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작품 포스터

영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작품 포스터 ⓒ 라이크콘텐츠


1.

'지구는 둥글다. 그러니 줄곧 앞으로 나아가면 온 세상 사람을 모두 만날 수 있다'라고 말하는 어린이 동요가 있다. 이 노래의 가사가 비관론인지 낙관론인지는 잘 모르겠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물론 만남은 늘 새로운 것이기는 하다. 그리고 그 새로움 속에 가능성이 있다. 인연이라는 단어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이때 우리는 만남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행여나 나쁜 사람을 만날지도 모르는 불안감에 가만히 있으면 바보가 되는 것일까? 그렇지만 혹시나 모를 사태를 예방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다. 사람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이므로.

모리미 토미히코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일단 걸어보라 권한다. 동요의 가사처럼 일단 걷고 또 걷게 되면 인연이 생기고 필연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작품이 교훈적이냐고 묻는다면 '아니다'라고 단언할 수 있다. 유아사 마사아키의 필체와 모리미 토미히코의 원작이 합쳐진 결과는 무척 괴멸적이다. 애니메이션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 '괴멸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건 그만큼 이 영화가 'B'의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다. B급 영화라는 게 특정 마니아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을 고려해보면, 당신이 이 영화를 좋아할지 아닐지는 제목만 보고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말해두자면 이 영화의 제목은 어떤 이상한 일본 영화들을 떠오르게 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나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가 대표적이다. <불량소녀, 너를 응원해!>나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도 있다. 우리는 이 영화들이 모두 '원작소설'이 있다는 걸 안다. 그리고 이런 이상한 제목 짓기 유행은 쏟아져나오는 신간 사이에서 '선택'받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제목이 작품의 수준과는 별 상관없다는 걸 알게 된다. 그저 이런 부류의 제목은 일본영화일 것으로 지레짐작할 뿐이다.

분명 일본 영화에는 기저 아래에 흐르는 감정선이 있다. 그게 금광인지 탄광인지는 개인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금광도 탄광도 아니다 일본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만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좋아할 것도 아니다. 다만 이상한 제목에 끌려 이 영화를 보게 된다면 어느새 엔딩 크레딧 앞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영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한 장면

영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한 장면 ⓒ 라이크콘텐츠


2.

다른 의미로 복잡한 내러티브 구조를 가진 이 작품은 여러모로 무의식의 흐름에 의존한다. 도입부에서 조용한 바에서 술을 마시던 여자 주인공은 홀연듯 다른 사람의 '잔치'에 참석한다. 그리곤 디즈니 풍의 춤추는 장면이 나온 후 '이백'이라는 '이태백'의 패러디 인물이 등장해 술대결을 벌인다. 그때 남자 주인공은 이백에게 속옷을 빼앗겨 하반신 나체로 숨어다닌다.

장면이 바뀌고 대학교 축제 사무국장이 남자 주인공을 돕겠다고 정보를 전해준다. 우습게도 사무국장은 평소 자신이 학생들의 정보를 모두 수집하고 있다며 컨트롤 타워로 데려 온다. 이 사무국장은 축제 분위기를 해치는 '게릴라 연극단'을 막으려 하고, '게릴라 연극단'은 캠퍼스 여학우에게 반했지만 말을 걸지 못해 다시 만날 때까지 팬티를 벗지 않는 '빤스총반장'(작중 별명)이 여학우를 찾기 위해 만든 각본을 공연한다. 그때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이 어린 시절 읽었다는 소설을 중고 책 시장에서 구매하려 이백이 벌이는 내기에 참가하고 있다.

작품의 서사는 지구 한 바퀴 돌며 새로운 사람을 만나듯 경쾌한 발걸음을 쫓는다. 이름이 나오지 않는 두 주인공의 이야기는 혼잡한 인파 속에서 맺어질 듯 말 듯 진행된다. 제목이 이상하지만 분명 '로맨스'가 맞다. 그것도 청춘을 다루는 '대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그렇지만 로맨스라기보단 판타지에 가깝다. 말도 안 되는 우연을 다루기 때문이 아니다. 작품이 내세우는 건 여자 주인공을 짝사랑하는 남자 주인공의 환상이다. 그 사실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며 '사랑의 판타지'란 이런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게 된다.

풍류(風流)나 청춘(靑春)이라는 단어를 가장 잘 보여준다. 혹은 취기, 패기, 혈기다. 영화는 낯선 술자리부터 대학생들의 축제와 중고 책 시장을 동시에 보여준다. 분명 이 장소들은 한줄기의 연관도 없다. 그러나 여자 주인공이 돌아다닌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니 그녀를 좋아하는 남자 주인공도 함께다. 여자 주인공이 좋아하는 책을 위해 매운 음식 내기에 참가하고, 게릴라 연극단에 대타로 오른 여자 주인공의 상대 배역을 하기 위해 사무국장보다 먼저 현장에 도착하고.

