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우리에게 중요한 키워드가 되어버린 보안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좀 더 쉽고 재미있게 다뤄보고자 한다. [편집자말]
 마스터 스틸샷

마스터 스틸샷 ⓒ 영화사집


퇴임한 지 1년이 다 되어 가고 있는데도, 최근 법조계 뉴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다. 그는 재임시절 다수의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를 받고 있는 상태이다.

수사에 나선 검찰은 지난 7월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의 PC를 넘겨받아 디지털 포렌식을 통해 복구에 나섰지만 복구가 불가능하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말았다. 당시 검찰에 따르면 박 전 행정처장 컴퓨터 저장 장치는 물리적으로 구멍이 나 있어 복구가 불가능한 상태였고, 양 전 대법원장 하드디스크 역시 디가우징(Degaussing)되어 복구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검찰이 언급한 디가우징은 PC 하드디스크 폐기 방식 중 하나로 강력한 자기장으로 HDD의 자성을 제거하여 복구가 일체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검찰은 관련의혹을 규명할 수 있는 중요한 법적증거를 확보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디가우저는 국가정보보호 명목으로 2008년 대법원에 처음 도입되었다고 한다. 대법원은 대법관 이상이 쓰던 PC는 퇴임 즉시 폐기 해왔다고 밝혔는데,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례에서는 국가정보보호를 목적으로 도입된 디가우저가 증거인멸의 도구로 쓰인 셈이다.

조희팔 사건 모티브로 만든 영화 <마스터>

이번 '보안쟁이가 들려주는 영화 속 보안이야기'에서는 영화 <마스터>를 통해 양승태 전 대법원 때문에 이슈가 되었던 하드디스크 폐기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조의석 감독이 연출하고 이병헌과 강동원이 주연을 맡았던 <마스터>는 715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영화는 실제 4조 원대 사기극으로 많은 사람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던 조희팔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영화에선 사기꾼의 회사가 의료기기 임대업체가 아닌 금융투자사로 나오지만, '고수익을 낸다'고 사람들을 현혹해 자금을 모으는 모습은 비슷하다. 

영화 속 사기꾼 일당은 모은 돈을 해외로 유출한 뒤 무기명 채권으로 자금을 세탁한다. 그리고 정관계 인물들을 매수하는 하여 뒷일을 도모하고 전산실을 파괴한 후 해외로 밀항한 다음 사망을 조작하는 모습까지, 조희팔의 행적을 투영하여 그려낸다. 감독은 복구하기 힘든 피해자들의 고통까지 스크린에 고스란히 옮겨 조희팔 사건을 재조명한다. 

하지만 조의석 감독은 씁쓸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는 스크린에서 만큼은 현실과 다른 결과물을 보여주길 원했다. 조 감독은 투철한 사명감과 사기꾼보다 더 지능적인 경찰 김재명(강동원)이란 캐릭터 배치하였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진회장(이병헌) 일당을 감옥 같은 프레임 속에 넣어 촬영하며, 기필코 그들을 감옥에 넣겠다는 의중을 지속적으로 노출한다.

감독은 배우들의 안정적인 연기를 바탕으로 두뇌싸움, 액션, 등 화려한 볼거리 풀어놓으며 깔끔한 범죄오락액션물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영화가 상영되던 시기가 한창 국정농단으로 시끄러웠던 때로, 영화를 보는 내내 현실에도 김재명 같은 경찰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눈에 띈, 영화 속 자료 파기 장면
 
 파쇄기를 통한 하드디스크 폐기 장면

파쇄기를 통한 하드디스크 폐기 장면 ⓒ 구건우


영화의 리뷰는 이쯤하고 이 보안쟁이의 시선을 사로 잡은 장면을 통해 본론으로 넘어가보자. 화려한 언변으로 사람을 현혹시키며 자금을 끌어모으는 한편, 정관계 인물들을 매수해 조 단위 사기를 진행 중인 원네트워크 진회장(이병헌)은 홍보이사 김엄마(진경), 전산실장 박장군(김우빈)과 함께 사기극의 피날레를 준비하고 있다.

