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시간을 다룬 '타임 루프'이나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타임리프' 장르는 '시간물'의 하위 장르에 속한다. 그리고 이 작품들의 대다수는 본인 혹은 지인의 '죽음'을 겪거나, '죽음과 맞먹는' 삶의 고통을 겪는 주인공을 내세운다. 말하자면 후회하거나 후회했거나 둘 중 하나다. 후회할 만한 상황이 벌어져 만회를 위해 과거로 돌아가거나, 사건 이후에도 줄곧 살아가다 마침내 후회를 극복하거나.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죽음이라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들은 자기 죽음보다 두려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되돌리려 하거나, 어떠한 사고방식이나 관계의 죽음 이후에 바뀐 생활 양식에 맞추어 살아가게 된다. 정리하자면 '죽음을 극복하는 두 가지 방식'이다. 죽음 자체를 바꾸려 하거나 혹은 죽음을 견디며 꿋꿋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런 종류의 작품 두 가지를 소개하고 싶다. 젊은 층에 인기 있는 애니메이션 <Re : 제로로부터 시작하는 이세계 생활>을 전자로, 최근 개봉한 <데드풀 2>를 후자로 말이다. 여기서 <Re : 제로>의 주인공은 죽어도 특정 시점으로 다시 살아나는 '타임 루프'에 부합한다. 또한 최근 개봉한 <데드풀2>도 개그성이지만 짤막하게 시간을 오고 가기는 하므로 '타임 리프'라고 말할 수 있다.

 소설 <Re : 제로로부터 시작하는 이세계 생활> 공식 일러스트

소설 공식 일러스트 ⓒ KADOKAWA


1. <Re : 제로> - 후회하거나

편의점에 들렀다 집에 가는 길, 후줄근한 추리닝 차림의 주인공은 어느 날 이세계에 뚝 떨어지게 된다. 영 이상한 곳에서 영 이상한 차림으로 이리저리 헤매다 죽음을 맞게 된다. 그런데 웬걸, 죽었는데 다시 살아난다. 몇 번 실험해보니 무언가 목표를 달성할 때마다 살아나는 시점이 달라지는 것 같다. 주인공이 그 능력을 통해 모험하는 게 작품의 주요 서사다.

잦은 언급으로 우리에게 익숙하다시피 한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가장 잘 드러내는 건 사실 이 작품이 아닐까 싶다. 니체는 차라투스투라의 입을 빌려 '이왕 사는 인생 최고의 선택을 다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최고의 결과를 위해 최악의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의 요지는 바로 죽음이다.

작품에서 주인공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죽음에 무감각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정확하게는 자신의 죽음에는 무감각해지고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는 민감해진다. 그러니 이 작품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자기 죽음으로 타인의 죽음을 막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자신을 희생해 이세계를 구원한다는 점에선 거국적이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점에선 영웅적이다. 사실 이유가 있기는 하나, 그 이유란 게 사랑이라는 이름의 '열혈'이기에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죽어도 살아난다지만, 죽음에 도전하는 마음 자체는 큰 결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자신보다 월등하게 강한 상대라면 더욱 그렇다.

 애니메이션 <Re : 제로로부터 시작하는 이세계 생활>의 한 장면

애니메이션 의 한 장면 ⓒ 애니플러스


아마 이 작품이 흥행한 이유를 그런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을 듯하다. 일단 이 작품의 원작을 언급하자면 '라이트 노벨'로 십대 이십대의 젊은 층이 가볍게 볼 수 있는 소설이다. 가볍게 볼 수 있지만 가끔 무거운 내용을 다루기도 하는 이 소설 군에서, <Re : 제로>는 판타지라는 가벼운 배경에 죽음이라는 무거운 배경을 부여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통칭 '이세계물'이라는 장르에서 주인공은 이세계에 떨어진다. 그곳은 우리 현실과 동떨어져 있거나 비슷하기도 한 공간이다. 이 장르에 속한 대부분 작품에서, 주인공은 현실에서 벗어나 잠재된 능력(노력을 포함해서)으로 큰 성공을 이루게 된다. 그래서 보통 이 장르는 젊은 층이 사회로부터 느끼는 '선택'의 압박을 비교적 가볍게 치환한 것으로 여겨지고는 한다. 작중 주인공들의 능력이 이야기가 진행되며 서서히 증가하기는 하나, 결과적으로 원래부터 '재능'이 있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이세계물'이란 다른 세상의 자신은 현실과는 다르게 재능도 있고 성공도 할 것이라는 꿈을 바탕으로 한다.

