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남도에서 목련은 3월 중순에 피었다가 4월 초순에서 중순이면 진다.
 남도에서 목련은 3월 중순에 피었다가 4월 초순에서 중순이면 진다.
ⓒ 최진수

관련사진보기


해마다 오월은 다시 오고

남도에서 목련은 3월 중순에 피었다가 4월 초순에서 중순이면 진다. 자줏빛 목련도 있지만 목련은 흰빛이 제 빛이다. 나는 목련을 볼 때마다 이제 곧 오월이겠구나, 한다. 그리고 이내 시 한 편을 떠올린다. "목련이 지는 것을 슬퍼하지 말자"로 시작하는 박용주의 오월 시'목련이 진들' (1988)이다.

목련이 지는 것을 슬퍼하지 말자
피었다 지는 것이 목련뿐이랴
기쁨으로 피어나 눈물로 지는 것이
어디 목련뿐이랴
우리네 오월에는 목련보다
더 희고 정갈한 순백의 영혼들이
꽃잎처럼 떨어졌던 것을

해마다 오월은 다시 오고
겨우내 얼어붙었던 이 땅에 봄이 오면
소리 없이 스러졌던 영혼들이
흰빛 꽃잎이 되어
우리네 가슴속에 또 하나의
목련을 피우는 것을

그것은
기쁨처럼 환한 아침을 열던
설렘의 꽃이 아니요
오월의 슬픈 함성으로
한 닢 한 닢 떨어져
우리들의 가슴에 아픔으로 피어나는
순결한 꽃인 것을

눈부신 흰빛으로 다시 피어
살아 있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고
마냥 푸른 하늘도 눈물짓는
우리들 오월의 꽃이
아직도 애처로운 눈빛을 하는데
한낱 목련이 진들
무에 그리 슬프랴


박용주는 이 시를 1988년 4월에 써 그해 전남대학교 용봉편집위원회에서 주관하는 '오월문학상'을 받는다. 놀랍게도, 그때 그의 나이 열여섯, 전남 고흥 풍양중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박용주가 풍양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낸 시집이다. 〈목련이 진들〉을 비롯하여 〈하늘〉, 〈정님이〉처럼 주옥같은 시를 볼 수 있다. 시집 발문에서 임헌영은 이런 말을 한다. “박용주의 조숙성은 그 개인의 몫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시대가 강제로 만든 것이라는 편이 옳을지 모른다.” 임헌영의 말처럼 그의 시에서는 〈가정환경 조사서〉, 〈시골 아이들〉, 〈우울한 날에는〉을 빼고는 청소년 시기의 감수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어린 나이에 민족의 앞날과 민주주의와 통일을 노래했던 것이다.
▲ 박용주 시집 《바람찬 날에 꽃이여 꽃이여》(장백, 1990) 표지 박용주가 풍양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낸 시집이다. 〈목련이 진들〉을 비롯하여 〈하늘〉, 〈정님이〉처럼 주옥같은 시를 볼 수 있다. 시집 발문에서 임헌영은 이런 말을 한다. “박용주의 조숙성은 그 개인의 몫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시대가 강제로 만든 것이라는 편이 옳을지 모른다.” 임헌영의 말처럼 그의 시에서는 〈가정환경 조사서〉, 〈시골 아이들〉, 〈우울한 날에는〉을 빼고는 청소년 시기의 감수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어린 나이에 민족의 앞날과 민주주의와 통일을 노래했던 것이다.
ⓒ 장백

관련사진보기


보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아 혼자 울었습니다

박용주는 1973년 광주에서 나고 1980년 광주 서석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광주 오월을 겪은 것이다. 1986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 금남중학교에 입학하는데 얼마 안 되어 학교를 그만둔다. 1987년, 전남 고흥으로 집이 이사를 가고 그곳 풍양중학교에 다시 입학하는데, 그 이듬해 1988년 2학년 때 전남대학교 '오월문학상'에 응모해 대상을 받는다. 그리고 1989년 그의 첫 시집 <바람찬 날에 꽃이여 꽃이여>(장백)가 세상에 나온다. 박용주는 시집 앞에 제법 긴 머리말('글을 내면서')을 써 붙인다.

