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2000)이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재개봉 했다.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대사로 유명한 이 영화, 그런데 정작 보았다는 사람은 많지 않다. 워낙 오래된 영화기도 하지만 무거운 분위기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무거운 분위기가 이 영화의 매력이다. 당신이 아는 것과는 조금은 다른 무거움이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한 번 관람해 보는 건 어떨까.
 
그에 앞서, 영화를 관람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몇 자 적어보려 한다. 
 
40대 언저리의 누추한 차림을 한 남자가 비틀대며 걸어온다. 저 멀리 야유회 중인 사람들이 보이고, 남자는 어느새 춤판에 끼어 산통을 깬다. 야유회 사람들 중 한 명이 남자를 기억해 낸다. "김영호! 너 김영호 맞지?" 그렇게 대학 동창을 찾아온 걸로만 보이던 영호, 동창들의 환대에도 여전히 실성한 듯 보인다. 그런 영호를 무시하고 즐겁게 놀던 동창들, 어느덧 기차 앞에 서서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치는 남자를 발견한다. 이후 화면이 멈추고, 기차는 시간을 거꾸로 달려간다. 
 
아마 당신은 어떤 경로로든 <박하사탕>을 접해 보았을 것이다. 영화의 시그니쳐라고 할 수 있는 "나 다시 돌아갈래!" 장면이나,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 두 가지 사실만 알아도 영화를 재밌게 관람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이면 조금 더 재밌다. 이 영화의 형식에 관한 이야기다.
 
이 영화는 일반적인 영화와는 달리 결말에서부터 시작한다. 영화가 시작하면 영호(설경구 분)가 기차에 치여 죽고, 이후 영화는 차례대로 영호의 과거를 보여준다. 1999년의 야유회부터 1979년의 소풍까지, 총 7번에 걸쳐 20년을 거슬러 오른다. 
 

 


플롯 상으로 도입부에 해당하는 1979년은 영호가 대학 동기와의 소풍에서 첫사랑 '윤순임(문소리)'을 만난 시기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20년이 지난 1999년에도 소풍 장소는 '대학 동기'가 '대학 동창'으로 바뀌었을 뿐 아무런 변함이 없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이 없다. 영호는 IMF로 파산해 동창회에 오지 않았고, 순임은 죽을병에 걸려 병석에 누워있다. 이 두 사람의 부재가 영화의 핵심이다. 
 
이 영화의 포스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첫사랑, 그 순수를 찾아가는 시간여행' 말 그대로, 이 영화의 표면적인 플롯은 시간여행이다. 영화는 영호와 함께 첫사랑 순임을 추억하며 영호의 과거를 보여준다. 영호의 삶은 갖은 고초로 얼룩져 있다. 그 고초 속에서 직업이 여러 번 바뀌고 아내와 이혼도 하지만,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건 첫사랑 순임뿐이다. 영화 포스터의 문구처럼 줄곧 '첫사랑'을 찾아가는 여행, 그런데 순수는 없다. 영호는 절대로 순수할 수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챕터6, 1980년의 영호는 어리바리한 신병이다. 편지를 주고받던 순임이 면회를 왔으나 비상이 걸려 만나지 못한다. 그렇게 영호는 군용트럭에 실려 어딘가로 향한다. 그곳은 5월의 광주다. 그런데 영호는 무언가에 억눌린 듯 벌벌 떨고 있다. 알고 보니 동료가 쏜 총알에 오른쪽 다리를 맞아 제대로 된 임무 수행이 불가한 상태다. 영호는 친한 선임이 도움을 요청할 동안 어느 소녀와 마주친다. 소녀에게 어서 도망치라며 소리치는 영호, 그때 선임이 요청한 지원병들이 몰려오고 다급해진 영호가 위협사격을 한다. 그리고 소녀는 총알에 맞아 즉사한다.
 
이창동은 이 부분을 통해 광주를 단지 피해자의 역사로만 만들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광주는 피해자들의 한이 서린 곳이지만, 영화는 군인들 또한 피해자라고 말한다. 
 
영호는 동료의 오발탄에 다리를 맞고 평생을 절게 된다. 반면 영호가 쏜 오발탄에 소녀는 죽고 만다. 이 시점부터 영호의 인격은 180도로 달라진다. 마치 소녀를 따라 죽고 싶은 것처럼, '영호'라는 이름을 지워버리려 하는 듯 보인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영호는 소녀에게서 순임을 겹쳐 떠올렸었다. 그리고 영호는 소녀를 살해하고 만다. 그 살해는 첫사랑 순임을 잊어버리려는 마음과 자신을 부정하려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영호는 군 생활 내내 편지를 보내주던 순임을 억지로 내쳐버린다. 영호는 그녀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그래서 순임은 광주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마치 없던 것처럼, 그녀와의 추억을 마치 없던 것처럼 여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이 영화의 포스터 문구에 따르면 순임은 첫사랑이자 순수고 그렇다면 광주도 첫사랑이자 순수다. 광주의 참상을 떠올려 보면 어처구니가 없는 문구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왜 광주는 첫사랑이자 순수인가. 혹은 광주는 어떻게 (영호의) 첫사랑이자 순수가 되었나. 
 
