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의 작품 포스터

영화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의 작품 포스터 ⓒ 미디어캐슬


1.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는 특이하다

유아사 마사아키의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는 특이하다. 물론 그의 애니메이션 작화가 특이한 것이 사실이나 지금은 그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다소 원론적이지만 작품에서 인물들이 겪는 일련의 사건들이 거대한 쓰나미를 떠오르게 하며, 그 부분에 있어 화법이 다르다고 말하고 싶다.

작품은 인어가 사람을 해친다는 어느 마을의 민담을 바탕으로 한다. 결말이 닥칠수록 마을은 서서히 물바다가 되고 만다. 주인공이 친구들과 함께하는 밴드의 이름은 'SEIREN'이며, 인어 '루'와 주인공 '카이'가 협심해 사람들을 구하게 된다. 그러니 어떤 사건에 빗대어 이 작품을 풀이해도 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나 감독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굳이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원래는 인어가 아니라 늑대인간으로 기획했던 것이라고도 말했다. 작품의 플롯을 유지하며 캐릭터만 바꾸었고, 그 흔적은 빛을 싫어하는 인어라는 설정으로 남아있다. 즉 물을 소재로 했기에 인어가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의 플롯은 재난이 아니라 '재난을 바라보는 시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작품을 어떻게 볼지는 개인의 소관이지만 그럼에도 감독의 의도를 존중했을 때 꽤 흥미 있는 지점이 몇몇 있다. 그리고 그 지점들은 이 작품이 비판받을 수 있는 요인이기도 하다.

그 부분을 언급하기에 앞서 먼저 기존의 작품들이 어떤 성향이 있었는지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최근 몇 년간 일본의 작품들은 마치 집단 최면에 동조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이른바 '재난'의 플롯이 답습되고 변용된다. 일단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너의 이름은>을 보자. 도시는 멋들어지고 시골은 후미지다. 이때 후미진 시골은 파괴의 위기를 맞고, 멋들어진 도시가 그것을 막아낸다. 대부분 평자가 이 부분에서 여성의 타자화를 지적하지만 무엇보다 이 글에서는 '시골의 타자화'에 중점을 두고 싶다.

 영화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의 한 장면

영화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의 한 장면 ⓒ 미디어캐슬


<너의 이름은>에서도 그렇고 이 작품에서도 시골은 젊은이들에게 감옥처럼 작용한다. 아이들은 도시로 가서 학업을 하거나, 데뷔하는 등의 꿈이 있다. 반면 기성세대는 그런 젊은 세대를 이해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보수와 진보의 상반됨이며 이것은 재난에 대처하는 자세로 나타나게 된다. 기존의 체계에 포함되어 있지 않던 누군가를 만나게 되고, 그에게 손을 내미는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와 대립하며, 끝내 누군가와 결탁한 젊은 세대가 모두를 구하게 된다.

로맨스를 표방하는 두 작품, <목소리의 형태>와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또한 위의 플롯과 동일하다. 일단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에서 죽어가는 여주인공과 짧은 연애를 한 남주인공은, 어른이 되어서도 죽은 자를 그리워하게 된다. 삶을 상실했다는 점에서 그녀는 약자고, 약자는 그리움의 대상이 되어 남주인공의 상실의 자리가 된다.

<목소리의 형태>에서 작품의 표면이 학교 폭력과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라면, 심층은 탈출하고픈 위치의 인물에게 닥친 재앙을 그보다 더 나은 위치의 인물이 구하는 것이다. 두 인물 모두 학교 폭력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지만 가해자였던 남주인공이 피해자였던 여주인공을 구함으로써 구원받는다. 우리는 여기서도 '약자'가 회개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최근 일본 재난물의 경향은 '손을 내밀다'와 '약자의 타자화'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일본이 재난을 바라보는 시점은 프레임 안에 갇혀있다. 말 그대로 그들은 TV 속에 비추어진, 언론에 의해 수정되고 덧붙여진 재앙의 모습을 보고 있다. 어째서 이런 경향이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우리는 그렇게 해서 무엇을 얻는지에 대해 반문할 수 있다. 이곳과 저곳을, 자신과 타인을 분리해서 사건을 바라보면 감정 이입은 제한된다. 감정 이입을 제한함으로써 사건은 점차 객관화되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자신을 타자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공과 사의 분리로 그들의 고통을 직시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언론을 필두로 한 각종 정보통이 만들어 내는 신화에 둘러싸인 것이다. 그렇게 관찰자는 영영 관찰자로만 남게 된다. 사건으로의 개입은 철저하게 제한된다.

