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허스토리> 포스터

영화 <허스토리> 포스터 ⓒ (주)NEW 배급


영화가 시작됐다. 스크린에 그림과 글씨가 새겨지고 있었다.

"강제로 끌려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가 된 위안부 원고 3명 여자 정신근로령에 의해 일본 공장에 동원된 근로정신대 7명 총 10명의 원고단이 시모노세끼(하관)와 부산을 오가며 재판을 했다. 그래서 이를 관부재판이라 불렀다."

관부재판은 6년 동안 23차례에 걸친 재판을 통해, 위안부 문제로는 최초이자 유일하게 일본정부로부터 부분 승소한 재판이다. 관부재판을 이끈 주인공인 문정숙은 여행사 사장이다.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기생관광이 발각되어 영업정지를 당한다. 그때 국내거주자로서는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가 뉴스에 나온다.

1990년 일본 정부는 '일본군은 군대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는 일본의 주장을 반박하며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부산 위안부 신고센터를 한시적으로 연다. 16년 간 자신의 집에서 도우미로 일한 배정길 할머님이 찾아오고 6년 간의 기나긴 재판은 시작된다.

평소에도 여성의 문제에 민감했다. 딸들이 어릴 적에 시민들의 모금으로 개관하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운영하는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을 여러번 다녀왔다. 딸들은 크면서 스스로 수요집회에도 참석하고 후원을 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맞냐고 질문을 던진다. 박물관 몇 번 가고 수요집회 참석했다고 그분들의 삶을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였냐고. 알고 있으면서 무엇을 했냐고. 행동하지 않는 지식을 지식이라 할 수 있냐고. 불편한 마음은 계속 나를 괴롭혔다.

행동하는 문사장(실존 인물인 사단법인 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 김문숙 회장)의 말은 도끼가 되어 흔들었다. "부끄러워서 그런다. 나만 잘 먹고 잘 산 게 부끄러워서." 영화를 보면서도 힘들었다. 힘들었던 것은 일본재판부의 고압적인 태도도, 할머님들의 고통스럽고 참혹했던 위안부 생활도 아니었다.

 영화 <허스토리> 스틸컷

영화 <허스토리> 스틸컷 ⓒ (주)NEW 배급


"할마시(할머니)들이 쪽팔린 줄 알아야지. 몸 팔아먹고 돈 받아쳐 먹을려고, 해방된지가 언제인데 슬슬 기어나와서"라고 말하는 택시 기사는 충격이었다. 일본 사람이었다면 욕하고 잊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우리나라 국민 중에 한 사람이라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할머님들의 아들조차도 같은 말을 한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거지? 나라가 지켜주지 못해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당했는데. 죽음 속에서 살아남아 평생을 고통 속에 산 우리의 누이고 딸들인데. 어떻게 그 분들의 삶을 왜곡하는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피폐했다. 그동안 죄인처럼 숨 죽이고 살 수 밖에 없었던, 할머님들의 현실을 알 수 있었다.

행정적으로 도움을 드려야 할 시장 조차도 위령비 건설에 "더러운 여자들. 여론이 그렇다고요"라고 하는데 절망은 깊어졌다. 여성들의 고통스런 역사가 떠올랐다. 몽골의 침략기에 끌려갔던 수십만의 고려인 중 힘들게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 온 여자를 '환향녀'라고 했다. 돌아온 것을 환영한 것이 아니었다. 가족과 이웃들은 그녀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들은 집으로 돌아 갈 수 없었다. '화냥년'은 고려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에도 지금 이 땅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전쟁의 역사는 여자들을 지켜주지 못한 역사다. 이제 그들의 역사가 아닌 그녀들의 관점에서 쓰여진 역사, 그녀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역사, '허스토리'가 펼쳐져야 한다.

마지막 재판에서 배정길 할머니는 "생지옥에서 살았고 지금도 지옥이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살려고 애썼을뿐이고 결국 살아남았다"고 했다. 할머니들은 그렇게 살아남았다. 누군가는 힘겹게 버티고 강인하게 지켜내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편안하게 걷는 이 길은 그분들이 살아남아서 지킨 길이다.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똑바로 지켜보고 잘못된 역사는 바로 잡아야 한다. 과거가 현재를 발목 잡는 일은 없어야 한다.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이 그랬고 돈 몇푼에 팔아버린 한일협정이 그랬듯이. 부분 승소했던 관부재판은 일본 정부의 항소로 2001년 히로시마 고등법원에서 패소했다. 일본은 항소함으로써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영화 <허스토리> 스틸컷

영화 <허스토리> 스틸컷 ⓒ (주)NEW 배급


뉴스를 보고 있었다. JTBC <뉴스룸> 손석희 앵커가 사법부와 외교부의 재판거래를 논평했다. 독일의 예술가 귄터 뎀니히는 멀쩡한 보도블록을 깨고 그 자리에 동판을 박아 넣었다. 동판은 '걸려서 넘어지는 돌'이라는 뜻의 '슈톨퍼 슈타인'이다. 독일이 강제수용소에 끌려간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서 그들이 생전에 머물렀던 집 근처에 설치한 동판이다. 길을 걷다가 동판이 발에 걸리면 그 자리에서 희생자를 기리는 것이다.

뉴스에서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당시 사법부가 일본군 위안부 재판에 개입한 정황이 뒤늦게 드러났다고 전했다. 2015년 12월 박근혜 정부가 한일 위안부 합의를 발표하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내겠다고 했다. 이에 법원행정처 기조실에서 '소를 각하하거나 기각해야 한다'는 내용의 소송 대비 문건을 작성했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피해자가 묻어버려야 할 걸림돌이었던 걸까. 위안부 피해 역사는 덮는 것이 아니라 꺼내서 끝없이 기억해야 한다. 우리 삶에도, 역사에도, 마음을 깨워 흔드는 '걸려서 넘어지는 돌'을 새겨야 한다.

허스토리 일본군 위안부 슈톨퍼 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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