판타지 작품에서도 죽음은 가역적이다. 한 번 죽으면 끝이기에 주인공의 동료는 몰라도 주인공만큼은 절대 죽지 않는다. 인기가 많다면야 주인공이 아니라도 죽지 않는다. 심지어 죽었던 사람을 살려 내기도 한다. <드래곤볼>이 대표적인 예다. 죽어도 살아나기에 걱정은 되지 않지만, 죽음의 슬픔만큼은 폭발적이어서 주인공이나 동료의 정신적, 육체적 성장을 이끌어 내는 단초가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Re : 제로>의 주인공은 어차피 죽어도 살아나는 게 확정이니 주인공 본인도, 독자들도 몸 걱정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가 불멸자는 아니다. 명확하게 죽음을 겪고 다시 살아 돌아온다. 그건 마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죽음에서 돌아온 자>처럼 고통스러운 사투의 연속이다.

 애니메이션 <Re : 제로로부터 시작하는 이세계 생활>의 한 장면

애니메이션 의 한 장면 ⓒ 애니플러스


주인공은 최상의 결과를 얻으려 죽고 또 죽는다. 수 번에서 수십 번에 달하는 영원 회귀 속에서 그는 어떤 답을 찾아내곤 한다. 그건 마치 요즘 사람들이 '인생을 여러 번 살아야만 답을 알 수 있는' 퀴즈를 푸는 것처럼 느끼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한다.

주인공은 단지 죽는 것 말고는 재능이 없다는 점에서 청춘의 무기력함이 엿보이고, 누군가의 진한 사랑을 받는다는 점에서 심리적 안정감을 추구하려 하는 듯하고, 죽음이 확정된 세계를 살아간다는 점에선 숙명감이 느껴진다. 그는 성공에 이를 때까지 줄곧 죽음을 반복하곤 하니, 어쩌면 우리에게 실패해도 괜찮다며 다독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덧붙이자면 죽음만큼 큰 고통에도 죽지 않는다는 의지, 혹은 죽어도 정말로 죽는 건 아니라고 끝없는 고통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매번 '후회하거나'라는 미래형의 단어로 미래를 기약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 <데드풀 2>의 작품 포스터

영화 <데드풀 2>의 작품 포스터 ⓒ 20세기 폭스 코리아


2. <데드풀 2> - 후회했거나

데드풀은 마블 코믹스의 캐릭터로, 전신에 암세포가 퍼졌지만 자가치유 능력이 있어 죽지 않는다. 코믹스판과 영화판에서 능력이 생긴 계기가 다른데, 영화에선 암치료제 임상 실험에 참가했다가 강제로 능력을 부여받게 된 것으로 나온다. 결과적으로 작품 밖의 독자에게 말을 걸거나 거친 입담을 선보이는 등의 캐릭터성만큼은 변함없다.

<데드풀>과 그 속편에서 데드풀의 죽음은 그다지 슬프지도 않고 오히려 유쾌하기까지 하다. 영화 속에서 데드풀은 총을 맞거나 칼로 신체가 잘려도 죽지 않고 신체가 재생된다. 그 신체가 재생되는 속도가 느릿느릿해서 벌어지는 장면들이 관객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한다. 오죽하면 속편의 오프닝 장면부터 사지가 절단되는 장면이겠는가. 그는 명실상부하게 '하나도 걱정 안 되는 영웅'이다. 

이런 종류의 캐릭터를 '안티 히어로'라고 하는데, '히어로'와는 달리 사명감 따위는 없는 게 특징이다. 하지만 데드풀의 경우엔 '안티 히어로' 중에서도 '진중함'마저 없다는 점이 부각된다. 시종일관 웃음과 욕설로 가득 찬 영화의 분위기에 적응한다면야 무척 재밌겠지만, 진중함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히어로' 타이틀조차 떼고 '안티'로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 데드풀의 죽음은 가볍게 치부될 만한 것이 아니다. 영화를 보면 죽음이 유머의 도구는 되어도 그 숭고함만큼은 무시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복잡한 원작의 설정을 제하고 영화에만 국한하자면 요즘 관객에게 데드풀의 인기란 '죽음보다 더한 광기'가 아닌가 싶다.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판단이, 죽지 않기 때문에 가장 효율적인 판단이 되는 상황이다.