2. 관찰자 영화, 목격자 영화

 영화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의 한 장면

영화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의 한 장면 ⓒ 미디어캐슬


그렇다면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의 시점은 어떠한가. 이 작품은 관찰자가 아니라 목격자를 그린다. 두 행위자의 차이는 명확하다. 관찰자는 사건에 속해 있든 아니든 간에 개입하지 않는다. 반면 목격자는 사건의 중심에 있기에 필연적으로 개입된다. 그렇기에 목격자는 맞서 싸우거나 도망가거나 두 가지 선택지만을 지닌다.

이 작품이 사건의 목격자인 이유는 명확하다. 작품의 전체 서사가 엉성하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해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능동적이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인물들은 초기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한다. 서사의 진행과는 상관없이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지 않는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이들은 어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지막에 가서 마을 사람들이 생각을 달리하는 것도 결국 판에 짜인 듯한 회개의 플롯일 뿐이다. 구태여 보태자면 '루의 노래'가 무척 감미롭다는 점이 있다. 인물 모두가 어딘가로 도망치는 듯한 느낌이다. '도착한 그곳에 결말이 있었다' 정도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떠올리는 '몰입'이란 세밀하게 엮인 이야기의 진행일 것이다. 이를테면 데이비드 핀처나 크리스토퍼 놀란이 그런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그런 빡빡함 속에 관객의 생각이 개입될 여지는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어진 다섯 개의 선택지에서 골라야만 하는 객관식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한 편의 게임과도 같다. 놀란은 이야기의 초반에 게임의 규칙을 설명하고 그에 따라 '규칙'을 설득시킨다. 이를테면 <인셉션>에서 우리는 타인의 꿈속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드림머신'이 꿈속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할 것이라는 가정을 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저 극의 진행을 위한 규칙이기 때문이다. 결국 위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티브이가 보여주는 정보만을 받아들일 뿐이다.

놀란 감독의 이러한 면에 대해 좋거나 나쁘다는 판단을 하려는 게 아니다. 이 부분은 다른 글에서 길게 언급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목격자 관객의 역할이다. 의도를 갖고 엉성하게 만든 작품들은 관객의 생각이 투입될 여지를 남긴다. 마치 완성되지 않은 돌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그사이에는 굳이 돌이 아니더라도 다리가 놓일 수 있다. 목격자 관객은 작품이 제시하는 재난을 보며 자신이 생각하는 모습을 투영하게 된다.

어쩌면 수용자가 작품에 참여하는 성격을 지님으로써 '행동하는 영화'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사건에 대한 경험이 없다면 작품에 몰입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랑을 해보지 않은 사람에게 사랑 영화란 정말로 미지의 영역일 테다. 그렇기에 관객이 특정 경험을 해보았을 것으로 전제하는 작품은 특정 국가와 집단에 귀속되는 경우가 많다. 일본의 경우는 그것이 2011년의 쓰나미이고, 미국의 경우는 2001년의 9.11테러이고, 한국의 경우는 2014년의 세월호다. 각각 규모는 달라도 국민들에게 회복되지 않을 각인을 새겼다는 점이 같다.

