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안토니오 스퍼스의 '해군제독' 데이비드 로빈슨은 현역 시절 정규시즌 MVP 1회(1995년), 수비왕 1회(1992년), 올스타 10회, All NBA Team 10회 선정에 빛나는 정상급 센터였다. 하지만 전성기 구간 동안 마이클 조던과 하킴 올라주원, 그리고 조금은 부족했던 동료들 때문에 우승을 넘보기엔 2% 부족했다. 그렇게 '외로운 제독'이었던 로빈슨은 1998년 팀 던컨이라는 최고의 동료가 가세한 후 선수 생활 말년에 두 번의 우승반지를 차지했다.

작년 시즌이 끝난 후 한화 이글스와 결별하고 11월 우여곡절 끝에 두산 베어스 유니폼을 입은 배영수도 당당히 우승팀의 멤버로 현역 생활을 마감할 수 있게 됐다. 삼성 라이온즈 시절 '푸른 피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7번이나 우승반지를 차지했던 배영수는 불혹을 앞둔 늦은 나이에 두산에서 8번째 우승을 경험했다. 이 세상 모든 운동 선수가 바라는 '우승 후 은퇴'라는 목표를 배영수가 이룬 것이다.

지난 2000년 삼성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배영수는 정확히 20년 동안 활약하면서 499경기에서 138승 122패 3세이브 7홀드 평균자책점 4.46을 기록했다. 역대 다승 5위에 올라 있을 정도로 누구보다 화려한 선수생활을 보냈다. 특히 배영수는 통산 10번의 한국시리즈에서 25경기에 등판해 4승 6패 2세이브 2홀드 3.07을 기록하며 큰 경기에서도 야구팬들에게 잊지 못할 장면들을 많이 연출했다.

승리하지 못했기에 더욱 인상적이었던 2004년의 10이닝 노히트노런
 
 지난 26일 오후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2019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4차전 두산 베어스와 키움 히어로즈의 경기에서 두산의 마지막 투수 배영수와 포수 박세혁이 서로 우승을 자축하고 있다.

지난 26일 오후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2019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4차전 두산 베어스와 키움 히어로즈의 경기에서 두산의 마지막 투수 배영수와 포수 박세혁이 서로 우승을 자축하고 있다. ⓒ 연합뉴스


2004년은 삼성의 젊은 유망주 배영수가 KBO리그 최고의 우완 에이스로 떠오른 시즌이었다. 2001년과 2003년 나란히 13승을 올리며 삼성의 에이스가 될 조짐을 보였던 배영수는 프로 5년 차 시즌이었던 2004년 17승 2패 2.61을 기록하며 다승과 승률, 정규리그 MVP, 투수부문 골든글러브를 휩쓸었다. 2004년 KBO리그는 배영수를 위한 한 해였다고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배영수의 2004년 최고의 역투는 정규리그가 아닌 한국시리즈에서 나왔다. 때는 현대 유니콘스와 삼성이 1승1무1패로 맞서고 있던 2004년 10월 25일 한국시리즈 4차전. 1차전에서 5이닝 2자책을 기록하고도 패전투수가 된 배영수는 3일을 쉬고 4차전에 선발 등판해 현대의 외국인 투수 마이클 피어리와 리턴매치를 치렀다. 그리고 배영수는 대구 시민운동장을 가득 채운 1만 2000명의 관중을 경악시키는 엄청난 투구를 선보였다.

10회까지 마운드를 지킨 배영수는 현대의 강타선을 상대로 11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면서 실점은커녕 단 하나의 안타도 허용하지 않는 노히트 투구를 펼쳤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삼성 타선 역시 현대 투수들을 상대로 점수를 뽑지 못했고 배영수의 역투는 삼성의 승리로 연결되지 못했다. 결국 11회 투수가 바뀌면서 배영수의 노히트노런은 인정받지 못했다(사실 포스트 시즌에서 나온 기록이라 노히트노런을 달성했어도 공식기록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비록 승리를 챙기진 못했지만 짧은 스포츠 머리를 한 20대 중반의 젊은 에이스가 선보인 역투는 야구팬들을 감동시키기 충분했다. 실제로 배영수는 2004년 한국시리즈 4차전 노히트 역투를 계기로 '푸른 피의 에이스'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리고 배영수는 여러 번의 수술과 재활 끝에 30대 중반을 향하는 나이에 9년 만에 다승왕에 오르며 야구팬들에게 더욱 큰 울림을 줬다.