분명 두 주인공이 겪는 어처구니없는 사건들이 비현실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청춘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는 별 이상할 것도 없다. 어쩌면 애니메이션이라는 이름으로 치부했던 작품의 상상력이 젊은 시절 나에게도 있었음을 잊은 건 아닐까.

술로 시작해 병으로 끝나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건 당연하게도 취중진담이다. 게릴라 연극단의 입을 빌려 흘러나오는 노래는 극단의 성격이나 극의 내용이나 젊음이 흘러넘친다. 자신은 삶의 국외자이나 그녀는 삶의 주연이라는 남자 주인공의 비관론도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작품에서 그녀는 정말로 세상 행복한 것처럼 보이나 오히려 남자 주인공의 환상에 불과할 테다. 우리는 타인의 좋은 면만을 본다는 걸 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볼 때도 세상 행복해 보인다 여길 테다. 밤새도록 여기저기를 걷는 그녀에게도 슬픔이 있고 고민이 있을 테다. 단지 그가 그녀를 올려다보기에 행복의 단면만을 보는 것이다.

 영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한 장면

영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한 장면 ⓒ 라이크콘텐츠


3.

청춘은 고민이 많다. 누구는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데 누구는 청춘 예찬론을 펼친다. 그리고 늘 그렇듯 이분법은 매력적이다. 이분법대로라면 내가 하는 생각은 타인과는 정반대다. 그렇다면 취업을 하고 청춘이 아니게 되면 행복해지는 것일까. 왜 다른 친구들은 잘나가는 걸까. 그 혹은 그녀는 왜 나를 사랑하지 않을까. 여기까지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해볼 법한 생각이다.

작품의 전체 서사는 대학생이라면 빠질 수 없는 두 요소 '연애'와 '술'로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작품이 보여주는 이분법의 세계에 빠져든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계'에 빠져든다는 게 맞을 것이다. 작품에는 부자연스러운 이분법의 구도가 '자연스럽게' 유화된다. 그건 마치 남녀가 몸을 섞듯이 아름답다. 어쩌면 '부'자연스럽다고 단정 짓는 것조차 실언일지도 모른다.

세상 걱정 없는 듯 사는 여자 주인공의 시계는 무척 느린 데 반해 노인들의 시계는 무척 빠르다. 그렇지만 그들은 모두 술자리에서 어울린다. 술자리의 시간은 도끼 자루 썩는 듯 흘러가며, 그녀는 술 취한 틈을 타 성추행을 일삼는 남자조차 관대하게 용서해준다. 용서와 별개로 내지르는 주먹 또한 만화적 연출로 포장되고 술고래인 그녀는 술자리 이곳저곳을 불러 다녀도 말짱하다. 그 과정에서 유독 걷고 걷는 모습이 반복되는 건 어린이 동요처럼 온 세상 사람을 만나겠다는 출마의 변처럼 보인다. 그들이 휘청휘청거리는 건 만화적 연출인지 취기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중요한 건 남녀노소, 사상이나 사고는 관계없이 하나로 뭉치는 건 다름 아닌 술이라는 점이다.

낮에는 사채업자지만 밤에는 풍류를 즐기는 이백은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신다. 그에게 음주는 망각이다. 반면 그와 대결하는 여자 주인공에게 술이란 기억이다. 술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행복해진다. 두 사람이 술대결을 할 때 이백의 배경은 검고 여자 주인공의 배경은 하얗다. 그 단순한 흑백에 이분법이 담겨있고, 작은 술잔에는 화합이 담겨 있다. 작품에서 묘사하는 이분법이란 양 갈래가 아닌 사물 자체에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술을 먹고 개가 되느냐 혹은 고래가 되느냐가 아닌, 술이라는 신의 선물 '넥타르'인 것이다.

 영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한 장면

영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한 장면 ⓒ 라이크콘텐츠


4.

여자 주인공과의 술대결에서 이백이 술을 왜 마시냐고 묻는다. 그러자 여자 주인공은 "모두가 이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라고 답한다. 인연의 실, 무스비다. 마찬가지로 남자 주인공 또한 여자 주인공과 자신은 '운명'이라며 그걸 '필연'으로 바꾸어 보겠노라 다짐한다. 작품은 끝날 때까지 줄곧 그에 대해 역설한다.

그러니까 사실은 우연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사람은 모두 인연의 실로 이어져 있다. 앞서 노래했던 것처럼 지구는 둥그니까 계속 걷는다면 모든 사람과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작품의 제목이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이다.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이 대사는 이백이 여자 주인공에게 한 것이다. 그는 노인이고 그녀는 젊은이이니 그건 꽤 역설적이다. 밤이라면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낮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가 올바른 표현이 아닐까. 그러나 재밌게도 음주는 주로 밤에 이루어진다. 우리 모두가 암묵적으로 그것에 동의한다. 아마 일과를 마치고 회포를 푸는 게 밤이기 때문이리라. 중요한 건, 삶이 밤에 접어들었다고 해서 즐기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밤이 짧으므로 더욱 걸어야만 하는 것이다. 뛰는 건 어떻겠냐고 묻지는 말자. 뛰면 숨차니까.