 영화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의 한 장면

영화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의 한 장면 ⓒ 미디어캐슬


그것은 단지 재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규모가 큰 특정 사건은 사회 전체에 여파를 미친다.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트라우마의 모습은 개인의 시야가 되어 삶을 바꾸어 놓는다.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 힘없이 무너지는 인간의 모습에서 우리는 무력과 좌절을 느낀다. 그건 인간의 힘으로 통제되지 않는 거대한 힘이다. 사회적인 맥락에서는 개인의 힘으로 통제되지 않는 거대한 힘이다. 그 힘 앞에서 개인은 삶의 통제력을 잃고 선로에서 이탈하게 된다. 그래서 쓰나미란 부초로서의 인간일지도 모른다. 갈 곳이 없는 것이다. 갈 곳이 없기에 어디로든 도착하기를 빌며 떠돌 수밖에 없고, 그저 그곳에 결말이 있을 뿐이다.

다소 억지스러운 주장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떠돎'이 이 작품에 이입하게 되는 계기라고 말하고 싶다. 어느 사건 위를 떠돈다는 건 작품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다. 작품으로부터 도망치고 나면 외면당한 현실이 스크린 위에 남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관찰자 영화처럼 작품이 이끄는 곳으로 인도 당할 수도 없다. 정해진 결과를 굳이 다시금 들여다보려는 용기가 우리에게는 없다. 그렇다면 목격자 영화가 해야 하는 일은 '정해지지 않은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3. 정해지지 않은 결과에 참여하며

주인공 '카이'는 아버지, 할아버지와 함께 작은 시골 마을에 산다. 카이의 어머니는 어릴 적 도시로 훌쩍 떠나버린 것으로 언급된다. 벌써 중학생이니 십 년이 다 되어간다. 그러나 카이는 어머니를 찾으려는 시도해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그건 사춘기의 반발이 아니라 무기력이다. 카이는 웃지 않는다. 오죽하면 카이의 웃는 모습을 본 친구들이 놀랄 정도다.

이 작품에서 노래는 중요하게 언급된다. 무기력에 빠진 카이가 유일하게 관심을 두는 것도 음악이며, 친구들과 밴드에 참여해 인어 '루'를 만나고, 마지막엔 노래를 통해 마을을 구한다. 엄밀하게 말해 마을을 구하는 건 인어들이지만 인어들에게 '노동요'를 불러준 것은 카이다. 작품의 도입부에서 4분 34초까지 이마를 푹 내리고 얼굴이 가려져 있던 카이의 얼굴이 공개되는 대목도 '인어 섬'에서 밴드 연습을 한다는 대화가 오고 갈 때다.

결국 이 작품에서 인어는 노래에 선행한다고 말할 수 있다. 카이는 밴드를 하자는 제안이 아니라 인어 섬에 가자는 제안에 흥미를 느꼈다. 덧붙여서 밴드에 적극적이게 된 것도 인어가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아는 10분 15초경이다.

 영화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의 한 장면

영화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의 한 장면 ⓒ 미디어캐슬


그렇다면 카이는 인어의 어떤 점에 이끌리게 된 것일까.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이 작품을 오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을 공동체가 인어를 신성시하거나 배척한다고 해서 인어를 소수자로 읽지 않아야 한다. 음악을 좋아하니 세이렌이고 세이렌이 뱃사람을 홀리니 공포의 대상으로 읽지 않아야 한다. 차라리 가장 진부한 해석으로 인어가 재앙의 증표라고 말하고 싶다.

작품에서 언급되는 민담에는 인어를 화나게 하면 마을에 재앙이 닥친다는 것이 있다. 그러나 후반부에 우리는 '인어가 재앙'이 아니라 '재앙을 막는 인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재앙은 그저 바위에 얽힌 전설대로 주기적으로 다가올 뿐이다. 그리고 그 바위는 인어들이 그곳에 머무를 수 있게 해주니, 단지 인어들이 사는 곳에 재앙이 닥칠 뿐이다.

말하자면 인어들은 물 속에 사니 구태여 인간들을 도와주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다. 오히려 인간이 없어져야 살기 편할 것이다. 인간이 인어를 사냥하려 드니 말이다. 결국 인어들이 위기에 빠진 마을 사람들을 돕는 건 오로지 자유 의지에 따른 것이다.