가위 눌린 듯 가슴이 답답하고 끝없는 좌절만이 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슬프고, 외롭고, 이런 조금은 달콤한 감정을 느끼기에 앞서 힘겨운 생존이 먼저였을 때의 막막함과 칙칙한 절망감은 꿈에라도 다시 생각날까 두렵습니다.
갑작스런 환경의 뒤바뀜은 그런대로 참아낼 수 있었지만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이었습니다. 날짜 지난 신문 한 장이라도 눈이 띄면 음미하듯 아껴 읽었고 백지에 글자가 인쇄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읽었던 때, 나는 보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아서 가끔 혼자 울었습니다. (...) 학교마저 쉬어야 하는 절박한 생활 속에서 86, 88의 신화는 또 하나의 아픔이었습니다. (...) '문학'이라는 어려운 이야기는 꿈도 못 꿨고 알지도 못할뿐더러 시인이 되고 싶다는 기대도 바람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나처럼 어려운 사람들, 허기로 쓰러져 본 적도 있는 가슴 추운 사람들, 정님이 같고 김노인 같은 쓸쓸한 사람들에게 한 번쯤 읽혀질 수 있다면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전남 순천 효천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찍은 사진인 듯싶다.
▲ 1990년 박용주 모습 전남 순천 효천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찍은 사진인 듯싶다.
ⓒ 아침

관련사진보기


"86, 88의 신화"는 86아세안게임과 88올림픽을 말한다. 그 무렵 전두환 군사정권은 우리나라가 아세안게임과 올림픽을 치를 만큼 국력이 올랐고, 이 두 행사를 잘 치르면 곧 선진국이 될 것인 양 광고를 하던 때이다. 그런데 그때 그는 "학교마저 쉬어야 하는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었고 "허기로 쓰러"지기도 했다. 위 구절을 보면 1986년 학업을 중단한 것도, 고흥으로 이사를 가게 된 것도 집안 사정 때문인 것 같다. 어린 소년은 "끝없는 좌절"과 "막막함과 칙칙한 절망감" 속에서 언제나 "생존"을 먼저 생각해야 할 처지였다. 그래서 "보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아서 가끔 혼자 울었"다고까지 한다.

아버지를 망월동 묘역에 모시고
 
그는 머리말에서, "편모슬하, 결손가정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어 조금의 잘못도 내게는 허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시에는 어머니가 자주 나온다. 그런데 아버지를 노래한 시는 '하직인사' 한 편 말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하관을 하고 마지막 절을 올릴 때 / 나는 일곱 살, 동생은 두 살이었지요 // 묘역 곳곳에 빨갛게 피어난 사루비아와 / 자꾸만 주먹으로 눈물을 훔쳤던 기억이 / 아버지와의 마지막이었지요 (...) 청명한 구월 그날의 하늘은 / 별나게 푸르러 눈부셨지요 // 나는 아버지를 망월동 묘역에 묻고 (...) 올 때마다 가슴에 쌓이는 것은 설움이요 / 돌아서는 발걸음은 납덩이인데 (...)" (1989년 2월)

그가 일곱 살 때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만으로 '일곱 살'이라면 세는나이로는 여덟 살이고 1980년이다. 시에서는 망월묘지 곳곳에 샐비어가 빨갛게 피어난 "청명한 구월"에 "아버지를 망월동 묘역"에 모셨다고 한다. 샐비어 꽃은 7월 하순부터 가을 서리가 올 때까지 볼 수 있다. 그렇다면 5월이 아니고 9월이 맞기는 하지만 '목련이 진들'을 비롯하여 그의 모든 시가 암울한 80년대를 노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버지의 죽음과 1980년 5월이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망월묘지가 광주시에서 관리하는 공동묘지이기 때문에 80년 5월과 아무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박용주의 첫시집 《바람찬 날에 꽃이여 꽃이여》 표지 그림은 이철수 판화가의 작품이다. 판화 제목이 시집 제목이 되었다.
▲ 이철수의 판화 ‘바람찬 날에 꽃이여 꽃이여’ 박용주의 첫시집 《바람찬 날에 꽃이여 꽃이여》 표지 그림은 이철수 판화가의 작품이다. 판화 제목이 시집 제목이 되었다.
ⓒ 이철수

관련사진보기


그는 그 뒤로 시를 쓰지 않았다

전남대학교 오월문학상을 심사한 김준태 시인은 박용주 시를 이렇게 평가한다.

작품의 내용, 작품의 형식은 가히 놀라웠으며, 만약 그 작품들이 진정 중학생의 작품이라면 우리는 해방 후 비로소 천재 시인을 만났음을 말할 수 있으리라. 자아, 보라. 5월을 얼마나 절실하게 읊고 있는가를!
 
그때만 하더라도 전남대학교 오월문학상은 주로 전국 대학생들이 응모를 했다. 그런데 1988년 시골 한 중학생이 응모하고, 또 당당히 당선작으로 뽑혔다. 아주 놀라운 사건이었다. 전남대학교 과학생회실에는 대자보에 매직으로 쓴 그의 시가 붙었고, 읽는 이마다 "놀랍다!" "감동이다!" 같은 말을 한마디씩 했다. 오월 관련 시민단체 어른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몇 해 전 어느 카페에 이 시를 올린 적이 있는데, 한 회원이 이런 댓글을 달았다.