배영수의 2006년을 기억하는 사람은 배영수를 비난할 수 없다

2004년 다승왕과 정규리그 MVP에 오른 배영수는 2005년 11승 11패 2세이브 1홀드2.8을 기록했다. 특히 173이닝 동안 147개의 삼진을 잡으며 다니엘 리오스와 함께 공동 탈삼진왕에 올랐다. 하지만 손민한(NC다이노스 투수코치), 박명환과 함께 '우완 트로이카 빅3'로 명성을 떨치던 배영수는 2006년 8승 9패 4홀드 2.92로 성적이 하락했다. 시즌 중반부터 찾아온 팔꿈치 통증이 원인이었다.

시즌을 거듭할수록 팔꿈치 통증이 심해진 배영수는 한국시리즈 엔트리 진입조차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부상이 심각해졌다. 하지만 삼성에는 확실한 토종 에이스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 배영수를 엔트리에서 제외한 채 '괴물' 류현진(LA다저스)이 버티고 있는 한화를 상대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배영수 역시 시즌 후 자신의 팔꿈치에 칼을 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삼성의 한국시리즈 2연패를 위해 마지막 힘을 불사르기로 결정했다.

배영수는 2006년 한국시리즈에서 5경기에 등판해 2승 1세이브 1홀드를 기록했다. 다시 말해 삼성이 승리한 4경기에는 모두 배영수가 마운드에 올라 승리나 세이브, 홀드 같은 기록을 남겼다는 뜻이다. 10.1이닝을 던지며 11개의 삼진을 잡는 동안 자책점은 단 1점. 배영수가 시속 150km가 넘는 강속구를 자유자재로 뿌리던 마지막 시절이었다(배영수는 최고의 활약을 펼치고도 그 해 한국시리즈 MVP를 박진만에게 양보했다). 

한국시리즈 종료 후 수술대에 올랐을 때 배영수의 상태는 최악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배영수는 삼성의 우승을 위해 자신의 팔꿈치를 바쳤고 재활 후에도 더 이상 강속구를 던지지 못하는 기교파 투수로 변신했다. 삼성팬들이 배영수가 2009년 1승 12패 7.26으로 추락했을 때도 배영수의 부진을 원망하지 않은 건 삼성을 향한 배영수의 애정을 잘 알기 때문이다.

배영수다웠던 선수생활 마무리
 
 지난 26일 오후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2019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4차전 두산 베어스와 키움 히어로즈의 경기. 배영수와 MVP 오재일이 환호하고 있다.

지난 26일 오후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2019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4차전 두산 베어스와 키움 히어로즈의 경기. 배영수와 MVP 오재일이 환호하고 있다. ⓒ 연합뉴스


2012년 7년 만에 10승 투수로 복귀한 배영수는 2013년 14승으로 공동 다승왕에 오르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하지만 배영수는 삼성의 통합 4연패 기간 동안 한국시리즈에서 단 1승도 올리지 못했다. 정규리그에서는 무난히 선발 투수로 활약할 수 있었지만 한국시리즈 같은 큰 경기에서 류중일 감독(LG트윈스)은 장원삼과 윤성환, 차우찬(LG) 같은 투수를 중용했기 때문이다. 결국 배영수는 2014 시즌이 끝난 후 3년 21억5000만원에 한화로 이적했다.

하지만 많은 기회를 얻기 위해 과감하게 단행했던 한화 이적은 배영수에게 그리 좋은 선택이 되지 못했다. 배영수는 한화 유니폼을 입고 활약한 4년 동안 13승 22패로 부진했고 작년 준플레이오프에서는 엔트리에도 포함되지 못했다. 결국 배영수는 작년 시즌이 끝난 후 한화와 결별한 뒤 두산을 3번째 팀으로 선택했다. 배영수에게 두산은 현역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사실 냉정하게 보면 배영수는 두산에서도 그리 좋은 활약을 하지 못했다. 37경기에서 45.1이닝을 던졌지만 추격조, 혹은 투수 엔트리가 바닥났을 때 등판한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9월 14일 SK 와이번스전에서는 '끝내기 보크'라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김태형 감독이 배영수를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포함시켰을 때도 배영수가 한국시리즈 마운드에 서는 장면을 보기란 쉽지 않을 거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배영수는 한국시리즈 4차전 연장 10회말 1사 후 가장 중요한 순간 마운드에 올라 가장 중요한 아웃카운트 2개를 잡으며 두산의 우승을 결정 지었다. 마운드에 오르는 순간부터 밝게 미소 짓던 배영수의 얼굴엔 자신감이 엿보였고 '못 치면 준우승'이라는 생각에 잔뜩 긴장한 박병호와 제리 샌즈는 배영수의 공을 칠 수 없었다. 한국시리즈 25번째 등판에서 역대 최고령 세이브 기록을 세운 배영수는 그렇게 활짝 웃으며 현역생활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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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리그 배영수 은퇴 한국시리즈 최고령 세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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