운명이라기보단 숙명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작품 중반에 중고 책 시장 시퀀스에는 '헌책 시장의 신'이라는 꼬마가 등장한다. 말 그대로 신이지만 전혀 신 같지 않은 행동을 보여준다. 책의 가격표를 떼고 남자 주인공을 골탕 먹인다. 그렇지만 그는 분명 이렇게 말한다.

첫째, 수집가가 헌책을 독점한다면 그 책이 필요한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둘째, 모든 책은 이어져 있다.

후자의 대사는 책의 저자와 그 책의 저자와 엮인 사람이 지은 책을 줄줄이 읊는 것이다. 그건 말 그대로 '이어져 있다'라는 것이고, 첫째 대사의 숙명성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책끼리 이어져 있다면 그 책이 '반드시' 필요한 누군가는, 다른 책이 필요한 누군가와도 이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한 장면

영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한 장면 ⓒ 라이크 콘텐츠


5.

작품 초반에 여자 주인공을 성추행했던 인물은 진성 변태로 묘사된다. 그는 춘화를 수집하고 그것으로 이백에게 빚을 탕감하고 있다. 물론 그런 그에게도 사연이 있다. 비단 잉어 수족관을 하던 중 태풍에 가게가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당연하게도 성추행을 옹호하는 성격의 사연은 아니다. 그는 어느 누구에게나 이면이 있다고 말한다. 술에 취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는 멀쩡하다. 그는 살기 위해 춘화 같은 걸 모으게 되었노라 한탄한다.

그렇다면 술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아주 단순한 것에서부터 우리는 아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다. 그런데 이야기는 보란 듯 흘러가버린다.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그저 그런대로 두라는 듯 말이다.

사소하게 태클 걸 곳이 많다. 그러나 스쳐 지나가는 대사 하나에 '지구 한 바퀴'의 포용이나 비판할 새도 없는 시간이 주어진다.

첫 번째로 축제 사무국장의 존재가 있다. 일단 그가 절대적 감시자로 군림하는 것을 제하고도 그에게는 게릴라 연극을 막을 만한 이유가 없다. 게릴라 연극은 오히려 축제에 열기를 돋군다.

두 번째로 게릴라 연극의 존재가 있다. 게릴라 연극은 '빤스총반장'이 여학우를 찾기 위해 기획했는데 극 내용은 오히려 '찾기'와 동떨어져 있다. 단지 최종 공연에서 노래로 고백할 뿐이다.

전에 학교 축제에서, 하늘에서 떨어진 사과 더미에 함께 웃은 건너편의 여학우를 짝사랑하게 된 빤스총반장의 이야기는 무척 재미있다. 재미도 재미지만 어렴풋이 낭만적이기도 하다. 일본 축제 묘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과 사탕'의 달달함이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당연하게도 사과 사탕이 아니라 '우연한' 상황이 짝사랑을 만들었다. 그 우연은 사과가 아니라 생선이었어도 반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최종 공연에서 갑작스레 난입한 '여장' 상태의 사무국장에게 반한 빤스총반장은, 갑작스레 하늘에서 날아온 잉어 더미를 맞고 무대 건너편에서 자신을 짝사랑해오던 다른 학우와 눈이 맞는다. 물론 여기에 태클을 걸면 안 된다. 그것은 그저 '이어져 있다'는 한마디로 족하다.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영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한 장면

영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한 장면 ⓒ 라이크콘텐츠


6.

사실 맹목적인 운명론자는 꽤 믿음직하지 못하기도 하다. 모든 게 운명이라는 이름 아래 쓰인다면 어떤 노력도 의미가 없어진다. 숱한 사랑영화가 어이없게 느껴진다면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운명의 힘을 남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영화라면 보다 깊은 곳에 중점을 둔다. 그건 애니메이션이 꿈의 매체이기도 하지만 영화 전체가 술에 취해서 일지도 모른다. 오직 남자 대학생이라는 청춘에게만 느낄 수 있는 객기와 허세가 우리 주변에 흔해서 일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건 무엇일까. 청춘이 사랑을 이루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 눈을 떠보면 집에 와있는 기억절단 음주가무의 힘? 아니다. 밤이 되었다고 해서 포기하지 말고 일단 걸으라는 것이다. 뛰든 걷든 일단 밖으로 나가 운명을 향해 달려가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유명한 말도 있지 않는가. 기회는 잡는 자의 것이라고.

영화 유아사 마사아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