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문학과 예술이 삶을 반영한다고 말하지만, 주인공이 평범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단언코 아무도 없지 않을까. 물론 평탄한 인생도 나름의 의미는 있겠고, 때론 현실이 허구보다 더하다지만, 우리는 매체를 통해 경험해보지 못한 자극적인 인생을 체험하고 싶어 한다. 관객의 욕구를 반영한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때때로 극단적이기까지 한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다.
 
 뮤지컬 <록키호러쇼>의 공연 이미지 및 포스터

뮤지컬 <록키호러쇼>의 공연 이미지 및 포스터 ⓒ 알앤디웍스

그러니 뮤지컬 <록키호러쇼>의 두 주인공, 브래드와 자넷이 평범한 연인이라고 한들, 이야기 속에서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되는 건 불가항력에 가까울 테다. 그들, 평범한 남녀는 평범한 약혼식을 치른다. 두 사람은 평탄하며 순조로운 미래를 꿈꿨지만, 폭우 속 자동차 고장으로 인해 예기치 않은 운명과 맞닥뜨린다. 전화를 빌려 쓰기 위해 외딴 성을 방문한 이들. 그런데 성의 거주자들이라는 사람들은 전화기를 주기는 커녕, 성에 초대받은 걸 영광인 줄로 알라는 둥, 오늘이 중요한 날이고, 파티를 시작하려는 참이었다는 둥,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늘어놓는다.

전화 한 통 빌려주는 게 그렇게 어려울 일인가? 생각하고 있던 찰나, 성의 주인이 등장해 하룻밤 묵고 가거나, 식사라도 들고 가라고 권유한다. 프랑큰 퍼터라던가. 코르셋과 하이힐, 가터벨트 차림에, 강렬한 메이크업을 한 그 사람은 자신을 '귀여운 복장 도착자(Sweet trasvestite)'라고 소개한다. 그러더니 근육질 인간 '록키 호러'를 만드는 중이었다고 하지를 않나, 시끄럽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지를 않나. 이상함을 넘어 위기감을 느낀 이들은 성을 벗어나기 위해 시도하지만, 번번히 실패로 돌아간다. 

급기야는 프랑큰 퍼터와 그의 하인들이 '트랜스섹슈얼 행성'에서 온 외계인임이 밝혀진다. 결국 프랑큰 퍼터의 쾌락주의는 브래드와 자넷 몸에 스며들고, 그들은 그것을 실현함으로써 행복을 깨닫는다. 그리고 욕망에 눈을 뜬 이들은 그와 같은 망사 스타킹과 코르셋 차림을 하고 쾌락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른다.

일탈을 가능하게 한 'Story Warp'
 
 뮤지컬 <록키호러쇼>의 공연 이미지 및 포스터

뮤지컬 <록키호러쇼>의 공연 이미지 및 포스터 ⓒ 알앤디웍스

 
뮤지컬 <록키호러쇼>는 관객들 요구를 반영했다. 이보다 극단적인 경험을 하는 주인공이 또 어디 있으랴. 이야기 속 파격적인 삶은 작품만의 두터운 마니아 층을 형성했고, 그들은 열광했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환호를 보내는 팬들의 수 만큼이나 혀를 내두르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그들 이야기를 듣자면, 영 틀린 말은 아니다. 드라마틱한 삶을 꿈꿨다고 한들, 이런 삶은 체험하고 싶지 않았다는 거다. 게다가 부도덕한 소재를 이용했으니 더 나은 가치에 당도해야 온당함에도 이 작품은 그것을 단지 흥밋거리로 소비해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위험 인자로 점철되어 있는만큼, (호불호가 나뉠지언정) 작품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만듦새에 공을 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호기롭게도 그런 것을 개의치 않고, 제목 대로 쇼(show)에 충실할 뿐이다. 굳세게 제 갈 길을 향하는 전개가 연이어 펼쳐지는 가운데, 예측 불허한 타이밍에 음악이 시작되는가 하면, 난데없는 댄스 타임이 벌어지기도 한다. 

신기한 점은, 의도적으로 개연성을 조각낸 이 시도가 어떤 방편보다 제 몫을 톡톡히 해낸다는 거다. 현실에서 목격한다면 손가락질 할 행동에 관객들은 폭소를 터뜨리니 말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아무도 약혼자의 외도 현장을 목격하고 슬퍼하는 브레드를 동정하지 않으며, 그의 지질한 행동에 폭소를 터뜨리고 빵을 던진다. 또 부하에게 배신당한 프랑큰의 죽음을 두고 안타깝게 생각하는 이는 역시나 아무도 없다. 더욱이 등장인물이 외계인이라는 타자성, 의도적으로 과장된 연기, 배우의 동작을 따라하는 콜 백(call back) 문화는 관객들이 잠시라도 규범을 벗어나 목전에 놓인 쾌락을 만끽하게 한다.

