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작품은 이미 촬영된 상태이기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고정되어 있는데, 액자 형식의 작품은 우리가 보는 영화 속에 영화가 있다. 이때 관객은 '혹시 우리가 사는 현실도 누군가 촬영하는 영화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일례로 <트루먼 쇼>(1998)를 보면 주인공의 모습이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중계된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의 삶 자체가 한 편의 쇼이지만, 우리가 보기에 사실은 이 사람의 인생이 한 편의 영화이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많은 영화가 메시지를 전달하고는 한다. '혹시 내 삶도?'라는 마음이 영화에 몰입하게 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영화 같은 삶', 물론 원론적인 의미에서 '메타 영화'라는 단어의 뜻은, 말 그대로 '후일담'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알 수가 없으므로, 그런 걸 보는 재미가 있다.

결국은 메시지가 중요하다. 좋은 영화란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관객을 영화 속에 붙잡아 두는 것이다. 영화관에서 영화 한 편이 끝나고 나면 주변이 깜깜해진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 머릿속도 무척 깜깜하다. 그렇지만 영화가 전달한 메시지가 머릿속에 계속 맴돈다. 그러니까 영화는 엔딩 크레딧이 끝나도 여전히 상영 중인 것이다.

만약 당신 삶도 깜깜하다면 당신 삶에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여튼 영화 속 이야기가 그런 방식으로 우리의 이야기가 되고, '만약 나라면 영화 속과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떤 선택을 할까'라고 한 번쯤은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보통 영화는 대부분 그러하다. 하지만 미학적으로 보았을 때 '영화 전체가 하나의 도구'로 기능하는 게 흥미로운 것이다. 보통은 영화 내에서 편집과 연출로 메시지를 전달하곤 하는데, 영화 자체가 하나의 도구가 된다면 그야말로 '온몸을 바치는 것'이지 않는가. 아무래도 전자보단 후자 쪽이 더 멋있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이런 종류의 영화를 보면서 '우리 삶도 한 편의 영화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게 되는데, 이때 우리의 삶은 '삶 전체가 하나의 메시지'가 된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영화를 보며 단순히 메시지 찾기에만 몰두하는 게 아닌 것이다. 그 메시지가 다름 아닌 우리의 삶이기에 더욱 와 닿을 수밖에 없다.

산다는 건 쉽지 않다. 우리는 '쉬운 게 아닌 것'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순히 '어렵기만' 한 게 아니라 정말로 풀리지 않는다. 이를테면 가족이나 시간, 죽음과 생존의 문제와 같은 것인데, 이것들은 모두 '필연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모든 사람은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태어나고, 모든 사람은 평등한 시간 아래 살아가고, 모든 사람은 결국 죽음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당연한 문제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사람은 어차피 죽는다. 시간은 어차피 흐른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문제들에 집착하느냐"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끝없는 고뇌'라는 게 당사자에겐 지옥과도 같은 것이지만, 사실은 그런 고뇌로 인해 계속해서 나아가는 게 사람이다. 말하자면 이런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계속 나아가!"라고 언질을 주는 것이다.

딱딱하고 재미가 없어 보이지만 또 무작정 그런 건 아니다. 이런 종류의 영화가 예술성이 높은 건 사실이지만, 예술성이 높은 영화 중에서도 분명 재미있는 영화가 있다. 물론 전문가와 일반인이 영화에서 느끼는 재미는 각각 다를 테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볼만한 가치가 있다. 개인이 영화에서 느끼는 것은 각각 다르기 마련이니까.

그게 바로 영화가 단순히 일방적인 것만은 아님을 증명한다. 개인의 주관으로 변형된 메시지는, 개인이 선택한 메시지라는 뜻도 되니 상호소통적인 것이다. 말 그대로 호접몽, "영화는 내 삶이고, 내 삶은 영화다"

사실 넓게 보면 <매트릭스>(1999)나 <인셉션>(2010)도 이런 영화에 속하긴 한다. 하지만 이건 영화의 형식 자체를 응용한 건 아니다. 이런 건 정말로 철학의 영역인 것이고, 영화와 삶의 교차라는 점에서는 <원더풀 라이프>(1998)나 <천년 여우>(2001)를 추천하고 싶다. 각각 '재미없고' '재미있는' 영화다.

