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군

김군 ⓒ MBC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올해로 40주년을 맞았다.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뀐 시간, 금남로를 물들였던 광주 시민들의 고귀한 피는 역사 속에서 그 이름값을 제대로 하고 있을까.

MBC는 지난 18일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김군'이라는 시민군의 행방을 추적한 젊은 감독 강상우의 다큐 <김군>을 방영했다. 

2019년 개봉한 <김군>은 그 해 부산 영화 평론가 협회상 신인 감독상을 비롯해 2020년 들꽃 영화제 다큐 부문 감독상을 수상하고 파리 한국 영화제에도 초청받았다. 유수의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김군>. 왜 평단은 시민군 김군의 행방에 초점을 맞춘 젊은 감독의 영화에 박수를 보냈을까?

그 이유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철저한 진상 규명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군이 북한에서 온 '광수'라고?
 
 김군

김군 ⓒ MBC


전 육군대령 출신의 극우 인사 지만원씨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앞세운 일군의 노령층 지지자들 앞에서 광주에 시민군은 없었으며 광주 민주화 운동은 북한에서 내려온 군인들이 일으킨 폭동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북한군의 폭동에 광주 시민들이 부역했다고 말한다.

지씨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범죄현장에 쓰이는 기하학적 분석 방법으로 5.18 광주 시민들 가운데서 이른바 '광수' 561명을 찾아냈다고 주장하고 있다(여기서 광수는 '광(光)주에 파견된 특수(殊)부대원'을 일컫는다. 지난해 기준 제600광수를 작명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중에서도 2010년 북한 노동자 회관에서 열린 기념식 앞줄에 앉은 세 사람 중 한 사람, 바로 김창식을 '제1 광수'로 지목했다(통일부 북한정보포털에 따르면, 김창식은 1975년 10월 농업위원회 간척지 설계사업소 기사장이 된 이래 오랫동안 농업 분야에서 활약했다).

5.18유족 모임은 지씨를 명예 훼손 혐의로 고소한다. 영화는 지씨가 '제1 광수'로 내세운 '김군'이라는 실제 인물 찾기에 나서는 것으로 시작된다.  
 
서로를 알지 못했던 그들
 
 김군

김군 ⓒ MBC


1980년 5월 15일 신군부에 반대하는 학생 시위가 전국적으로 퍼지고,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 계엄이 내려진 상황에서 5월 18일 광주 금남로에 시민들이 속속 모였다. 그리고 피로 물들여진 금남로, 그 현장을 보고 광주 시민들은 떨쳐 일어났다.  
 
'M16'으로 시민을 쏘는데 돌팔매질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었던 시민들, 그중에서도 군대를 다녀와 총기를 다룰 줄 알았던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화순, 나주, 함평을 돌며 칼빈, M1 소총을 털어와 무기를 들었다. 총기까지 든 상황에서 얼굴이 알려지면 훗날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 복면과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다고 당시 19살이던 '제32 광수' 정희문씨는 말한다. 

스스로 복면과 마스크를 쓴 시민군들 사이에서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던 김군은 어떻게 사진에 찍혔을까. 당시 사진을 찍었던 <중앙일보> 이창성 기자는 계엄군과 시민군이 맞닥뜨리는 상황을 담을 수 없어, 외곽에 나가 시민군에게 사정을 해서 얼굴이 드러난 사진을 몇 장 얻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해서 얼굴이 공개된 김군, 그는 실제로 누구일까. 당시 만삭의 몸으로 시민군들에게 주먹밥을 제공했던 주옥씨는 그가 자신의 아버지가 하던 막걸리 왕대포 시음장에 자주 들르던 사람같다고 증언한다.   

당시 원지교 다리 밑에 모여 살던 7, 8명의 젊은이 무리 중 하나로 지목된 김군. 넝마를 주워 팔며 천막에 살았던 고아들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당시에는 넝마주이 하던 젊은이들이 시민군으로 적극 활동했다). 하지만 '포상'에서조차 배제되거나 소외되기 십상이어서 김군에 대한 추적은 쉽지 않았다. 

나가면 시체로 돌아오는 상황. 시체 냄새가 진동해서 밥조차 먹을 수 없는 상황에서 매일 매일을 함께 보냈던 그 시절의 동지들은, 누가 누군지 서로 알지 못했다.  
 
 김군

김군 ⓒ MBC

 
당시 김군이 페퍼포그 트럭에 탑승했던 걸로 봐서, 도청에 무기를 반납하러 가는 상황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관총을 반납한 5월 23일 이후, 김군은 사진 속에서 자취를 감췄다.    

당시 트럭에 올랐던 최진수씨는 자신이 연행되었던 장소에서 김군이 사살되었다고 증언한다. 5월 24일 계엄군간 오인 사격으로 군인이 사망하자 그 보복으로 무차별 총살이 벌어졌고, 김군이 그 희생자 중 한 명이라고 이야기한다.

끝나지 않는 상흔

40년은 매우 긴 시간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지만원씨는 2020년, 현재도 여전히 광주민주화 운동을 '폭동'이라고 주장한다.  

'김군' 찾기에 나선 강상우 감독에게 그 시절의 시민군들은 이제 와 사진 속 사람을 찾는 것, 그래서 김군이 진짜 김군이라는 걸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 역사에 대한 '역행' 아니냐고 반문한다.

이제는 그 시체 썩던 냄새를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 이렇게 다시 그 기억을 소환하면 잠을 잘 수 없다고 역사의 주역은 말한다. 안 받아들여도 좋으니 왜곡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자조적으로 덧붙인다. 
 
 김군

김군 ⓒ MBC

 
당시 20살이었던 최영철씨는 이제 택시 운전을 한다. 다른 곳은 다 괜찮지만 체포됐던 곳을 지날 때면 여전히 새삼스럽고 눈물이 난다고 말한다. 2년 선고를 받은 김용균씨는 당시 도청에 들어간 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후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걸 모두 못하게 되니 이후의 삶이 후회로 남는다며 고개를 떨군다. 당시 21살인던 박인수씨는 다 빼내지 못한 총알 때문에 여전히 몸이 아프다.  

떨쳐 일어났던 그들에게 존중과 존경을 표하지는 못할망정, 역사를 거스르는 '망언'과 '망발'은 이미 저만치 굴러간 역사의 수레바퀴를 향한 돌팔매질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돌팔매질에 자신의 생을 바친 사람들은 다시 상처를 입는다.

부디 역사 앞에 용기냈던 이들에게 경의를 표할 줄 아는 시대가 오기를, 세대가 되기를 바라본다. 오죽 답답했으면 젊은 감독이 김군 찾기에 나섰을까. 여전히 두 손으로 하늘 가리는 이 '노망'든 시대에 가슴이 답답해지는 오월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MBC 5.18 40주년 특집 다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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