'팬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앙상블의 활용 또한 인상적이다. 팬텀들은 공연 시작 직전, 남녀로 나뉘어 (그로테스크한 분장을 한 채) 극장 로비와 내부를 활보하며, 앞질러 관객들을 <록키호러쇼>의 세계로 부지런히 인도한다. 어떻게 하냐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에 도착하는 관객들을 기다리다가 까무러치게 놀라게도 하고, 혹여나 소외되는 이가 있지는 않을까 공연에 중요한 대목을 장식하는 춤을 알려주기도 한다.

프리 쇼라고 일컫는 이 오버추어는 즐거움을 관장하는 목적도 있겠지만, 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관객들로 하여금 이 작품의 규칙과 약속하게 한다. 우리는 앞으로 현실 같은 환상, 환상 같은 현실로 여행을 떠나리라는 약속. 그러니 그것이 설령 현실 이치와 아주 많이 떨어져 있더라도 즐거움에 몸을 맡기자는 약속.

외계인이 표현한 인간 군상
 
 뮤지컬 <록키호러쇼>의 공연 이미지 및 포스터

뮤지컬 <록키호러쇼>의 공연 이미지 및 포스터 ⓒ 알앤디웍스

 
창작자는 주인공 프랑큰 퍼터를 외계인으로 설정하며 더욱이 자유롭게 이야기를 썼을 테다. 설령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행동이라고 할지라도 외계인이라는 타자성은 우리로 하여금 멀찍이 떨어져 관망하게 하니 말이다. 더불어 하나의 세계로 점철되는 무대가 군상을 표현하는 방식은 리얼함보다 그로테스크함을 택하며, 무대는 현실과 더욱 멀어진다. 요약하자면, 나와 그들은 다르며, 그들이 무슨 일을 벌이든, 남 일이라 이거다. 이런 의도는 관객들이 규범과 관습을 떠나 잠시나마 일탈하도록 돕는 것도 목적이었겠지만, 반추해본다면 다른 의미에도 당도한다. 

인간을 주체로 삼는다면, 프랑큰과 그의 하인들은 타자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은 소위 말해 '비정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그들을 비정상으로 분류했는가? 이유인 즉슨, '나와 다르니까' 혹은 '현실을 살고있는 다수와 다르니까' 나아가 '사회적 시선이 그러하니까'일 테다.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사회적 놈(Norm)은 거기에서부터 탄생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타자성은 언제나 주체성을 공고히 하기 위한 매개로 사용되어 왔다. 백인이 유색인종을, 남성이 여성을,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타자로 분리한 경우가 그러하다. 나아가 주체성을 확보한 이들이 절대 다수일 때면, 경우는 더욱 심각해진다. 그들 다수는 자신들이 사회를 재단하기 쉽게 편리하도록, 또는 우월성을 확보하기 위해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를 분류한다. 그렇게 비장애인은 장애인을 비정상으로 분리했으며, 소수자 성이 질병으로 분류되던 때도 있었다.
 
 뮤지컬 <록키호러쇼>의 공연 이미지 및 포스터

뮤지컬 <록키호러쇼>의 공연 이미지 및 포스터 ⓒ 알앤디웍스

 
<록키호러쇼>는 주체와 타자의 개념을 전복시킴으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 짓는 사회 질서를 타파했다. 현실에서 만난다면 수군거릴 이들을 편견 없이 바라보게 하니 말이다. 불가피한 건, 주체성인즉, 타자성이 있어야만 존재하는 개념이라, 이 작품에서도 타자는 존재한다는 점이다. 작품이 성 내부로 공간적 배경을 한정하고 프랑큰과 그의 하인들이 다수의 위치에 놓이며 주체성을 확보하는 대신, 브래드와 자넷은 소수이자 타자로 주객은 전도된다.

또한, 그곳 다수가 형성한 공동체는 자신과 다른 이들, 브래드와 자넷을 집단으로 부터 분리한다. 현실과 동 떨어진 이 뮤지컬이, 실은 인간 군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다른 점이라면, 우리는 소수자를 용인하지 않고 그들 존재를 지우는 반면, 프랑큰 박사는 자신들 교리를 전파해 브래드와 자넷을 비롯한 인간들이 주류 사회에 동화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다. 현실이 더 참혹하다.

