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이 글에는 영화 <기생충>의 결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기우(최우식)와 기정(박소담)은 겨우 잡힌 공짜 와이파이에 엄청나게 몰입한다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기우(최우식)와 기정(박소담)은 겨우 잡힌 공짜 와이파이에 엄청나게 몰입한다 ⓒ CJ 엔터테인먼트


봉준호가 구축한 영화적 공간의 디폴트값은 언제나 지상이 아니라 지하였다. 단일한 공간으로 획정되지 않는 <마더>(2009)와 공간이 수평적으로 짜인 <설국열차>(2013)를 제외하면 봉준호 영화의 인물들이 겪는 암중모색과 진퇴양난은 모두 '지하'라는 지정학적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플란다스의 개>(2000)의 아파트 지하, <살인의 추억>(2003)의 하수구, <괴물>(2006)의 한강 다리 밑, <옥자>(2017)의 도살장 그리고 <기생충>의 반지하방은 영화의 물리적 공간이면서 동시에 인물의 존재론적 상태와 길항하는 심리적 공간이기도 하다.

봉준호의 전작들처럼 <기생충> 역시 지하 세계에 발을 딛고 있으며 영화는 이른바 '하강하는 이미지'들의 집합으로 조각되어 있다. <기생충>의 모든 영화적 장치는 하강하는 이미지들의 보다 빠른 낙하를 위해 복무한다. 봉준호는 영화의 시작부터 이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틸트 다운(tilt down, 수직으로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면서 찍기)하며 반지하에 살고 있는 기택(송강호)의 가족들을 담아낸다. 서사적 맥락과 연결 지어 보면 카메라가 인물을 서서히 압살 한다는 표현이 보다 적확할 것이다(카메라의 수직적 움직임은 엔딩 시퀀스에서 동일하게 반복된다).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  
 
 영화 <기생충> 장면

영화 <기생충>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기택의 가족들이 저택을 빠져나와 집으로 도망칠 때 하강의 이미지는 정점에 달한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비, 세상의 최저점까지 연결된 듯한 계단, 그러한 공간과 배경을 타고 끊임없이 내려가는 인물들의 움직임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 운동성이다.

그것이 영화적으로 가장 잘 구현된 장면은 살육이 벌어지는 생일 파티 시퀀스. 이때 카메라는 박사장(이선균)을 칼로 찌르고 도망가는 기택을 직부감으로 찍어 누르며 그의 도주를 무화시킨다. 아래로 꽂히는 앵글의 장력에 짓이겨진 기택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저택의 지하로 내려간다. 아니, 내려갈 수밖에 없다.

영화의 수직적 구조는 인물들의 관계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봉준호는 <기생충>에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대립을 보여준다. 영화의 여러 구도 상 <하녀>(1960)의 잔영이 짙게 일렁이는 <기생충>은 정치적으로 남한과 북한(파출부의 북한 아나운서 흉내), 경제적으로 부자와 빈자, 사회적으로 직업에 의한 신분 격차를 주요 골자로 하여 극을 진행시킨다. <기생충>에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낙차로 인해 발생한 에너지는 인물 모두를 파멸로 이끄는 동력으로 소진된다.

기택에 의하면 부자들은 착하고 순수하며 구김살이 없는 사람들이다. 사장님과 사모님의 안위를 걱정하며 파출부 부부에게 쌍심지를 켰던 기택은 왜 박사장을 칼로 찔러 죽였을까. 그 이유는 '원시적 폭력'이거나 자신의 암담한 처지를 비관해서가 아니다. 착하고 순수하며 구김살이 없었던 것은 박사장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음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있고 없고의 차이에서 오는 비참함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근본적 회의에 기인한다. 영화 도처에 깔린 상징들, 특히 기택이 박사장을 가격할 때 입고 있던 옷이 인디언 복장이라는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거의 모든 봉준호 영화에서 발견되는 '검은 농담'

봉준호에게 가난은 리얼리즘이 아니라 리얼리티다. 비가 쏟아져 집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쇼트와 그로 인해 미세먼지가 씻겨 파티를 여는 사람들의 쇼트가 병렬로 나열된다. '가난'이라는 상태를 그럴 듯하게 묘사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담을 때 발생하는 해학. 영화가 비현실이 아니라 현실이 비현실인 상황에 대한 영화적 비판. 불우이웃끼리의 처절한 난투극. 그것은 '가난의 전시'라기보다 봉준호의 거의 모든 영화에서 발견되는 '검은 농담'이다. 그러니까 봉준호의 희비극은 선을 넘을 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계획의 산물이다.

영화의 마지막, 눈이 떨어지고 카메라도 떨어지며 기우(최우식)는 꿈에서 현실로 떨어진다. 영화의 시간은 해가 떨어진 밤이다. 참혹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영화의 모든 장면을 통틀어 기우와 가장 잘 어울린다(저택에 서서 "나랑 여기 잘 어울려?"라고 물었던 기우의 대사를 떠올려보라).

봉준호는 이 모든 영화적 장치가 다시 일어설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엔딩 크레디트를 올린다. 근본적인 대책이 돈을 많이 버는 것밖엔 없는 천민자본주의 시대. 상생은커녕 기생충의 형태로 공존할 수밖에 없는 암흑의 공간. 봉준호가 설계한 2019년 한국의 공간이 우리의 입가를 씁쓸하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송석주의 브런치(https://brunch.co.kr/@cinesong)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봉준호 영화 기생충 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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