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라라 ~ 호쿠사이의 딸> 일드 SP

▲ <쿠라라 ~ 호쿠사이의 딸> 일드 SP ⓒ NHK



우리나라에서 18~19세기에 일본에서 활동했던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 北斎)'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무척 적을 것이다. 그러나 아래 그림을 보면 누구나 "아!"하고 단박에 알아볼 것이다.

책에서든 방송에서든 심지어 문구용품이나 생활용품 등에서도 일본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회화로 가장 많이 쓰이는 그림이다. 설령 작품의 장르나 제목은 모를지언정 이 그림을 못 본 사람은 없다. (참고로 작품의 장르는 우키요에[浮世繪]라는 풍속화이고, 제목은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神奈川沖浪裏]'이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일본화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 그림들의 원작자가 바로 가쓰시카 호쿠사이다.

일드 <쿠라라(眩) ~ 호쿠사이의 딸>은 바로 그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딸에 관한 이야기이다. 일본의 주요 3대 문학상 중 하나로서 나오키 상을 수상한 아사이 마카테의 소설이 원작이고, 2017년 9월에 sp(스페셜 드라마) 형태로 각색하여 방영되었다.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딸 역시 화가였는데, 드라마 속에서는 '가쓰시카 오에이'(葛飾 応為)란 이름으로 활동하며 자신의 아버지 밑에서 보조 작가 겸 제자로 일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일본이 근대화의 기로에 놓이기 일보 직전, 에도 시대 말기를 풍미한 어느 거장과 그의 딸의 이야기라는 것 자체만으로 이 sp는 다른 일본 드라마보다 조금은 더 '스페셜'하다고 볼 수 있다.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 神奈川沖浪裏

▲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 神奈川沖浪裏 ⓒ 도쿄 오타 기념 미술관


가쓰시카 호쿠사이와 그의 딸 우에이 일드 SP

▲ 가쓰시카 호쿠사이와 그의 딸 우에이 일드 SP ⓒ NHK


이른바 '일드 sp(스페셜 드라마)'는 1~2회 정도로 짧게 편성한 단막극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스페셜 일드 중에는 내용의 수준이나 영상미가 오히려 정규드라마보다 훨씬 나은 경우들이 꽤 많다. <쿠라라(眩) ~ 호쿠사이의 딸>은 그러한 명품의 전형이라 할만하다. 나오키상 수상작이니만큼 본래 스토리 자체가 농밀한 데다, 뛰어난 색감과 고급스러운 촬영 기법으로 화가의 작품들과 세계관을 아름답게 묘사했다. 만약 소리를 끈 채 감상하더라도 출연진들의 표정 연기와 쉴 새 없이 등장하는 그림들 덕에 마냥 흐뭇할 것만 같은 기분이다.

일본의 근대화는 회화가 시발점이었을지도 모른다

일본은 1854년에 개항을 하고, 1868년에 메이지 유신을 단행함으로써 나라 전체에 근대화를 추진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방식에 대해 비판, 고찰하고 문명국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새로운 시도를 감행하는 것이 근대화의 핵심 개념이라 치자면, 일본은 적어도 회화 영역에서만큼은 이미 근대화를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드라마 안에서도 잘 드러나 있듯이, 가쓰시카 호쿠사이는 원근법과 명암법 등 당시의 서양화법을 자신의 그림에 차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딸 오에이 역시 자신의 아버지를 좇으면서 서양화법 중 특히 명암법, 즉 '빛'에 집착한다. (드라마 제목에 '눈이 부시다/눈이 멀다'를 의미하는 眩[쿠라라]를 쓴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극 중에서 가쓰시카 호쿠사이가 네덜란드 거상에게 작품을 의뢰받고 공방의 제자들과 대량의 그림을 제작하여 판매하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일본 회화는 이미 이때부터 서양 세계에 그 존재를 알리고 입지도 구축했음을 알 수 있다.