그러나 이런 의의를 지닌 뮤지컬도 다른 측면에서는 진화하지 못하고 오히려 일보 후퇴하는 실수를 범한다. 이유인 즉슨, 지난 시즌까지 여성 배우가 원 캐스트로 공연했던 콜롬비아 역에 남성 배우를 더블 캐스팅 했음에도, 정작 양성애자인 프랑큰 퍼터 역 캐스팅 성별에는 제약을 뒀기 때문이다. 이것은 얼핏 새로운 시도로 보일 법 하나, 다른 뮤지컬에서도 여성 역할을 남성 배우가 수행한 선례는 많지 않던가. 인간에 이어 외계인의 기본형 또한 남성에 두었음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만, 이번 시즌 젠더 프리 캐스팅은 다음 시즌 캐스팅을 기대하게 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더욱 과감하게 거듭날 <록키호러쇼>가 기대되는 이유다.

프랑큰이 우리가 되는 그 날까지
 
 뮤지컬 <록키호러쇼>의 공연 이미지 및 포스터

뮤지컬 <록키호러쇼>의 공연 이미지 및 포스터 ⓒ 알앤디웍스

 
온갖 사회적 규범들이 우리 머릿속 깊이 자리 잡은 바, 그래도 이상한 건 이상한 거다. 관람을 마친 후 관객들이 현실로 돌아올 때면, 이 작품은 여전히 현실과 화해할 수 없는 지점에 놓인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사회는 변화하고 있으며 그 변화의 속도는 점차 빨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육체를 부정하는 현실 사회에서 그들이 부르짖는 쾌락은 이상하고 부담스럽게 느껴지겠지만, 언젠가는 그게 부끄럽지 않은 일이 될 수도 있는 거다. 더욱이 우리 세대는 (극 안에서) 프랑큰 박사의 양성애적 기질로 대변되는 소수자 성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과정을 목도한 세대가 아니던가. 물론, 일부 장면에서는 윤리적 비난의 여지가 아주 큰 행각이 벌어지기는 하나, 그것만을 문제 삼고 넘어지기에는 이 작품이 담고있는 바가 더욱 크다.

윤리는 불변의 가치인듯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 천부인권과 같은 큰 틀은 절대적이겠다만, 변화하는 사회의 속도에 맞추어 윤리 의식 또한 변화하며 진화한다. 옛날 옛적에는 마녀 사냥이 합법적으로 이뤄지기도 했으며, 정신 질환자를 족쇄에 채워 감옥에 감금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허용될 때도 있었다. 변화하는 시대에 윤리만이 멈춰있다면, 구시대적 윤리가 포용하지 못하는 사회의 가치가 너무도 많았을 테다.

안타깝게도, 일부 기득권층은 윤리가 변화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변화를 부르짖는 젊은 세대와 싸우며 설령 그것이 옳은 방향이었더라도 젊은 세대의 의지가 꺾인 경우는 적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그들 기득권층도 한때는 변화를 부르짖는 젊은 세대였으며 현 젊은 세대도 언젠가는 기득권층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언젠가 기성세대가 되더라도 '꼰대'가 되는 불상사는 겪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변화를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할 테다. 
 
 뮤지컬 <록키호러쇼>의 공연 이미지 및 포스터

뮤지컬 <록키호러쇼>의 공연 이미지 및 포스터 ⓒ 알앤디웍스

 
뮤지컬 <록키호러쇼>를 보고 온 당신, 그 순간만큼은 자유로운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는가? 극장을 빠져나와서도 조금만 더 열린 생각을 갖고 있어 보아라. 아니, 당신의 생각은 이미 극을 보기 전보다 열려 있다. 관객들은 프랑큰 퍼터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았으나, 끝없는 쾌락을 추구하던 한 외계인의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세상을 지배하는 다수의 가치관의 변화를 위한 희생이었을지도 모른다.

왜 프랑큰 퍼터는 외계인이어야만 하는가. 그를 외계인으로 보고싶은 우리들의 마음 때문은 아닐까. 세상 모든 프랑큰 퍼터들이 우리가 될 수 있는 그 날까지, 뮤지컬 <록키호러쇼>에 중독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길 바란다.
뮤지컬 록키호러쇼 록호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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