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다움'이란 무엇일까? 불안이나 슬픔 같은 나약해 보이는 감정이나 자신의 약점은 드러내지 않은 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강인하게 행동하는 것. 서열과 힘을 추구하고 권위에 따르는 것. 그리고 여성을 리드하고 보호하는 것. 가부장 사회에서 규정한 남자다움은 아마도 이런 것일 테다.

지금까지 드라마 속 많은 남자 주인공들은 이런 모습으로 매력을 어필해왔다. 나 역시 외모까지 준수한 배우들이 이런 남자다움을 연기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 한 편이 설레기도 했다.

문득 정말 이런 남자들이 나의 배우자로, 연인으로 곁에 있다면 어떨까 의문이 들었다. 상상의 나래를 펴보니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든든하고 멋있을 때도 있겠지만, 힘들어도 괜찮은 척 한다면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으로서 더 힘들 것만 같았다. 게다가 의견 충돌이 있을 때조차 남자의 이성과 강인함을 내세워 나를 리드하려 한다면, 그건 정말 참기 힘든 노릇이었다. 때문에 언제부턴가 드라마 속 멋진 남자주인공들에게는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지난 봄 내 앞에 나타난 두 남자는 달랐다. 가슴이 설레게 멋있지는 않지만, 슬픔과 기쁨 등 감정을 함께 나누며, 어떤 주장을 해도 일단은 내 이야기를 존중하며 들어줄 것 같았다. 보면 볼수록 곁에 두고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두 남자. 바로 지난 3월~5월 호평 속에 방영됐던 tvN <라이브>의 염상수(이광수)와 오양촌(배성우)이다.

# 상수 : 감정을 존중할 줄 아는 남자
 
 tvN 드라마 <라이브>의 한 장면

tvN 드라마 <라이브>의 한 장면 ⓒ tvN

 
어릴 적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곁에서 자란 상수는 가까스로 취업을 한다. 하지만 취업한 회사가 사기를 친 사실이 밝혀지면서 또 다시 백수 신세가 된다. 백수 탈출을 위해 경찰 공무원 시험에 응시해 경찰이 된 상수는 사수 양촌을 만나 점차 사명감 투철한 경찰이 되어 간다.

그런데 이 남자, 사명감 넘치는 '남자다운' 경찰이 되어가면서도 자신의 감정에 매우 충실하다. 9회 상수는 한정오(정유미)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하지만 정오는 "나는 아닌데 어쩌냐. 나는 너 그냥 친군데. 귀엽고 재밌고"라며 단박에 거절한다. 하지만 상수는 상대방의 거절이 자신의 감정까지 바꿀 수는 없음을 알고 이렇게 응답한다. "그럼 나는 내 갈 길 가고 너는 네 갈 길 가. 나는 내가 좋아하는 대로 하고"라며 자신의 감정을 존중한다.

이 후로도 상수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정오의 마음을 사기 위해 서운함을 감추며 괜찮은 척 잘해 주지도 않는다. 대신 "정오랑 안 된 건 슬프죠. 근데 정말 슬픈 건 여자애들이 나 같은 애를 싫어한다는 거예요. 많이 못 배우고 홀어머니에 집도 없지"라며 자신의 슬픔을 솔직하게 말하고 그 이유까지 설명할 줄 안다. 정오에게 서운함을 느끼고 툴툴대다가도 정오가 자신과 사귀지 않는 것이 조건 때문이 아님을 알게 된 후에는 쿨 하게 "오해했다"고 털어 놓으며 금세 미소를 짓는다.

타인의 아픔에 함께 울어주는 남자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존중하고 표현할 줄 아는 남자 상수는 타인의 아픔에도 진심으로 공감할 줄 안다. 상수는 동료들에게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그 이유를 묻거나 조언하려 들지 않는다. 정오가 힘든 일을 겪을 때에도 상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오가 살고 있는 2층에 올라가 곁에 가만히 있어준다. 마음으로 공감해주고 함께 있어줄 뿐이다.

특히, 정오가 성폭력 피해자였음을 밝히는 장면에서 상수의 공감능력은 빛을 발했다. 드라마 14회에 정오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과거가 있음이 알려진다. 이를 직접 들은 상수는 그저 침묵할 뿐이다.

이에 정오는 묻는다. "넌 내 이야기 다 듣고도 왜 나에게 아무 말도 안 하고 위로도 안 해줘?"라고. 상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슬퍼. 너무 슬퍼서 아무런 말도 안 나와. 니가 너무 대견하고 힘들었겠다고 잘 버텼다고 위로해주고 싶은데 너무 슬퍼서 아무런 말도 못하겠어"라고.

섣부른 위로를 건네거나 해결책을 제시하려 하지 않고 진심으로 공감하는 상수의 마음에 정오는 묵혀놨던 눈물을 흘리고, 상수 역시 함께 울어준다. 그리고 정오는 "상수야 나 너무 시원해"라고 말한다. 상수의 진심어린 공감은 정오에게 그 무엇보다 큰 지지였을 것이다. 강한 척, 멋있는 척하며 '지켜줄게'라고 말하지 않아도 상수는 진심으로 멋있었다.

