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축구의 마지막 생존자' 일본의 도전이 16강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일본은 3일 오전(한국시각) 러시아 로스토프 아레나에서 열린 2018 러시아월드컵 16강전에서 벨기에와 난타전 끝에 2-3으로 패했다. 일본은 후반전 초반 하라구치와 이누이가 연속골을 터트리며 먼저 앞서 갔으나 이후 3골을 연속으로 내주며 대역전패를 당했다. 벨기에는 얀 베르통헨과 마루앙 펠라이니의 연속골에 이어 후반전 인저리타임에 나세르 샤들리가 극적인 역전 결승골을 터트리며 8강행 티켓을 잡았다.

일본은 이번 러시아월드컵에 AFC 가맹국 자격으로 출전한 5개국(한국, 이란, 호주, 사우디) 등 유일하게 조별리그를 통과했다. 1998년 프랑스 대회부터 월드컵 본선무대를 밟기 시작한 일본은 2002년과 2010년에 이어 아시아 국가로는 역대 최초로 통산 3번째 16강행이라는 위업을 이룩했다.

니시노 감독, 일본 패스축구 스타일로의 회귀

 3일(한국 시각) 러시아 로스토프 아레나에서 열린 벨기에와의 16강전에서 패한 뒤 니시노 아키라 일본 감독이 선수들을 격려하고 있다.

3일(한국 시각) 러시아 로스토프 아레나에서 열린 벨기에와의 16강전에서 패한 뒤 니시노 아키라 일본 감독이 선수들을 격려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내친 김에 사상 첫 월드컵 8강이라는 새 역사까지 넘봤던 일본이지만 벨기에를 상대로 2골 차의 리드를 지키지 못하며 손 안에 다 들어온 승리를 눈앞에서 놓쳤다. 아시아 국가가 월드컵 8강 이상의 성적을 거둔 것은 2002년의 한국(4강)과 1966년의 북한(8강), 단 2팀뿐이다.

일본 축구의 '저력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 대회라고 할 만하다. 일본에게 있어서 이번 러시아월드컵은 그 어느때보다 파란만장했다. 일본은 월드컵 개막을 불과 두달 앞두고 3년 가까이 팀을 이끌어온 바히드 할릴호지치 감독을 경질하며 자국 출신의 니시노 아키라 감독을 선임하는 초강수를 뒀다. 보통 월드컵이 열리는 4년 주기로 감독의 임기를 보장하던 일본으로서는 이례적인 선택이었다.

할릴호지치 감독은 4년 전 브라질 대회에서 알제리의 16강 진출을 이끌며 같은 조에서 홍명보호를 대파한 활약으로 국내 팬들에게도 친숙한 명장이다. 할릴호지치 감독은 아시아축구계에서도 일본을 월드컵 본선무대로 이끌며 어느 정도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재임기간 내내 일본 축구계 및 스타 선수들과의 불화, 평가전에서의 부진이 이어지며 여론이 좋지 않았다.

문제는 감독교체 시기가 너무 늦은 데다 갑작스러운 변화로 일본 자국 내에서도 무리수라는 반응이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수년간 지도자로서 현장을 떠나있었던 데다 월드컵 경험이 없는 니시노 감독의 리더십에 대한 우려, 고령화되고 보수적인 구성으로 회귀한 선수단 구성에도 의문 부호가 붙었다. 월드컵을 앞두고 자국 대표팀의 성적에 대한 기대치가 낮고 축구열기를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은 한국과도 비슷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정작 뚜껑을 열자 일본은 이번 월드컵에서 가장 '놀라운 반전'에 성공한 팀 중 하나가 됐다. 첫 경기부터 강호 콜롬비아를 잡아내는 깜짝 이변을 연출한 데 이어, 세네갈과의 2차전에서는 두 차례나 먼저 리드를 빼앗기고도 따라잡는 뒷심을 선보이며 경기력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켰다. 최종전에서는 폴란드에 0-1로 패하며 1승1무1패로 세네갈과 승점과 골득실에서 모두 동률을 이뤘지만 페어플레이 점수에서 경고 수가 적었던 일본이 16강행 막차를 타게되는 행운을 누렸다. 전통의 유럽과 남미를 제외하고 '제3대륙' 국가 중 16강까지 살아남은 팀은 북중미의 멕시코와 아시아의 일본 단 2팀뿐이다.

16강 진출 당시 비매너 플레이로 비판 받았지만

냉정히 말하면 일본의 16강은 이전 대회와는 달리 역대급으로 운이 많이 따라준 것도 사실이다. 첫 경기인 콜롬비아전에서는 상대 수비수 카를로스 산체스가 이른 시간에 핸드볼 파울로 퇴장당하며 초반부터 일본이 페널티킥 선제골과 수적 우위를 등에 업고 편안하게 경기를 풀어갈수 있었다. B조의 이란이 일본과 같은 승점을 올리고도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것과 비교할 때 일본은 폴란드전에서 패하고도 페어플레이 점수로 간신히 기사회생했다. 러시아월드컵에서 페어플레이 점수로 16강행을 확정한 것은 일본이 유일하다.

