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 드라마의 왕좌를 지키고 있던 tvN <김비서가 왜 그럴까>가 26일 종영했다. 기가 잔뜩 눌려있던 지상파 드라마들에겐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는 반격의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기선을 제압한 건 SBS <친애하는 판사님께>였다. 윤시윤의 1인 2역 연기를 앞세워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7.7% 시청률을 기록하며 8.602%의 <김비서가 왜 그럴까>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그 뒤를 MBC <시간>(4.2%)과 KBS2 <당신의 하우스헬퍼>(4.0%)가 이었다. <친애하는 판사님께>가 첫회에 비해 시청률이 상승하는 곡선을 그렸던 것과 달리 <시간>은 첫회 시청률과 비교했을 때 큰 변화가 없었다. 과연 <김비서가 왜 그럴까>가 점유하고 있던 파이가 어느 쪽으로 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시간>과 <당신의 하우스헬퍼>에게 기회가 남아 있을지, <친애하는 판사님께>의 독주가 진행될지 궁금하다.
 <시간>의 한 장면

<시간>의 한 장면 ⓒ MBC


<시간>은 과거 KBS2 <비밀>, SBS <가면> 등 밀도 있는 이야기를 선보였던 최호철 작가의 신작이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한 남자가 자신으로 인해 인생이 송두리째 무너진 한 여자를 위해 벌이는 사투를 그린 드라마다. <시간>은 방영 전부터 주목을 받았다. 다만, '좋은 쪽'의 반응은 아니었다. 다름 아니라 안하무인의 재벌2세 천수호 역을 맡은 김정현의 태도 논란 때문이었다.

지난 20일에 진행됐던 드라마 제작발표회에서 김정현은 웬일인지 시종일관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포토타임 도중에도 '다정한 포즈를 취해달라'는 기자들의 요청에도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했고, 서현이 팔짱을 끼려 했지만 이마저도 거부했다. 이는 거만한 태도로 비쳐졌고, 현장에 있던 기자들을 비롯해 이 소식을 접한 다수의 누리꾼들은 앞다퉈 비난에 나섰다.

"촬영을 할 때나 안 할 때나 제 모든 삶을 천수호처럼 살려고 노력 중이다. 결과가 어떻지는 모르겠지만 에너지 자체를 전부 넣어서 살고 있는 것 같다."
 <시간>의 한 장면

<시간>의 한 장면 ⓒ MBC


나중에 김정현은 "역할에 몰입하느라 그랬다"고 해명했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대답이었다. 어찌됐든 김정현의 '과몰입 해프닝'은 <시간>의 '노이즈 마케팅'으로 활용된 듯하다. '도대체 얼마나 연기를 잘 하길래?', '얼마나 몰입을 했는지 볼까?' 많은 시청자들이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시간>을 시청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김정현의 연기는 자신의 변명을 변명하기에 충분했다.

김정현이 연기한 천수호는 그야말로 '망나니'라는 말이 제격이었다. 자신이 VIP라는 사실을 몰라보고 잘못 안내했다는 이유로 백화점 안내원 설지현(서현)에게 무례한 언행을 일삼고 심지어 무릎을 꿇게 만든다. 이 사실이 인터넷에 알려지자 무마하기 위해 당사자를 찾아가 돈다발을 건넨다. 모든 사람들을 아랫사람 대하듯 하고, 걸핏하면 소리를 지르는 등 폭력적인 태도를 취한다.

김정현은 천수호 역에 완전히 '몰입'한 듯 보였다. 모든 것을 가진 재벌2세이기는 하나 '첩의 아들'이라는 낙인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터라 자존감이 훼손된 거친 모습을 잘 표현했고, 뇌종양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후 몰려오는 감정들을 무리없이 끌어냈다. 눈빛은 안정적이었고, 발성 등 기본적인 요소들도 잘 갖춰져 있었다. 시청하는 입장에서 극에 몰입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오히려 아쉬움은 드라마의 뻔한 설정에서 나타났다. 우선, 캐릭터들이 주는 피로감이 컸다. <시간> 속의 '재벌' 집안 내의 알력 다툼은 기존 드라마들이 그려왔던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천수호의 무례함은 그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해 필요했다지만, 결코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또, 가난에 허덕이는 여자 주인공(설지현)이 무한 긍정에 생존력과 사회성을 갖춘 캔디형인 건 진부하기만 하다.
 <시간>의 한 장면

<시간>의 한 장면 ⓒ MBC


"너 살기 싫어? 이런데 멍 때리고 있으면 어떡해!"
"나도 모르겠어요. 살고 싶은지. 아닌지..."

게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동생 지은(윤지원)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설지현을 돕는 상대가 재벌2세라는 건 식상한 접근이 아닐 수 없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뜨거운 사랑에 빠지게 될 테고 말이다. 수호가 비가 세차게 내리는 와중에 횡단보도 한가운데 멍하니 주저앉은 지현을 번쩍 들어올려 나오는 장면(4회 엔딩)은 '흑기사 포옹'이라 이름 붙여졌는데, 남녀 주인공 간의 뻔한 구도의 재연이라 설렘보단 답답함이 앞섰다.

그나마 흥미로웠던 건 지현의 남자친구 선민석(김준한)이었다. W그룹 법무팀 변호사인 그는 반듯한 외모와 달리 억눌린 욕망을 품고 있다. 사건의 전말을 쫓던 그는 천수호의 약혼자인 은채아의 폭행이 지은의 죽음에 큰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그러나 그 사실을 지현에게 말하기보다 '자살'로 사건을 은폐하는 데 앞장선다. W그룹의 변호사로서 재벌의 비호 속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시간>의 한 장면

<시간>의 한 장면 ⓒ MBC


민석은 "힘 없는 피해자가 진실을 알게 되면 재벌을 상대로 긴 싸움을 시작할 겁니다.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을"이라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 한다. '이길 수 없는 싸움'처럼 보인다 해서 진실을 위해 싸울 권리마저 빼앗아 버리는 걸 과연 옳은 일이라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이야말로 <시간>이 끄집어낼 수 있는 보다 흥미로운 지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연 <시간>이 첫주의 부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제대로 된 반격 카드가 없다면 반등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당초 논란의 대상이었던 서현은 '아이돌 출신'이라는 완전히 편견을 깰 정도는 아닐지라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인상을 주기에는 충분한 연기를 펼쳐 보였다. 김정현도 '과몰입 변명'을 납득케 했다. 역시 <시간>을 압박하는 건 <친애하는 판사님께>의 무서운 기세다. <시간>에게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종성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wanderingpoet.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시간 김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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