# 양촌 : 권위있지만 수평한 관계를 추구하는 선배
 
 tvN 드라마 <라이브>의 한 장면

tvN 드라마 <라이브>의 한 장면 ⓒ tvN


경찰들 사이에 '전설'로 불리는 인물 양촌은 몸을 사리지 않고 달려가 범인을 잡아낸다. 일과 관련해서는 후배들에게 매우 엄격하고 툭하면 '버럭' 한다. 매우 '남성다워' 보이는 양촌이지만, 그의 행동과 내면을 관찰해보면 수직적인 권위를 내세우는 가부장적 남성과는 거리가 먼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먼저, 양촌은 엄한 선배이지만, 서열과 힘의 논리로 후배들을 억압하지 않는다. 드라마 초반 파트너 양촌에게 심하게 질책당한 상수는 양촌의 집까지 찾아와 부당함을 따진다. 양촌은 상수에게 '미친 놈'이라고 욕을 하지만, 선배라는 이유로 상수의 말문까지 막아버리지는 않는다. 후배의 개인적인 감정의 문제임으로 둘의 관계 즉, 사람 대 사람의 문제로 간주하고 상수와의 대화에 임한다. 아마도 상수는 이를 간파했기 때문에 선배 양촌의 매몰찬 태도에도 불구하고 양촌의 집에서 함께 잠을 청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후배들이 자신과 다른 생각을 이야기해도 일단 존중해주는 자세를 취한다. 정오가 사명감이 없어 지구대를 떠나겠다고 이야기 했을 때 양촌은 정오를 비난하지 않고 그럴 수 있음을 이해해준다. 상수가 정오와 관련된 마음을 털어 놓는 유일한 상대 역시 양촌이었다. 비록 표현방식은 거칠지라도 양촌은 후배들의 마음을 읽어주며 수평적인 관계를 맺을 줄 아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성찰할 줄 아는 남편

한편, 양촌은 자신의 약점과 상처를 회피하지 않고 인정하며 직면하는 용기도 지녔다. 5회 양촌의 아내이자 경찰 동료인 장미(배종옥)는 양촌에게 일방적으로 이혼을 선언한다. 그런데 양촌은 여기서 강한 척 자존심을 세우지 않는다.

"누나"라고 울부짖으며 나약함을 드러내고 6회 이혼 서류를 접수하러 간 법원에서는 장미에게 "범인한테도 3번 경고하는데 너도 경고는 해야지. 평생 부비고 산 사람에게 이게 뭐야?" 하고 항변도 해본다. 지금까지 많은 드라마에 등장했던 "당신은 뭘 잘 한 게 있다고 그래?"라며 도리어 화를 남편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장미의 이혼 선언 후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양촌은 가정폭력을 휘둘렀던 아버지로부터 자신이 받은 영향을 알아차리고 이를 깊이 성찰한다. 13회 장미에게 양촌은 "나는 니 옆에 있을 자격이 없어. 주영이 건으로 동료들한테 폭력을 쓸 때, 송이 남자친구 일 생겼을 때 나 여전히 감정적이고 폭력적이고 위험한 놈이더라. 이런 나를 니가 보기 힘들었겠구나"라고 이야기한다. 이에 대해 장미는 "그래도 내 인생에 니가 있다는 건 큰 힘이야"라고 말한다.

괜찮은 척, 강한 척 하지 않고 자신의 약점을 인정할 수 있는 모습에 장미는 더욱 신뢰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솔직한 성찰과 인정, 반성이 있었기에 드라마 후반 양촌은 보다 좋은 남편, 아버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상수와 양촌은 어릴 적 비슷한 상처를 안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상수는 아버지의 죽음 후 어머니로부터 방치된 경험이 있고, 양촌은 아버지의 가정폭력을 목격하며 자랐다. 아동기에 받은 깊은 상처를 극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상수와 양촌은 이를 매우 건전하게 극복해냈다. 이들은 과거의 아픔을 인정은 하되 그 상처에 매몰되거나 그 상처를 반복하지 않고 지내며 오히려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준다.

이들이 지닌 회복력의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아마도 이는 이들이 '남자는 약해보이면 안 된다'는 논리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나약함과 감정을 수용하고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심리적 치유는 상처를 수용하고 감정을 받아들이며 보듬어 안는데서 시작되는 법이니 말이다.

김형경의 책 <남자를 위하여>에는 한 원로 작가의 고백이 나온다. 문단의 뒤풀이 자리에서 60세가 넘은 남자 원로 작가가 "나는 평생 남자인 척 하고 사는 게 제일 힘들었어"라고 털어 놓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가부장 사회에서 주입해온 '남성다움'을 따르는 게 힘들었다는 뜻일 테다. 하지만, 상수와 양촌이 그랬듯, 남자답지 않아도 괜찮다. 애써 감정을 감추려 하지 않아도, 자신의 약점을 부인하며 강한 척 하지 않아도, 여성을 리드하지 않아도 상수와 양촌은 충분히 멋있고 매력적이었다. 

진정한 강함은 이들처럼 나약함과 상처, 다양한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용기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그러니 남성들이여 이제 더 이상 '남자답게' 살기 위해 강해보이려 애쓰지 말자.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도 되고, 마음 아프면 울어도 되고,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해도 정말 괜찮다. 그게 더 매력적이다.
 
 tvN 드라마 <라이브>의 한 장면

tvN 드라마 <라이브>의 한 장면 ⓒ tvN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라이브 이광수 배성우 오양촌 염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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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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