그렇지만 인어는 선한 존재가 아니다. 반대로 악한 존재가 아니라고 방금 말했었다. 정리하자면 인어는 그 무엇도 아니다. 인어는 그저 인어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재앙은 그저 재앙이다. 우리는 그 재앙이 막연히 나쁜 것이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라고 여겨야 한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지브리 스튜디오가 말하던 가치를 떠올리게 된다. 지브리의 작품들은 생태주의(Ecologism)를 열렬히 표방하고 있고, 이 작품도 마찬가지다. 지브리의 대표작 <모노노케 히메>의 후반부에는 분노한 신(그리고 동물)이 마을을 파괴하는 장면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들 중 그 누구도 그 신이 자연의 분노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과정에 가깝다. 감기에 발열이 동반되는 것처럼 항상성(恒常性)은 통증과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것이다.

 영화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의 한 장면

영화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의 한 장면 ⓒ 미디어캐슬


작은 딸아이 '루'에게는 거대한 몸집의 아버지가 있다. 작품에서 아버지는 꽤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그런데 그 몸집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 아버지에게는 사람들로부터 궁지에 몰린 딸아이를 구하는 것만이 역할의 전부다. 딸아이가 좋아하는 인간 남자 '카이'를 만나기 위해 육지로 오고, 그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과 접촉한다.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던 마을 사람들이 루의 아버지라는 이유로 일순간에 돌아설 때도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루의 아버지는 과거에 인간을 비롯해 여러 생명체를 먹었었다. 그 말인즉슨 루의 아버지가 맹목적인 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루의 아버지는 딸아이가 싫어하는 식인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학대했던 인간들을 위해 탈진할 때까지 힘을 쏟는다. 카이와 친구들이 안내 방송을 하는 둥의 모습이 그려지나, 결국 재난을 극복하는 건 인어들의 마법 같은 힘이다.

그렇지만 노래는 화음이다. 화음이란 여러 명이 필요하다. 인어 '루'와 인간 '카이'는 합주를 통해 친해진다. 그리고 유아사 마사아키는 '타자에 대한 이해와 포용력'이 자신의 작품관이라 말했다. 그렇다면 작품에서 노래란 이해와 포용의 도구다. 그렇지만 그것이 타자에 대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타인을 알기 전에 자신을 알게 되고, 자신을 알면 타자를 알게 된다. 다시 말해 '나'와 '너'의 경계는 불분명하다.

결말을 조금 남긴 하이라이트는, 어쩌면 재난과 현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무의미해지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작품에서 인어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인어가 사랑하는 사람을 앗아갔다고 여긴다. 그러나 사실은 죽음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인어로 만드는 '루'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어를 오독하고 있던 것이다. 소모품에 가까운 것처럼 보이는 인물들은 바로 이 '이해와 포용'을 위해 만들어져 있던 것이다.

<모모노케 히메>, 숲이 죽으면 인간이 죽는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그 명제의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인어가 죽으면 인간도 죽어야만 하지만 오히려 인간만이 남겨진다. 그것은 인간의 이기심이거나 자립을 뜻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균형이 무너진 마지막 장면에서 왠지 모를 불안감이 느껴진다. 선과 악이 명확하지 않은 인어란 인간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았다. 우리가 그들을 공격하면 그들도 우리를 공격했고, 우리가 그들을 좋아하면 그들도 우리를 좋아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만이 남은 상태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한 물음만이 남는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계에 발가벗겨진 채로 내쳐졌음을 의미한다.

누군가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가 재난 영화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작품 속의 결과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수사법이 아니라 말 그대로다. 어느 영화는 정해진 결과가 있고 그것을 바꾸려 하는 게 관람 포인트다. 예를 들면 로맨스 영화에서 인물은 사랑에 빠져야만 하며 범죄 영화에서 주인공은 범인을 잡아아먄 한다, 혹은 범행에 성공해야 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떠돎'이 있고 그렇기에 종착지를 미리 언급할 수 없다. 미래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현재를 미래로 바꾸어 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영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