 영화 <원더풀 라이프>의 재개봉 포스터

영화 <원더풀 라이프>의 재개봉 포스터 ⓒ 라이크 콘텐츠


<원더풀 라이프>

이 영화는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일본 감독이 만들었는데, 정말 좋다. 한국에서도 유명하지만 그래도 일단 감독에 대해 짧게 언급을 하자면, 필모그래피 전반적으로 일본 사회의 문제를 그려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근래에 와서는 가족영화를 주로 만든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아니다'. 단지 가족영화만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일본 사회의 문제 중 '가족'을 최근에 많이 지적했을 뿐이다. 일례로 감독의 초기작을 보면 정말로 여러 메시지를 보내곤 하는데, 이 영화 <원더풀 라이프>도 그렇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메시지인가? 어떤 사회 문제를 그려내고 있는가?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은 이렇다. 영화는 죽음 이후의 공간인 '림보'를 보여준다. 림보에는 주기적으로 망자들이 들어오는데, 일주일 동안 생활 후 영원 속으로 떠나게 된다. 이들을 돕기 위해 회사처럼 직원들이 상주하고 있는데, 이들은 망자들로 하여금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고르도록 한다. 왜냐하면 영원 속으로 떠나게 되면 단 하나의 기억에 '영원'토록 파묻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두 가지 흥미로운 측면이 있다. 일단 첫 번째로 '단 하나의 기억'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보통 삶에서 단 한 장면만 꼽으라면 '첫 아이가 태어났던 날'이나 '첫사랑과 만났던 날'일 것인데, 이건 단지 행복했던 순간뿐만 아니라 '무척 뜻깊은'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 좋지 않은 사건이라도 '나에게 있어 의미가 있다면' 삶의 베스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 <원더풀 라이프>의 한 장면

영화 <원더풀 라이프>의 한 장면 ⓒ 라이크 콘텐츠


그러니까 이 영화는 '삶에서 가장 의미 있는 순간'이 언제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단순히 묻기만 하는 게 아니다. 가장 의미 있는 순간을 안고 영원으로 떠나게 된다는 말은, 그 순간에 시간이 멈춘 채로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왜 우리가 흔히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이라는 말을 하곤 하지 않는가. 그런데 그 말이 나오는 상황을 자세히 떠올려 보면, '어떠한 특정 목표가 달성되었는데 그 목표가 삶의 전부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이를테면 짝사랑이 성공했다던가. 하는 건데, 그 말 뒤에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다. "죽어도 좋아" 이 말이 바로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망자들은 이미 죽은 상태다. "죽어도 좋아"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가 말하는 '기억'의 맥락에서 생각해본다면 조금은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죽어간다.라는 것은 세상에서 지워져 간다.라는 말과 비슷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금세 잊혀지고, 죽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므로 그러하다. 결국 이 영화에서 림보라는 것은 '아직은 세상에서 완전히 잊혀지지 않은'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때 '영원'이란 '세상이 나를 잊어도 나는 기억해야 할 세상의 모습, 나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다.

영화는 여기서 한술 더 뜨고 들어간다. 영화에서 망자들이 선택한 기억을 영원으로 가지고 가기 위해선, 림보의 직원들이 그 기억을 영화로 만들어 주어야 한다. 말하자면 앞서 말했듯이 '영화를 만드는 영화'인 셈이다. 그런데 그 영화의 재료는 '나의 모습, 기억'이다. 그래서 이 작품을 보는 우리도 이 영화가 '나의 모습, 기억'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말하자면, 영화는 이런 방법을 통해 스스로를 우리에게 있어 '죽어도 좋은 영화'로 남기게 된다.

 영화 <원더풀 라이프>의 한 장면

영화 <원더풀 라이프>의 한 장면 ⓒ 라이크 콘텐츠


이런 구조는 굉장히 특이한 것인데, 이 작품이 '영화 속의 영화'를 그리기에 '나의 모습을 바깥에서 바라보는' 것이 되기에 그렇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면,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을 거치지 않고서 자신을 볼 수 없다. 내가 하는 판단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나를 보기 위해선 '나'가 아니어야 하는데,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분명 이 영화에서 망자들이 선택하는 기억이란 '나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건 또 이 영화를 보는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결국 이러한 구조가 이 영화를 메타 영화로 기능하게 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객관적으로 관찰해본 나의 인생', 좋았던 것이든 싫었든 것이든 간에 기억은 미화되곤 한다. 그게 바로 기억의 주관성이라는 건데, 시간이 흐르면 전부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뀌곤 한다. 바람피워서 도망간 연인일지라도 "인연이 아니었을 거야"라고 치부하는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추억을 떠올릴 때 인제 와서 별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어떤 상황이었고 어떤 마음이었는지 '진실'을 알고 싶어 할 때가 있지 않는가. 그 진실을 기록하는 게 바로 카메라인데, 만약 그런 게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에서 이 영화가 시작하는 것이다.

