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제외하고 매일 두 시간을 지하철 안에서 보낸다. 이직을 결정했을 때, 직장이란 자고로 연봉 다음 중요한 것이 '출퇴근 거리'라던 인생 선배들의 조언을 무시한 덕분에 하루 두 시간을 길에서 버리게 된 셈이다. 이젠 좀 익숙해질 법도 한데 지하철 안에서 보내는 시간은 여전히 따분하다.

책을 읽어도 눈에 안 들어오고, 음악을 들어도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는다. 그래서 대개는 멍하니 앉아, 내려야 할 정거장이 얼마큼 남았나 전광판만 노려보기 일쑤인데 그러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가 탄 이 지하철 안에 뭐 재미있는 일 좀 안 일어나나?'
 
반복되는 장거리 출퇴근에 지쳐, 대중교통 안에서 한 번이라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면 지금 이 영화를 추천한다. 영화 <커뮤터>는 십 년간 매일 같은 통근 기차를 타고 출퇴근을 하던 주인공 마이클(리암 니슨)이 어느 날 기차 안에서 묘령의 여인을 만나 뜻밖의 제안을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루아침에 해고된 가장의 고민
 
커뮤터 포스터 2018년 국내 개봉 당시 포스터

▲ 커뮤터 포스터 2018년 국내 개봉 당시 포스터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커뮤터>는 2018년 개봉작으로 (국내 기준) 배우 리암 니슨이 주인공 마이클 역을 맡아 일흔이 가까운 나이에도 시들지 않는 액션 본능을 발휘하며 호연을 펼쳤다. 스페인 출신 감독 자움 콜렛 세라가 메가폰을 잡아 <논스톱>과 <런 올 나이트>에 이어 다시 한번 리암 니슨과 호흡을 맞추었다.
 
마이클(리암 니슨)은 젊었을 땐 뛰어난 수사능력을 뽐내던 베테랑 경찰이었지만, 지금은 은퇴해서 보험회사의 판매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소위 잘나가던 젊은 시절과는 무관하게, 이제 60살이 된 그는 경제적인 어려움에 허덕이며 아들의 대학 등록금조차 쉽게 마련하지 못하고 동동거리는 처지다. 게다가 회사에서는 그를 하루아침에 해고하고 퇴직금도 없이 냉정하게 등을 떠민다. 아내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심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탄 마이클. 그때, 갑자기 낯선 여자(조안나 역/ 베라 파미가)가 앞자리에 앉아 말을 건다.

"이 기차에 타서는 안 될 사람이 탔어요. 이름은 프린. 찾아 준다면 십만 달러를 줄게요."
 
기차 액션 씬 최악의 열차 테러를 막기 위해 전직 경찰 마이클이 총을 들었다

▲ 기차 액션 씬 최악의 열차 테러를 막기 위해 전직 경찰 마이클이 총을 들었다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사실 처음엔 이게 웬 행운인가 싶었다. 고작 사람 하나 찾는 데 십만 달러라니, 내심 쾌재를 부르던 마이클. 그런데 세상에 공짜는 없다. 할리우드라고 해서 뭐 다르겠는가. 마이클이 처음 '프린'이라 지목했던 사람은 '프린'이 아닌 경찰로 밝혀지고, 기차에 미리 타고 있던 킬러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다. 여자의 목적이 단순히 '프린'을 찾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님을 깨달은 마이클은 당장 게임을 그만두려 하지만 여자는 게임의 규칙을 바꾼다.

"프린을 찾아서 죽여요. 안 그러면 당신 가족을 죽이겠어요."
 
이 영화는 액션보다는 범죄 추리 장르에 더 가깝다. 마이클이 찾아야 하는 '프린'에 대한 정보는 그저 그가 '콜드 스프링'역에서 내린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킬러들의 표적이 되었는지 마이클은 알지 못한다. 관객 역시 알 수 없다. 그러나 마이클은 사랑하는 가족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프린'을 찾고 봐야 한다. 그를 정말 죽일지 말지는 나중 문제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수사 본능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하는 마이클. 과연 '프린'은 누구이며 '프린'을 찾아 죽이려는 그 음모의 정체는 무엇일까?
 
