하여 차근차근 전력을 끌어올렸다. 강소휘(2015-16시즌 신인드래프트 전체 1순위), 안혜진(2016-17시즌 3순위) 한수진(2017-18 1순위) 권민지( 2019~20시즌 3순위) 등이 차례로 GS 유니폼을 입으며 팀의 주축으로 성장했다.

지난해부터 가세한 206cm 최장신 외국인 선수 메레나 러츠의 합류로 약점이던 높이를 보강하며 이소영-강소휘와 막강한 삼각편대를 구축했다. 여기에 2019년 트레이드로 영입한 베테랑 센터 한수지는 김연경도 고전할 만큼 강력한 블로킹으로 수비에서 기여했다.

또한 GS는 학폭 논란 이후 단지 성적만이 아니라 구단 이미지에도 가장 큰 수혜를 입은 팀이기도 하다. 올 시즌 배구계가 남녀를 막론하고 각종 사건사고로 얼룩진데 비하여 GS는 논란청정지역으로 불릴만큼 성적과 팀분위기 모두 시즌 내내 최상의 모습을 유지했다. 혼자 팀을 좌우하는 슈퍼스타는 없었지만 모든 선수들이 각자의 역할을 잘해내고 서로는 챙겨주는 훈훈한 분위기로 박수를 받았다. 슈퍼스타 군다에서 김연경의 '원맨팀'으로 전락해버린 흥국생명이 진정한 '원팀'으로 성장한 GS칼텍스에 완패한 모양새는 올해 여자배구의 판도가 어떻게 바뀌어왔는지를 요약해주는 장면이다.

2020-21시즌은 우여곡절 끝에 막을 내렸지만 여자배구는 앞으로도 많은 숙제와 불확실성을 안은 채 오프시즌에 접어든다. 흥국생명은 김연경과 이다영-재영 자매의 거취 문제부터 정리하는 게 급선무다. 배구계도 팬들의 싸늘한 여론과 실망감을 직시하고 이번 학폭 사태에 대한 올바른 대처방안과 출구전략을 다시 모색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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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 학폭사태 GS칼텍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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