가쓰시카 호쿠사이가 생을 마감한 시점이 1849년이니까, 가쓰시카 호쿠사이가 한창 자신의 화풍을 근대적으로 변모시킨 때는 아직 일본이 개항을 시작하지도 않은 시대였던 것이다. 실제로 일본의 우키요에는 유럽으로 건너가 고흐, 마네, 모네 등 당대의 인상파 화가들에게 대단한 '인상'을 심어줬다. 특정한 초점에 고정되지 않은 자유분방한 시점, 담대하고 다채로우면서도 정갈한 느낌의 채색들, 서양의 과학적인 원근법과 명암법을 일본 특유의 방식으로 구현한 일 등은 인상파 화가들에게 문화적인 충격이자 모방 동기를 부여했다.

밤의 카페 테라스 반 고흐

▲ 밤의 카페 테라스 반 고흐 ⓒ 크뢸러 뮐러 미술관


일본의 렘브란트를 꿈꾼 그녀, 호쿠사이의 딸

대가(大家, maestro)의 자식으로 산다는 것은 행운이면서도 불운일 수 있다. 오에이는 아버지의 재능을 존경하며 그의 모든 것을 본받고 싶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버지와 다른 본인 특유의 세계를 창조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린다.

그녀는 아버지와 다르게 유독 빛과 그림자에 관심이 많다. 아버지 호쿠사이도 당대 최신의 명암법을 활용할 줄 아는 화가였지만, 그의 딸 오에이가 추구하는 명암법은 훨씬 더 집요하고도 깊이를 추구하는 미지의 영역이다. 그녀는 빛이 어떻게 그늘을 만들어내는지 평생을 연구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밤을 배경으로 한 그림을 그리면서 빛을 표현하려 애쓴다. (드라마 포스터가 전반적으로 어두운 분위기 속에 미야자키 아오이만 도드라지게 제작한 것도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밤은 어둠을 상징한다. 어둠은 빛과 상극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밤에 보는 불빛은 역설적으로 낮의 빛보다 더욱 짙고 강렬하게 느껴진다. 명암의 대비는 어쩌면 낮보다 밤이 한층 극적일 수도 있다. 극 중에서도 우에노는 밤마다 요시와라를 찾는다. (요시와라는 당시 에도 최대의 유곽이다)

그녀는 그곳의 사람들과 풍경을 소재로 자신만의 명암법을 연습한다. 오에이가 남긴 그림들을 보면 설핏 렘브란트의 그림이 연상된다. '빛의 화가' 또는 '빛과 그림자의 마술사'라고 불린 렘브란트도 어둠 속에서 빛을 표현함으로써 극렬한 명암 대비를 추구했다. 그녀가 200년이나 앞서 살았던 렘브란트를 과연 알고 있었을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가 에도 시대 최후의 '빛과 그림자의 화가'로서 일생을 명암에 바쳤다는 사연만으로도, 렘브란트와 예술관만큼은 동지였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요시와라의 밤 풍경 가쓰시카 오에이

▲ 요시와라의 밤 풍경 가쓰시카 오에이 ⓒ 도쿄 오타 기념 미술관


일본 회화에 빛을 들인 자들

이 드라마는 호쿠사이의 딸의 일대기와 함께 아버지인 호쿠사이도 자세히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일석이조다. 드라마의 제목을 <호쿠사이'와' 딸>이라고 지어도 무방할 정도로 아버지와 딸의 면면이 적절한 분량으로 자연스레 섞여 있다. 이른바 근대 사회는 개인과 대중이 공동체의 주체로 부상하는 사회다. 우키요에 화가들은 서민들의 현실과 세상 자체를 사실대로 그려냈다는 면에서 근대화의 선봉장들이었다. 그 선봉장 중의 선봉장으로서 호쿠사이와 그의 딸이 어떻게 일본 회화의 미래에 빛을 들이려 했는지 알고 싶다면 이 일드를 추천한다. 드라마 1편을 보는 것으로 역사 칼럼 십 수 장은 읽은 가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일드 리뷰 쿠라라호쿠사이의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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