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우연히 TV조선 <아내의 맛>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박은영 아나운서가 출산을 앞두고 둔위교정술을 시술받는 장면이 방송되었는데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나도 처음 듣는 시술법이었다. 아이가 거꾸로 자세를 잡은 경우(역아)를 들어보기는 했어도 시술을 통해 그 자세를 바꿀 수 있다는 건 놀라웠다. 

둔위교정술이란 임신 말기에 태아가 둔위(엉덩이가 아래로 있는 자세) 상태에 있을 때 산모의 복부를 손으로 밀어 태아의 머리가 아래로 가도록 자세를 바꾸는 시술이다. 부작용 확률이 매우 낮은 안전한 시술이기는 하나 출혈 등의 응급 상황 발생 시에는 제왕절개 수술을 한다고 하니 만삭인 그녀의 입장에서는 많이 긴장되고 불안했을 것이다.

스튜디오에 직접 출연한 그녀의 말에 따르면 35초만에도 태아의 자세를 바꿀 수 있다고 하는데 그녀의 경우 태아의 엉덩이가 골반에 끼어 있어 자세를 바꾸기가 쉽지 않은 상태였다. 의사의 진료실에서 이루어진 첫 시도가 실패한 후 그녀는 응급상황을 대비해 분만실로 이동해야 했다. 분만실에서 몇 번의 재시도 끝에 의사가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가 온 힘을 다해 배를 문지르고 밀어낸 후에야 성공할 수 있었다.

쉽지 않은 엄마가 되는 일

시술이 끝나고 그녀는 분만실 밖에 있는 남편과 통화를 하며 엄마가 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 같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녀와 비슷하게 노산에 자연분만의 꿈을 꿨지만, 스무시간이 넘는 진통이 무색하게 수술로 아이를 낳았던 나는 여전히 이런 상황 앞에선 취약해진다. 아이를 낳은 지 꽤 되었는데도 출산 당시에 느꼈던 감정들은 여전히 생생한 모양이다.

스튜디오에 나와 있던 다른 여자 출연진들도 그런 점에서는 비슷한 듯 보였다. 아이를 낳는 일이 오로지 여자만의 일은 아니지만 몸의 기억은 어쩔 수 없이 출산을 직접 경험한 여자들만의 것이기는 하다. 때문에 출산의 경험을 감정적으로 공유하는 일은 쉽지 않다. 

다만 그 당사자를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배움은 있다. 생명을 잉태하고 세상에 내어 놓는 일의 예민함과 불안함, 부담과 책임감 사이를 오가는 줄타기를 옆에서 지켜 보며 나름의 감수성을 키워 나가는 것이다. 우리 엄마들 세대처럼 육아가 여자만의 일이었던 시대도 이미 끝났을뿐더러, 공감 능력이란 것이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본 조건이란 사실 쯤은 이제는 누구나 안다. 그러나 가끔은, 그 감수성이 아슬아슬 모자라다 느껴질 때가 있다.
 
 TV조선 <아내의 맛> 한 장면.

TV조선 <아내의 맛> 한 장면. ⓒ TV조선

 
"영화보다 재밌네"라고 말하는 MC 이휘재의 클로즈업 된 얼굴 옆엔 '흥미진진'이란 자막이 떠 있다. 의사가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가 배를 밀어내는 장면에서 MC 박명수는 "저거 아프지는 않죠?"라고 묻는다. 이에 박은영 아나운서가 "약간 불편해요. 너무 세게 누르니까 불편한 정도......"라고 하자, "그 정도는 참아"라는 말이 돌아온다. 이에 얼버무리는 그녀의 얼굴 아래로 '머쓱...'이란 자막이 뜬다.

한번 생각해보자. 뱃속에서 생명을 키우는 동안, 그리고 세상 밖으로 그 생명체를 내어 놓기까지는 어떤 작은 문제도 심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를 키우는 아빠인 두 남자 MC 모두 그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박은영 아나운서의 시술 영상은 영상 그 자체로 긴장감과 몰입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흥미진진'이나 '재미'와 같은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다. 그런 단어들은 긴장감 넘치는 액션 영화에는 쓸 수 있어도, 매우 걱정되고 염려스럽기에 긴장되는 현실 상황에서는 쓰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정도는 참으라는 말은, 예를 들어 다 큰 어른이 엉덩이 주사를 맞으며 아프다고 엄살부릴 때나 반농담삼아 할 수 있는 말이지, 만삭인 임산부에게 던질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어느 정도 아픈 지 모르니까 혹은 출산의 고통과 비교할 때 그 정도는 아니지 싶어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면 상당히 미안해 해야할 말이다. 혹 개그로 승화시킬 목적이었다고 해도 그건 개그가 아니라 삼가야 했던 희화화이다. 당사자가 느끼는 불안함과 긴장감을 똑같이는 못 느낀다고 해도, 코믹한 소재 거리로 소비되어도 되는 여타의 다른 상황들과는 그 무게감이 다른 것이다.

그 정도는 참으라는 MC의 말에 당황한 박은영 아나운서가 얼버무리는 사이 화면엔 뜬 '머쓱'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보자. 그 자막은 그녀가 '머쓱'했을 것이라는 추측으로 편집과정에서 추가된 것이다. 물론 실제로 그녀는 머쓱했을 수도 있다. 혹은 방송이라는 점을 감안해 적당히 넘어가기 위한 제스춰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가 어떤 기분이었다고 하더라도, 약간 불편하다고 말했을 뿐인 그녀가 왜 머쓱한 존재로 정의되어야 했을까?

설마 여기에도 엄마가 되는 길은 원래 힘든 것이니 이 정도쯤은 참아야 한다는 기존의 낡은 생각이 파고들었던 것은 아니었을 거라고 나는 믿고 싶다. 내가 보기에 머쓱했던 건 참으라는 말을 던졌던 그 MC였을 것 같다. 그러니 옆에 앉아있던 다른 MC가 왜 그녀에게 호통을 치냐고 했을 때 그 MC는 다음 영상을 보여달라면서 계속 재촉할 뿐이었다. 나는 그 MC가 실제로 머쓱했기를 바란다. 

타인에 대한 감수성은 경험과 배움과 그것들이 축적된 시간을 필요로 한다. 발언에 대한 의도가 뚜렷하고 그 의도에 적합한 언어를 선택할 줄 아는 능력은 후천적인 노력이 따르기에 그만큼 값진 것이다. 그런 점에선 나도 아슬아슬한 선을 넘기는 실수를 해본 경험도 있다. 물론, 나이가 들고 연륜이 많아진다는 건 그 실수를 최소화하는 일일 것이다.

두 MC 역시 적지 않은 나이와 경력의 소유자들이다. 예능 프로그램 특유의 속도감과 흥미 유발을 위한 순발력이 중요하다고 해도 공적인 프로그램에서 편집되지 못한 채 순간 내뱉어진 언어들에 대해서는 되돌아보는 진지함이 필요하다.
덧붙이는 글 기자 본인의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https://blog.naver.com/fullcount99
아내의맛 박은영아나운서 둔위교정술 감수성 공감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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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떠오르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글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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