 영화 <데드풀 2>의 한 장면

영화 <데드풀 2>의 한 장면 ⓒ 20세기 폭스 코리아


분명 데드풀이 그 효율성을 고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데드풀 자체보단 '광기에 가까워야만 해소되는 갈등'에 주목해야 한다. 어찌 보면 좋은 해결책이 아님에도 원래 그것이 해답이라는 듯 자연스레 해결되는 일련의 서사는, '그렇게 살아도' 괜찮았으면 하는 관객의 마음을 반영한다. 

영화에서 데드풀은 '혼자' 활동하고 싶다 말한다. 그리고 '혼자' 모든 짐을 짊어지는데, 결과적으로 죽게 된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서 이것저것 하다가 동료들이 달려와 도와주곤 한다. 즉, 이 영화에서 데드풀은 홀로 행동하기를 원하고 홀로 감당하지 못할 문제를 홀로 해결하려 한다. 도움을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이지만 어찌 됐든 여럿이 함께할 때가 덜 힘든 것만은 틀림없다.

그런데 그것은 사회와 필연적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현실 세계와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개인이 일상생활에서 마주하는 여러 문제의 대다수는 개인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건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근간 혹은 세계에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이 모여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말은 합당하지만, 영화 속 데드풀과 친구들은 고작 다섯 여섯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가 주먹보다 대화를 택했고, 그게 먹혀들어간 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유머로만 보이지 않는 이유다.

우리는 뉴스를 보며 뉴스 속의 일에 분노하면서도 뉴스 속의 일이라고 명확하게 단정 지어 버린다. 모니터와 티브이의 화면은 그곳과 이곳이 다르다고 느끼게 한다. 그래서 경각심은 줄어들고 그것이 개인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될 때만 조심하곤 한다. 이때 직접적인 위협이 무엇인지는 법률상에 기재되어 있고, 그 한마디에 따라 범죄와 범죄가 아닌 것으로 갈라진다. 결국 법률은 처벌의 여부만을 구별할 뿐 개인을 위협에서 구하지는 못한다.

 오역 논란과 함께 또 다른 마블 영화 <데드풀>은 상대적으로 좋은 번역이라고 평가 받으며 번역가에 대한 일부 팬층이 생기기도 했다.

영화 <데드풀 2>의 작품 포스터 ⓒ 20세기 폭스 코리아


그러나 데드풀은 법보단 행동을 고수하면서도 행동보단 말로 문제를 해결한다. 같은 '한 마디'이지만 앞뒤가 맞지 않는 그의 행동에서 결국은 합리성을 추구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고, 어쩌면 막무가내처럼 보이는 그가 합리주의자는 아닐지 생각해 보게 된다.

데드풀의 모습 말고 데드풀이 겪는 동료애는 무척 고고하게만 보인다. 영화상에서 규칙을 중시하던 엑스맨 동료 콜로서스가 끝내 데드풀처럼 물드는 것을 떠올려 보면, 이 영화의 최종 목적지는 데드풀의 손을 들어주는 것 같다.

어느 쪽이 맞는 말이든 간에 주류의 의견에 반하면 금세 '사회적 사망'에 이르게 되는 상황에서,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자신의 판단을 믿는 데드풀의 모습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제멋대로 행동하라는 뜻이 아니라, 타인에 휘둘리지 말고 온전히 제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순교자인 동시에 배교자다. 늘 자신의 신념에만 충실한 것이 늘 자신에게 솔직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영화와 현실의 관계가 상호보완적이라면, 현실의 관객은 이 영화를 보며 죽음의 리스크가 없는 상태로 마땅한 논리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지만 그럼에도 해피 엔딩으로 귀결되는 상황을 원하는 것일 테다. 이는 절차를 거쳐 논리적 검증을 요구하는 면과, 논리적이지 않은 감정으로 서로 대립하는 면이라는 역설적인 사회 상황에서 귀인한다.

즉, 데드풀의 모습은 이미 여러 번의 후회를 겪어본 사람이 자신을 투영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데드풀 2>의 쿠키 영상도 그러하지 않는가.


영화 애니메이션 데드풀 RE : 제로로부터 시작하는 이세계 생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