리암 니슨은 <테이큰 시리즈>로 인지도가 높은 배우이다. 특히 <테이큰> 1편은 리암 니슨이 전직 특수 요원 브라이언으로 분해 납치된 딸을 찾는 과정을 그리며 큰 인기를 끌었고, 국내에서 200만이 넘는 관객몰이에 성공했다. 지금이라도 딸을 돌려 보내 주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는 아버지를 조롱하며 "Good Luck"이라는 명대사를 날린 악당에게 관객들이 함께 분노하며 리암 니슨의 딸 찾기를 응원했고, 수많은 패러디를 탄생시켰다. 또 최근엔 개봉 12주년을 맞아 재개봉하기도 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테이큰>의 성공 이후로 리암 니슨이 다른 영화에서 연달아 비슷비슷한 캐릭터로 소모되고 있는 듯해서 안타깝다. <테이큰>에서 전직 특수 요원인 브라이언이 납치된 딸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면 <커뮤터>에서는 전직 경찰인 마이클이 납치된 가족을 되찾기 위해 온몸은 내던지는 식이다.

납치-구출'이라는 리암 니슨 표의 뻔한 서사에 관객들이 여전히 열광하는 것은 노장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며 시종일관 훨훨 날아다니는 그의 통쾌한 액션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테이큰>식의 거친 액션을 기대하고 <커뮤터>를 선택한다면 다소 실망할 수도 있다. 리암 니슨이 연기한 마이클은 기존에 그가 연기한 액션물 주인공과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영화는 도입부에 꽤 긴 시간을 할애해서 마이클의 반복되는 일상 (기상에서 출근까지, 가족과의 다툼과 화해)을 보여주는데, 이는 그가 그의 젊은 시절을 관통하고 있던 범죄와 폭력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제2의 인생을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어쩐지 그는 마냥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마이클은 액션 영화의 '히어로'이기 전에 가장의 무게감에 짓눌려 '나 자신'을 잃어버린, 세상 모든 쓸쓸한 '아버지'들을 대변하는 듯해서 짠하다.
 
마이클은 가족들의 바람대로 경찰을 그만둔 뒤에 위험 요소라고는 전혀 없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평범하게 살아가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그것이 자신이 진짜 바라던 삶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마이클의 '프린' 찾기는 어쩌면 '진짜 나'를 찾기 위한 여정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관객은 이제는 배도 슬쩍 나오고 전보다 주먹도 무뎌진, 킬러보다 자꾸만 한 발자국씩 뒤처지는 마이클을 연민의 마음으로 응원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누구나 한 번씩은 일탈을 꿈꾼다. 자의든 타이든, 이루어져선 안 될 대상과의 위험한 로맨스를 꿈꾸고 어쩌다 휘말린 범죄에서 영웅이 되어보는 짜릿한 상상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영화 <커뮤터>는 관객과 배우가 함께하는 일종의 마피아 게임이다. 손에 땀을 쥘 정도의 긴장감까지는 아니지만 가볍게 집중하면서 재미있게 볼 만한 괜찮은 오락영화라 확신한다.
 
지금 당신이 타고 있는 그 기차는 쾌적하고 안전하다. 아마 틀림없이 당신이 원하는 데까지 무사하게 당신을 실어다 줄 것이다. 그러니 그 안에서 뭔가 재미있는 일이 생기길 기대하기보단 이 영화를 보는 것을 추천하다. 당신의 빈약한 상상력을 뛰어넘는 그 이상의 스릴이 펼쳐질 것이다. 영화 속 묘령의 여자 조안나는 어쩌면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당신에게도 혹시 일탈이 필요하진 않나요?"
리암 니슨 기차 액션 범죄 추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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