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혼 계약서' 쓰고 가출한 남편... 부부에게 찾아온 변화

'졸혼 계약서' 쓰고 가출한 남편... 부부에게 찾아온 변화 ⓒ SBS


얼마 전 결혼기념일이었다. 어느덧 내가 싱글로 살아온 시간보다 누군가와 함께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아낸 시간이 길어졌다. 생각해 보면 '경이로운(?)' 일이다. 피를 나누지 않은 사람과 '동거'하며 함께 삶을 누려간다는 것이.

그러나 수명이 길어지면서 문제(?)가 생긴다. 살아온 시간만큼 같은 사람과 또 살아가야 한다는 부담이 마음에 쿵 얹혀진다. 그래서 1990년대 등장하기 시작한 게 황혼이혼이다. 자녀가 성장한 이후 부부가 각자의 삶을 찾기 위한 '이혼'. 하지만 몇 십년 지속해온 결혼이라는 관계의 형태를 '파괴'하는 이 결정에는 많은 부담이 따랐다.

'가족'이라는 제도가 사회의 근간이 되어 개인의 삶을 지탱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더더욱 힘든 결정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졸혼'. 2004년 일본의 작가 스기야마 유미코의 책 <졸혼을 권함> 이후 등장한 이 단어는 유행처럼 번져 2016~2017년에는 한국 사회의 '트렌드'가 되었다.

그 트렌드에 따라 여러 다큐가 '졸혼'에 대해 다뤘고, 연예인 등 유명인사가 당당하게 자신의 졸혼을 고백하기도 했다. 일부 방송사들은 졸혼을 예능에 도입해 <별거가 별거냐>(2017)라는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졸혼이 시대의 트렌드가 된 요즘, < SBS 스페셜 >이 다시 졸혼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타이틀은 바로 '행복한 부부 생활을 위한 졸혼 연습'(아래 졸혼연습)이다. '졸혼에 대해 회자된 지가 언제인데 웬 뒷북인가'란 생각이 떠오르는 찰나, 프로그램에서 뭔가 다른 기운이 감지됐다.

차광수-강수미 부부의 졸혼 연습

 SBS 스페셜 - 행복한 부부 생활을 위한 졸혼 연습

SBS 스페셜 - 행복한 부부 생활을 위한 졸혼 연습 ⓒ SBS


앞서 < SBS 스페셜 >은 '이혼 연습- 이혼을 꿈꾸는 당신에게'(2015)를 통해 '가상 이혼 프로젝트'를 실시한 바 있다. 당시 배우 이재은 부부 등은 다큐에서 마련한 방식으로 이혼 생활을 미리 접해보고 서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2018년 5월 찾아온 <졸혼 연습>은 <이혼 연습>의 방식을 그대로 차용했다. 하지만 위자료, 재산 분할 등 현실적인 문제로 묵직해졌던 <이혼 연습>과 달리, 결혼이라는 제도의 외피를 완전히 벗어던지지 않은 '졸혼'답게, 결혼의 종료 연습은 한 편의 달콤 쌉싸름한 로맨틱 코미디와도 같다.

여기 남들에겐 한 쌍의 원앙으로 대접받는 부부가 있다. 바로 연기자 차광수씨 부부다. 결혼 생활 23년차, 남편에게 10첩 반상을 차려 대접하는 아내, 1년에 한번씩 해외 여행을 데리고 가겠다는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는 남편, 이들은 남들에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젊은 시절 잘 나가던 거문고 연주자의 꿈도 접고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스스로 90점짜리 아내라 평가해오던 강수미씨는 어느 순간 자신의 삶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남편의 아내, 한 아이의 엄마, 계속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이제라도 자신을 찾고 싶은 강수미씨 남편에게 당당하게 '졸혼'을 청한다.

자기의 삶을 되찾고 싶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진 배우자의 졸혼 요구에 배신감과 허탈함에 빠진 것도 잠시, '자유'라는 또 다른 카드가 차광수씨에게 손을 내민다. 결국 차광수씨는 독립된 인격체로서 서로를 인정하고, 각자의 삶은 인정하는 '졸혼' 계약서를 쓰고 '가출'한다.