폴란드전은 C조의 프랑스-덴마크전과 함께 이번 월드컵 '최악의 경기'로 꼽힐 정도로 논란의 여지가 많았던 경기였다. 일본은 최종전에서 한 골 차로 패해도 16강에 올라갈 수 있는 상황이 되자 뒤지고있는 상황에서 적극적인 공격의지를 보이지 않고 경기 막판 20분 가까이 후방에서 공을 돌리는 비매너 플레이로 빈축을 샀다. 결과적으로 16강이라는 목표는 이뤘지만 월드컵이라는 무대의 수준에 어울리지않는 졸전에 팬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외신에서는 '일본이 자신들의 운명을 다른 팀 경기에 맡기고 스스로 결정하기를 포기했다'고 비꼬기도 했다.

오히려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한국이 최종전에서 FIFA 랭킹 1위의 전 대회 우승국 독일을 2-0으로 격침시키는 이변을 연출하며 장렬하게 동반 산화한 것과 비교하여 '부끄러운 16강보다 명예로운 탈락이 낫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월드컵에서 가장 비매너에 가까운 플레이를 보여준 일본이 경고수가 적다는 이유로 페어플레이 점수로 16강행 티켓을 따내는 아이러니는 FIFA 규정의 허점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로도 남았다.

자칫 상처뿐인 영광으로 남을 수도 있었던 월드컵이었지만 일본은 16강에서 어느 정도 자존심을 회복했다. 강호 벨기에를 상대로 한때나마 2골 차 리드를 잡을 정도로 후반 초반까지의 일본은 앞선 폴란드전과는 또다른 경기력을 보여줬다. 일본은 적극적인 전방압박과 빠른 패스전개에 이은 역습으로 방심한 벨기에의 측면을 여러 차례 괴롭혔다.

일본이 이번 대회에서 보여준 가장 의미있는 성과라면 일본식 패스 축구의 경쟁력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는 점이다. 4년 전 브라질 대회에서 조별리그 탈락의 수모를 당하고 더 이상 어정쩡한 기술축구로는 세계무대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회의론이 적지 않았다. 피지컬과 속도를 강조하는 할릴호지치 감독은 몸싸움과 근성이 부족한 일본축구에 좀더 직선적인 경기운영 방식을 덧입히려고 했지만 기존 일본 축구계와의 갈등 속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일본이 월드컵 개막 직전 할릴호지치를 경질하고 니시노 감독체제를 선택한 것은 결국 익숙한 스타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저력 보여준 일본, 그러나 한계도 있었다

 3일(한국 시각) 러시아 로스토프 아레나에서 열린 벨기에와의 16강전에서 패한 일본 혼다 게이스케 선수가 동료들과 포옹을 나누고 있다.

3일(한국 시각) 러시아 로스토프 아레나에서 열린 벨기에와의 16강전에서 패한 일본 혼다 게이스케 선수가 동료들과 포옹을 나누고 있다. ⓒ AP/연합뉴스


운이 따라준 측면도 분명히 있지만 일본축구의 경쟁력은 확실히 유럽과 남미의 강팀들을 상대로도 일방적으로 밀리지않았다. 월드컵의 갑작스러운 감독교체와 선수단 개편으로 인한 혼란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경기력이 크게 흔들리지 않은 것은 이미 수십년간 자국 리그와 유소년 시스템부터 몸에 배어있는 익숙한 기술 축구의 내공 덕분이었다.

물론 한계도 여전했다. 아시아에서 한국이나 호주 같은 팀들을 상대할 때도 그러했듯, 일본은 후반 압도적인 피지컬과 높이로 밀고 들어오는 벨기에의 파상공세를 막지 못하고 무너졌다. 한번 흐름을 내주면 회복하지 못하고 한꺼번에 동반으로 무너지는 일본 선수들의 심리적 문제도 여전해 보였다. 고령화된 선수단으로 인하여 아저씨 재팬이라는 오명을 들었던 팀답게 후반으로 갈수록 체력적인 문제 역시 두드러졌다.

니시노 감독의 용병술도 아쉬움으로 남았다. 니시노 감독은 폴란드전에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16강 티켓을 지키기 위하여 소극적인 용병술로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벨기에전에는 여론의 부담을 의식한 듯 먼저 2골 차 리드를 잡고 수비적으로 나서야 할 상황에서 오히려 완급 조절에 실패해 상대에게 반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공격해야 할 타이밍에는 머뭇거리고 지켜야 할 타이밍에서 지키지 못한 댓가는 결국 초반의 상승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2연패로 월드컵을 허무하게 마감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일본도 이번 대회를 기점으로 다시 한번 세대교체를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혼다 케이스케, 가가와 신지, 하세베 마코토, 오카자키 신지 등 주력 선수들은 4년 뒤를 기약하기 힘들다. 유럽파는 많지만 빅리그에서 주전급으로 활약하는 정상급 선수는 그리 많지 않다. 또한 일본이 세계 축구와 경쟁하기 위해 몸싸움과 체력을 더 길러야 한다는 약점은 또 다시 차기 감독과 일본축구협회의 과제로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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