오랫동안 그들을 추적해 온 지능범죄수사팀장 김재명(강동원)팀장과 신젬마(엄지원) 경위는 임의동행(?) 형식으로 박장군을 잡아들이고, 원네트워크 전산실 위치와 진회장의 로비 장부를 넘기라며 압박한다. 박장군은 취조 시작전 김엄마에게 전화해 위기상황임을 알린다. 전화를 받은 김엄마는 '민방위 훈련'을 외치고수하들은 일사불란하게  각종문서와 하드디스크 파쇄절차에 돌입한다. 능숙하게 PC와 서버에서 HDD를 분리하고 카트에 담아 회사에 마련해둔 파쇄기 앞으로 이동시킨다. 실행 1분 직전에 훈련이 해제된다.
 
이 시퀀스에서는 파쇄되는 장면이 등장하지 않지만, 이후 진회장이 한국을 정리하고 외국으로 탈출할 때 수하들이 하드디스크를 파쇄기에 넣어 처리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속에서 등장한 자료 파기 장면은 실제로 각국의 대사관이나 국가정보기관이 위기에 빠졌을 때 수행하는 폐기 프로세스이기도 하다.  
 
<마스터>에 나온 HDD 폐기 장면은 말그대로 '파쇄'이다. '파쇄'방식은 산업용 파쇄기에 넣어 하드디스크를 갈아버리는 작업이다. 장점은 안전성이 우수하고 개당 처리 속도가 10초 이내이며 시간당 2500개의 하드디스크를 분쇄하는 제품도 있다.  하드디스크가 날카롭게 분쇄 되기 때문에 뒤처리 시 안전장갑을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폐기 방식에는 '천공' 방식이 있다. 천공은 말 그대로 하드디스크에 구멍을 내는 물리적인 파괴방법이다. 앞서 검찰이 박 전 행정처장 PC 하드디스크에 구멍이 나 있었다고 했는데, 바로 이 천공 방식에 의해 폐기 처리 되었다는 이야기다. 천공기는 보통 1.5톤~3톤가량의 파괴압력을 가지고 있으며 개당 처리 속도도  10초이내로 빠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하드디스크를 폐기한 디가우징 방식의 경우 14000~16000G의 자기력이 사용된다. 디가우징의 경우 육안으로 폐기 된 걸 확인 할 수 없기 때문에 미국 국가안보국(NSA)이나 국가정보원에 인증을 받은 장비를 사용해야 한다.

외관상 파손이 없기 때문에 재사용이 가능할 것 같지만 디가우징 된 하드디스크는 재사용이 불가능하다. 만약 하드디스크의 재사용을 원한다면 이레이저 같은 소프트웨어 삭제 장비를 통해 데이터를 소거하고 사용해야 한다.
 
대법원처럼 많은 기업과 기관들이 하드디스크 폐기 장치를 보유하고 있지는 않다. 
많은 기업과 기관들은 폐기할 하드디스크를 모아 두었다가 아웃소싱을 통해 처리하고 있다. 하드디스크 폐기 업체는 방문처리 서비스를 지원하고 있는데, 사용자가 HDD를 옮기는 수고를 덜 뿐 아니라 실제 폐기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부득이하게 현장에서 폐기가 어려울 경우 폐기업체가 하드 디스크를 수거하여 작업장에서 폐기한다. 이럴 경우 폐기 업체는 작업현장을 녹화하여 정상적으로 하드디스크가 폐기 되었음을 위탁업체에 보여주기도 한다.
 
정보보호도 중요하지만, 부정행위 찾아내는 것도 중요

앞서 언급한 디가우징 등은 기업과 정부기관에서 PC 폐기 시 발생할 수 있는 각종 정보(산업기술, 영업비밀, 개인정보 등)의 유출사고를 막아내는 아주 중요한 보안프로세스이다. 하지만 영화 <마스터>에 나온 것처럼 범죄행위를 은폐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따라서 높은 도덕성을 갖춰야 하는 정부기관에선 각종 비리 사건에 대비한 프로세스를 만들어야 한다. 서버 기반 컴퓨팅과 메일아카이브 시스템을 구축하여 퇴사자의 의도적인 자료삭제를 방지하고, PC처분 시 하드디스크의 폐기를 보류하거나 폐기 전에 백업하는 절차를 두어야 한다. 정보보호도 중요하지만 부정행위를 알아내거나 방지하는 것도 중요하니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구건우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zig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디가우징 하드디스크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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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이의 아빠이자 영화 좋아하는 네이버 파워지식iN이며, 2018년에 중소기업 혁신대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보안쟁이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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