다큐는 각자 홀로 살아보는 '졸혼' 연습의 혼란스러움과 시행 착오 장면과 함께, 실제 '졸혼'의 커플을 등장시켜 '졸혼'에 대한 생각의 폭을 넓혀준다. 자신의 삶을 모색하던 아내 강수미씨가 찾은 사람은 임지수씨.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그녀는 사업을 정리한 후, 평범한 아내의 삶을 택하는 대신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황무지였던 곳을 아름다운 정원으로 일궈냈다. 하지만 자유로운 그녀의 삶을 부러워하는 강수미씨에게 임지수씨는 여전히 고운 외모와 달리, 노동으로 거칠어진 손을 보여준다.

'졸혼'이라든가, '자신의 삶에 대한 로망'을 이어가려면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천착과 책임이 뒤따른다는 증거다. 임지수씨의 손을 본 강수미씨의 생각도 복잡해 진다. 막연히 남편의 시중을 들지 않아 졸혼을 하면 자유로워질 거라 생각했는데... 남편이 없는 삶 한켠엔 '책임'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졸혼도 쉽지 않다, 그렇다면 휴혼은 어떨까?

 SBS 스페셜 - 행복한 부부 생활을 위한 졸혼 연습

SBS 스페셜 - 행복한 부부 생활을 위한 졸혼 연습 ⓒ SBS


남편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내의 청소와 빨래에 대해 잔소리로 일관했던 남편이었건만, 막상 집을 나와 살아보니 그 별거 아니라던 일상이 버겁다. 차광수씨 역시 '졸혼' 선배를 찾아나선다. 파주에서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 중인 이안수씨. 그의 아내는 그와 떨어져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해왔으며 최근에는 정년 퇴직을 앞두고 자전거 여행에 이어 필리핀 어학 연수 중이란다. 평범한 직장 생활에 만족하지 못했던 이안수씨가 먼저 훌쩍 떠나면서 부부의 이별은 시작됐다. 이씨는 서로 각자의 삶을 인정하고 존중해주면서 부부간의 정과 사랑 더 돈독해졌다고 자신한다.

'졸혼'의 선배를 만난 뒤 차광수-강수미 부부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하던 강수미씨는 평소 좋아하던 베이킹을 시도해 본다. 막상 만들어 본 첫 번째 작품을 먹으며 강수미씨가 제일 먼저 떠올린 사람은 남편이다.

결국 부부는 '졸혼' 대신 잠시의 휴혼을 마치고 다시 한 집에 살기로 한다. 따로 또 같이 삶은 새로운 문화적 충격이었지만, 차광수씨는 아내 없는 일상을 상상할 수 없었다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잠시 떨어져 살았던 시간은 부부에게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손도 까딱 않던 남편은 아내를 위해 차를 준비하기까지 한다. 떨어져 있던 시간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며 일상의 시간마저 변화시킨 것이다. 이에 부부는 준비되지 않은 졸혼 대신, 부부가 서로를 마주볼 여유를 가질 수 있는 휴혼을 제안한다.

다큐가 보여준 건, '졸혼'조차도 사실상 여의치 않은 우리 사회 부부의 또 다른 대안이다. 이혼이 '위자료', '재산 분할'이라는 경제적 부담과 가정의 파탄이라는 부담을 짊어져야 한다면, 졸혼 역시 독립적 생활에 대한 쉽지 않은 선택이 따른다. 차광수씨나, 예능 <별거가 별거냐> 등장 인물들은 남은 한 사람에게 여유롭게 집을 양보하지만, 과연 배우자에게 어렵게 마련한 집을 줄 수 있는 부부가 얼마나 될까? 또 너무 오래 살아서 번거롭고 지겹지만 막상 결혼을 '졸업'할 용기를 내기가 역시 쉽지 않다. 그러기에 2018년 < SBS 스페셜 >은 졸혼에서 다시 한 발 물러서 '휴혼'을 제안한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가정'을 벗어던지는 건 쉽지 않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SBS스페셜- 행복한 부부 생활을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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