이창동은 소설가이자 각본가이기도 하다. 그런데 막상 그의 영화를 보면 소설이 아니라 시라는 느낌이 든다. 어떤 시가 은유를 즐겨 쓴다면, 이창동의 시는 환유를 사용한다. 은유와 환유는 비슷한 단어지만 미묘한 뉘앙스 차이가 있다. 은유는 전혀 다른 것으로 느낌을 대체하는 것이고, 환유는 연관성이 있는 것들로 느낌을 표현한다. 이를테면, 은유는 딸기와 여자아이를 놓고 '새침함'을 표현하는 것이고, 환유는 딸기와 여자아이를 놓고 '주근깨'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제 광주와 첫사랑을 대조해보자. 
 
첫사랑은 돌아올 수 없는 추억이다. 가슴 속에 묻어두어야 한다. 그런데 영호는 첫사랑을 잊지 못해 끝내 이혼하고 만다. 그리고 어느 날, 불현듯 첫사랑의 남편이 자신을 찾아와 그녀가 병중이라는 소식을 전한다. 영호는 알고 싶지 않았고 알아서는 안 될 순임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렇지만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 영영 소식을 듣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니 찾아갈 수밖에 없다. 
 
광주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다. (가해자의 입장에선) 가슴 속에 묻어두어야 한다. 그런데 영호는 광주를 잊지 못해 끝내 미쳐버린다. 그리고 영호는 철로 위에서 자살한다. 
 
둘 다 영호에게 먼저 다가왔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첫사랑은 만나려 갈 수밖에 없고, 80년 광주는 더는 찾아갈 수 없는 곳이다. 즉, 두 단어는 환유의 관계다. 
 
우리는 순수했던 영호가 군인 신분으로 살해를 저지르고 전두환 정부 아래 형사로서 고문에 가담하는 과정을 지켜본다. 손을 털고 열심히 살아보려 해도 IMF로 폭삭 망해버린다. 결국 영호의 첫사랑은 상처 입은 현대사다. 순수했던 것들이 서서히 더럽혀진다. 현대사도, 순임도, 영호도. 현대사가 영호를 미치게 만들고 영호는 점점 피폐해져 간다. 영호가 피폐해지는 만큼 순임도 병으로 죽어간다. 그것들은 돌아갈 수 없는 과거다. 
 

 


영화의 마지막 챕터. 영화상으로 결말이지만 영호의 젊은 시절에 해당하는 장면에서 영호는 "익숙한 장소네. 마치 와봤던 것처럼"이라고 말한다. 영호는 '익숙하다'라는 말로 영화의 첫 장면으로 돌아간다. 그러니 이 영화는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 순간에 주마등처럼 떠올리는 장면들이다. 마지막 챕터의 영호는 첫 장면에서 이미 죽었던 그 영호다. 즉, 영호는 물리적으로는 아니어도 심적으로는 시간여행에 성공한 것이다. 다 큰 어른이 사회의 쓴맛에 질려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것처럼, 회귀 혹은 퇴행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이 영화의 도입부를 볼 때, 야유회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리고 철로 위에 서서 "돌아갈래!"를 외치는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보인다. 그쯤에서 우리는 이 영화의 결말이 새로운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해보게 된다. 퇴행된 결말 부분에서 퇴행된 시작 부분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영호는 이 영화의 끝과 시작을 영영 반복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말 그대로, 20년 속에 갇혀 버렸다. 그건 첫사랑과의 만남부터 죽음까지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그건 광주의 참상을 줄곧 잊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7개 챕터를 따라 시간을 거슬러가는 기차를 본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마치 앞으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 철로는 앞인지 뒤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이것은 반복이다. 가장 만나고 싶었고 가장 잊고 싶었던 '첫사랑' 혹은 '광주'는 영영 '반복'된다. 이것은 이창동의 비관론이다. 우리 사회가 그 아픔 속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창동은 이 영화를 환유로써 만들었다. 이 사건과 인접한 것들이 무척 많다. 무엇이든 말이다. 
 
마찬가지로 시간 아래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들이 있다. 그걸 기억해야 한다면 기억해야겠지만, 자연의 섭리대로 흘러가도록 놓아 주어야만 하기도 한다. 그것은 선택이다. 반면 <박하사탕>에는 선택하지 못하고 선택을 강요받는 남자가 있다. 어딘가의 군인이었고 어딘가의 형사였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그는 개를 걷어찰 정도로 싫어한다. 그 모습을 보며 울부짖는 아내의 말은 덤이다. "그렇게 때릴 거면 차라리 죽여" 남자는 때리기만 할 뿐 죽이지는 못한다. 그게 죽은 자가 죽음을 상대할 수 없다는 뜻인지, 혹은 자기 자신을 개로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깨갱댈 뿐이다. "나 다시 돌아갈래!"하면서. 
 

 
영화 이창동 박하사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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