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금씩, 천천히 안녕> 포스터

영화 <조금씩, 천천히 안녕> 포스터 ⓒ (주)디스테이션


'치매(痴呆)'란 한자로 어리석고 미련하다는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병이자 조금씩 기억을 잃고, 천천히 멀어진다는 데서 유래해 롱 굿바이(Long Goodbye)라고 부른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치매라는 자극적인 표현보다 인지증(認知症)이란 용어를 쓴다.

그러나 우리나라 치매환자들은 대부분 요양원으로 보내진다. 그동안 치매는 가족 간의 불화와 비극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치매 환자를 돌보기란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힘에 부치는 일이다. 그래서 누구도 치매 앞에서 이렇다 저렇다 할 말을 꺼낼 수 없다.

<조금씩, 천천히 안녕>은 우리나라보다 10년은 앞선 일본의 노령화와 치매 문제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영화다. 가족이란 테두리 안에서 부부, 자매, 부모 등 달라지는 모습을 섬세하게 포착했다. 감독 나카노 료타는 전작 <행복 목욕탕>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애잔함과 다양한 가족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그 장기를 이번 영화에서도 여지없이 발휘하고 있다. 포스트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치매를 겪는 아버지와 이를 돌보는 가족들을 다룬다. 천천히 작별 인사할 수 있는 기회이자 가족 간의 새로운 추억을 쌓을 수 있는 시간을 2년의 간격을 두어 7년간 담담하게 담아냈다. 가족들이 아버지의 상태를 처음 알게 된 2007년부터 2013년까지 천천히 진행되는 단계별 증상과 일상의 에피소드를 그려낸다. 신파 없이 담백한 태도와 일본을 관통했던 2011년 동일본 대지진도 빼놓지 않고 다룬다.
 
 영화 <조금씩, 천천히 안녕> 스틸컷

영화 <조금씩, 천천히 안녕> 스틸컷 ⓒ (주)디스테이션

 
70세 아버지의 생일날 오랜만에 마리와 후미가 본가에 들렀다. 결혼해 미국에 살고 있는 큰딸 마리(다케우치 유코)와 요리사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인 작은딸 후미(아오이 유우)는 어딘가 달라진 아버지의 행동을 통해 위기가 왔음을 짐작한다. 마리는 연구원인 남편을 따라 미국에 갔기 때문에, 후미는 요리사의 꿈을 키우기 위해 독립한 상태에서 아버지를 돌보는 건 오로지 엄마의 몫이었다.

엄마는 밝고 긍정적인 성격이라 괜찮은 줄 알았지만 몸은 금방 표시를 냈다.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던 엄마가 망막박리 증세로 수술을 받자 어쩔 수 없이 병세가 심해진 아버지를 후미 혼자 돌보며 몰랐던 사실을 알아간다.

후미는 멀리 있는 언니 대신 가족 대소사를 살뜰히 챙겨왔다. 이렇다 할 성과는 아직 없지만 꿈을 버리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일본의 젊은 세대를 상징한다. 큰딸 마리는 후미에게 부모님을 부탁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타향살이의 외로움도 버거운데 점점 더 말이 통하지 않는 남편과 아들 다카시까지 정신없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도 일언반구 없이 묵묵히 남편을 챙기는 엄마는 전통적인 일본의 여성 세대를 상징한다. 영화는 신구세대의 자연스러운 조화를 통해 화합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따스한 시선으로 따라가는 느릿한 일상
 
 영화 <조금씩, 천천히 안녕>스틸컷

영화 <조금씩, 천천히 안녕>스틸컷 ⓒ (주)디스테이션

 
치매는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것도 모르는 병이다. 아버지는 선생님이었다. 학교라는 작은 집단에서 큰 사회로 아이들 내보낸 교육자의 자부심을 가진 분이셨다. 그런 아버지가 서서히 단어를 잃어 갔다. 그런 아버지의 속내는 읽고 있는 책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고독한 지식인의 내면을 다룬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뒤집어 읽는 행동은 어쩐지 길을 잃어버린 듯 애잔하게 다가온다.

자신만의 시간에 갇힌 아버지는 과연 어디로 돌아가고 싶었던 걸까. 자꾸만 어딘가를 향해 돌아가야만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아버지. 35년간 살던 집을 놔두고 어디로 돌아간단 말인가. 가족들은 이해할 수 없어 고군분투한다.

아버지는 비가 올 것 같은 그날 우산 3개를 가지고 마중 나간 날을 잊지 않으셨다. 마치 연어가 회유하는 것처럼 그때 그날로 돌아가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까맣게 잊는 순간까지도 가족만은 결코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 했다.
 
 영화 <조금씩, 천천히 안녕> 스틸컷

영화 <조금씩, 천천히 안녕> 스틸컷 ⓒ (주)디스테이션

 
영화는 치매라는 소재지만 전혀 무겁게 다루고 있지 않다. 치매를 다룬 이전 작품들과는 결이 다르다. 힘든 순간이 많았지만 오히려 웃을 수 있던 시간이 많았던 아이러니를 다뤘다. 기억은 천천히 멀어져 갔지만 가족은 그 순간 더욱 가까워졌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소소한 일상은 책갈피가 된 단풍잎처럼 오래도록 가족의 추억이 되어준다. 비록 아버지는 떠나고 없지만 오래도록 그때를 곱씹으며 웃을 수 있을 것이다.

느리고 더딘 치매 노인의 일상을 들여다보며 우리가 몰랐던 치매의 긍정성을 보여준다. 치매 노인을 희화화하지 않고 존엄성을 지킨 한 개인으로 바라본다. 또한 핵가족과 1인 가족으로 희미해진 가족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힘든 시기에 더욱 돈독해지는 연결과 유대의 힘은 언제 어디서나 빛을 발한다.

한편, 영화는 나오키 수상 작가 나카지마 교코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실제 인지증을 앓던 아버지를 곁에서 돌보며 느꼈던 세밀하고 현실적인 장면들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조금씩, 천천히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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