제가 박용주를 처음 알게 된 것도 어린 나이인데, 박용주 시집을 가방에 넣고 전남으로 가는 기차를 타려고 했어요. 첫 가출 결심을 박용주 시인 때문에 한 거죠. 가서 밥을 지어 주며 살고 싶었어요. (그땐 밥 짓는 방법도 몰랐지만) 누군가의 시를 읽고 그 사람에게 시집가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지요. 지금도 우리 집 책장 어딘가에 시집이 있을 텐데. 오랜만에 이 시를 읽으니 가슴이 짠하네요. 이후 그의 다른 시가 나오기를 무척 기다렸는데 소식이 없더군요.
 
시를 공부하고, 시를 쓰는 중·고등학생들에게도 박용주는 널리 알려졌다. 중·고등학교에서 문예반을 지도하는 선생님들은 오월문학상 당선작 '목련이 진들'을 복사해 읽어 주었고, 그 이듬해 시집 <바람찬 날에 꽃이여 꽃이여>가 나왔기 때문에 손쉽게 그의 시를 읽을 수 있었다. 아마 이분도 그때 박용주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분의 말처럼 그는 더 이상 시를 쓰지 않는다.

첫 시집을 내고 넉 달 뒤 순천 효천고등학교 1학년 때 낸 두 번째 시집이다. 박용주는 시집 끝에 ‘책을 내면서’를 붙이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있다. “어머님은 유난히 안개를 좋아하셨습니다. 소리 없이 내려쌓이는,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짙은 안개 속에 있노라면 왠지 포근하고 편안한 느낌이 든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부대끼고 사는 것에 지친 어머니에게 안개만이 위안이 된다는 것이 슬펐습니다.” 그는 어머니에게 “안개처럼 포근하고 편한 글을 써 드리고” 싶었다고 한다.
▲ 박용주 시집 《우리 다시 만날 날》(아침, 1990) 표지 첫 시집을 내고 넉 달 뒤 순천 효천고등학교 1학년 때 낸 두 번째 시집이다. 박용주는 시집 끝에 ‘책을 내면서’를 붙이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있다. “어머님은 유난히 안개를 좋아하셨습니다. 소리 없이 내려쌓이는,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짙은 안개 속에 있노라면 왠지 포근하고 편안한 느낌이 든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부대끼고 사는 것에 지친 어머니에게 안개만이 위안이 된다는 것이 슬펐습니다.” 그는 어머니에게 “안개처럼 포근하고 편한 글을 써 드리고” 싶었다고 한다.
ⓒ 아침

관련사진보기


이제 그의 나이 마흔여섯
 
흰 목련꽃은 눈에 잘 띄지 않아 마음 써서 안 보면 꽃이 피었는지 안 피었는지 모르고 지나칠 때가 많다. 핀다는 말도 없이 피었다가, 진다는 말도 없이 지는 꽃이다. 우리 민중들의 삶이 그렇고, 1980년 5월 광주 사람들이 그랬다. 어느 날 그 순하고 착한 사람들이 총을 들었다. 하지만 정치군인들처럼 권력을 잡기 위해 총을 들지는 않았다. 그들처럼 총을 무기 삼아 강도짓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들었을 뿐이다.

해마다 목련이 피고 5월이 다가오면 광주 5·18 관련 단체 사람들은 그를 그리워한다. 하지만 그는 어린 시절 시집 두 권을 내고 홀연히 광주를 떠났다. 오는 5월 18일은 5·18광주민주화운동 38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 국립5·18민주묘지 오월 영령 앞에서 어른이 된 박용주가 어린 시절에 쓴 '목련이 진들'을 낭송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을 해 본다. 이제 그의 나이 마흔여섯이다. 30년 전 중학교 2학년 때 쓴 시를 마흔여섯 그의 목소리로 듣고 싶은 이는 아마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1992년 박문옥은 박용주의 〈목련이 진들〉에 곡을 붙인다. 이 노래는 그의 음반 ‘양철매미’ 첫 번째 곡이고, 지금 바로 유튜브에서 검색하면 들을 수 있다.
▲ 박문옥의 음반 ‘양철매미’ 1992년 박문옥은 박용주의 〈목련이 진들〉에 곡을 붙인다. 이 노래는 그의 음반 ‘양철매미’ 첫 번째 곡이고, 지금 바로 유튜브에서 검색하면 들을 수 있다.
ⓒ 박문옥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광주드림에도 보냅니다.



태그:#박용주, #목련이진들, #바람찬날에꽃이여꽃이여, #우리다시만날날, #김찬곤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이 세상 말에는 저마다 결이 있다. 그 결을 붙잡아 쓰려 한다. 이와 더불어 말의 계급성, 말과 기억, 기억과 반기억, 우리말과 서양말, 말(또는 글)과 세상, 한국미술사, 기원과 전도 같은 것도 다룰 생각이다. 호서대학교에서 글쓰기와 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고, 또 배우고 있다. https://www.facebook.com/childkls

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