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 포스터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 포스터 ⓒ 화사 백두대간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은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에 영감을 주었다고 알려진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같은 날 다른 장소에서 태어난, 똑같은 얼굴의 두 여인이 등장한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여태까지 살아왔다. 영화가 시작하는 건 그 둘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될 때다. 폴란드로 여행을 간 여인은 광장 한복판에 서 있는, 자신과 똑같은 얼굴의 여인을 카메라로 찍게 된다.

이 사실은 영화가 거의 끝날 때쯤 사진을 인화하고 나서야 뒤늦게 알게 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사진에 찍힌 여인은 작품 중간에 죽는다. 여인이 죽은 이유는 자신을 촬영한 이를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즉, 두 명의 도플갱어가 있고 상대를 목격한 쪽이 사망한 것이다.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스틸 컷.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스틸 컷. ⓒ 백두대간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을 보면 '도플갱어'(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가리키는 말. 만나면 죽는다는 미신이 있다-편집자 주)를 믿을 법도 하다. 지구상 어딘가에는 또 다른 내가 있고 그는 나와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도플갱어 모티브는 단순히 외모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합과 죽이 정말로 잘 맞아서 절친한 사이일 때도 비유적으로 쓰인다. 이를 테면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와 송몽규의 사이를 예로 들 수 있다. 이들은 외모나 몸집이나 나이가 비슷하지는 않아도 생각과 행동이 잘 맞아 서로 친하게 지낸다. 말하자면 이들의 모습은 '나와 똑같이 생각하는' 도플갱어인 셈이다.

즉 도플갱어는 생각을 공유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때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라는 윤동주 시인의 시를 인용해본다. 윤동주는 이 시에서 타자로서의 자신을 가정한다. 시대처럼 올 아침이란 맑고 투명한 그릇을 뜻하고, 그것은 곧 시대에 저항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비관이다. 그는 저항시인이었지만 시인이었기에 한없이 가녀렸다. 그는 총과 칼을 들지 않았고 펜과 풀을 들었다.

말하자면, 그는 또 다른 자신이 있으리라고 믿었다. 어딘가에 존재할 그는 단지 등불 만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윤동주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 생각이 최후의 나라는 문구를 통해 표현될 때, 그것은 삶의 끝자락에 자리 잡는다. 이것은 최후이고 인간에게는 죽음이다. 말하자면 내가 원하는 그는 도플갱어요, 그와 마주친 순간 우리는 주체성을 잃게 된다. 이른바 자아의 교환, 그러나 껍데기는 동일, 나의 이념은 나의 힘으로 완성된다. 이것이 도플갱어가 갖는 나르시시즘의 힘이다. 

공간이 풍기는 향취에서
 
 영화 <동주> 스틸 컷.

영화 <동주> 스틸 컷.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이준익의 <동주>에서 윤동주와 송몽규는 한 몸처럼 나온다. 도플갱어인 그들은 다음과 같이 묻게 된다. "우리는 닮았어요. 습관이나 행동까지도." 말하자면 자신의 이상을 상대에게서 찾는 것이 바로 도플갱어다. 이것은 아주 로맨틱하고 마음에 안정을 주기도 한다. 우리가 부모님을 닮은 이성에 본능적으로 끌리듯, 나를 닮은 하지만 다른 주체적 타자에게 끌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결국 이런 끌림이 사랑으로 이어지는 건 몹시 자연스러운 일이다.

영화에서도 도플갱어로 설정된 두 명의 여인은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은연중에 느낀다. 한 쪽에게 슬픈 일이 닥치면 다른 한 쪽도 이유없이 마음이 아파온다. 한 쪽이 병에 걸리면 다른 한 쪽도 비슷한 병을 앓게 된다. 말하자면 이들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만 같다. 문제는 이런 끌림에 대한 이유를 그들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이가 세상 어딘가에 살고 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과 똑같은 얼굴, 혹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이를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점은 생각에 관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자신과 얼굴과 생각이 똑같은 이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말이기도 하므로, 우리는 '나의 또 다른 모습'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플갱어를 다루는 영화들은 이런 점을 이용한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처럼 얼굴이 같을 수도 있고, <동주>처럼 생각이 같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그 두 사람을 '하나'로 볼 수도 있는 여지를 영화가 제공한다. 요컨대 한 장소에 있는 두 명의 '나'를 '분열된 자아'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나'가 '또 다른 나'에게 말을 건네는 방법을 알아보자. 사람은 자신을 알지 못하기에 늘 타자의 이름을 빌려 자신을 설명하게 된다. 요컨대 우리는 자신을 소개할 때 이름을 사용하는데, 이 이름은 부모님이 붙여주신 것이기에 우리의 것이 아니다. 즉, 우리는 타자가 부여한 이름으로 지칭된다.

우리는 늘 타자로부터 이름을 불리고,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며, 심지어 혼자 있는 방안에서도 타자의 감시를 받고는 한다. 이름이란 다름아닌 '나'에게 붙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나'가 누군지 모른다면 사람은 정상적인 생각을 할 수 없게 된다. '나'를 잃어가는 대표적인 질병이 치매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말하자면 외부세계의 시선을 우리의 내면으로 받아들일 때, 그것은 '이름'이라는 도플갱어가 되어 우리의 마음속에 공존하게 된다. 문제는 이게 공포로 변형되는 건 쉬운 일이라는 것이다.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스틸 컷.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스틸 컷. ⓒ 백두대간

 
도플갱어에 관한 구전 중에, 사람을 죽이고 나서 그의 생각을 복제해 죽음 사람을 대체한다는 설화가 그것을 증명한다. 일종의 자기살해에 해당하는 이 설화는 '나'를 도플갱어에게 빼앗겨 버린다는 점에서 몹시 두렵다. 자기살해를 했으면 새로운 자신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데, 살해되는 대상이 타자가 아니라 '나'이기에 그것은 거부의 대상이 된다.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은 이러한 공포를 애도로 바꾼다. 이것은 공포도 사랑도 아니고 애도에 불과하다고 그는 말한다. 어쩌면 진정한 인연이란 스쳐 지나갈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예를 들어, 폴란드의 베로니카(이렌느 야곱)와 프랑스의 베로니크(동일 배우)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까지 만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영화에서도 스쳐 지나가 버린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도플갱어는 서로 인지되지 말아야 한다. 서로 마주하며 주체에 대한 의문이 싹트는 순간 베로니카는 사망하고야 만다.

그녀들은 대화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서로를 느꼈고, 말하자면 도플갱어를 잇는 건 연대가 아니라 유대이다. 혹은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나를 안다는 건 자아에 대한 파편적인 기억일 뿐이라고. 내가 아는 나의 모습은 과거의 내가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그때의 모습일 뿐이라고 말이다. 즉 현재의 우리와 과거의 우리는 다르다. 이 두 가지는 외모는 같지만 그때의 '생각'이 다른 도플갱어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에서 과거로 말을 건넬 수 있다. 지나간 일을 떠올리며 현재의 우리가 과거의 일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다. 혹은, 같은 현재에서도 '나쁜 자신'과 '착한 자신'이라는 두 개의 도플갱어는 다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애도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보내는 치유이다.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도플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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