 영화 <천년 여우>의 작품 포스터

영화 <천년 여우>의 작품 포스터 ⓒ 무비즈 엔터테인먼트


<천년 여우>

<천년 여우>, '천년을 사는 여배우'라는 뜻이다. 이 영화는 곤 사토시라는 일본 감독이 만들었는데,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팬층이 두텁다. 필모그래피 전반에서 꿈과 현실의 경계를 오묘하게 섞어내고 있는데, 이건 작품이 애니메이션이라는 점과 맞물려 깊은 인상을 준다. 그리고 작품마다 이러한 주제의식이 굉장히 특이하게 변형이 되곤 한다.

<천년 여우>도 꿈과 현실의 경계를 그리는 영화다. 이 영화는 다섯 편의 작품 중 두 번째이니 감독의 초중기 영화에 해당한다. 여기서 감독의 모든 영화를 말씀드릴 순 없지만, 그래도 첨언을 한다면 다섯 편밖에 되지 않음에도 무척 역동적인 작품관의 변화를 보여준다. 초기작이 '현실에 꿈이 개입하는' 형식이라면 후기로 갈수록 '꿈이 현실에 개입하는' 모습이다. 말하자면 주어와 술어가 바뀌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갈 때 현실을 우선으로 하느냐, 아니면 꿈을 우선으로 두느냐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보통 꿈이라고 함은 '이상적인 것', '되고 싶은 것', '바라는 것' 정도를 의미하는데, 신기하게도 곤 사토시의 작품에서는 반대다. '이상적인 것에 잠식당하는 현실'이 있고, '되고 싶은 것에 압박받는 현실'이 있고, '그토록 바라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이 있다. 말하자면 그의 작품에서 '꿈'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현실과의 관계에서 우선의 가치가 아니다.

가령 감독의 초기작 <퍼펙트 블루>(1997)에서는 주인공이 가수에서 배우로 전향하게 되는데, '꿈이었다고 생각했던 배우라는 직업'이 사실은 '화려한 가수를 꿈꾸던 나를 위협하는 현실'이라는 점이 밝혀진다. 그러니까 '꿈'이라는 것이 '목표'이기도 하지만, '망상'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천년 여우>는 어떤 방식으로 꿈과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가?

 영화 <천년 여우>의 한 장면

영화 <천년 여우>의 한 장면 ⓒ 무비즈 엔터테인먼트


<천년 여우>는 아주 특이한 내러티브 구조를 가진 영화다. 작품이 시작하면 어느 우주 비행사가 발사 대기 중인 우주선에 타고 있다. 이윽고 발사 카운트가 시작되고 화면이 흔들리는데, 발사 장면은 보이지 않고 프레임이 티브이 밖으로 전환된다. 그러니까 이 우주비행사는 티브이 속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영화 속의 현실에서 이 작품을 관람하고 있던 인물은 지진에 화들짝 놀라 머리를 감싸 맨다. 이때 관객은 티브이 속 우주선의 발사가 영화 속 현실에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것이 정말로 지진을 묘사하는 것인지, 혹은 우주선이 정말로 발사된 것인지 말이다.

그런데 이제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이 시작될 때를 보면 티브이 앞의 인물이 떠나가고 티브이만 홀로 남게 된다. 그 티브이 안의 영상은 뒤로 감기가 되는데, 우주비행사를 연기한 배우가 연기했던 다른 작품들로 추정되는 것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당연하게도 그것들은 배우의 필모그래피이기에 뒤로 갈수록 점점 나이를 먹게 되는 것이고, 그것을 역으로 재생하니 점점 젊어지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말하자면 시간이 거꾸로 가는 듯한 효과를 주는 것이다.

영화의 기교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역으로 재생되던 화면은, 그것을 관람하던 인물이 어딘가로 향하는 모습과 교차로 보이게 된다. 이때 그 화면은 영화이기에 일종의 꿈에 해당하고, 반대로 그 인물이 어딘가로 향하는 모습은 현실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꿈은 미래에서 과거로 향하고, 현실은 현재에서 미래로 향하고 있는 것, 그렇게 방향이 다른 두 이미지가 번갈아 제시되는데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왜냐하면 두 이미지의 시간이 흐르는 방향이 다를지언정, 그들이 나아가는 방향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 동일성이 환유를 통해 유지가 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곧, '다른 시간대를 살아간다는 게 다른 방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다음 시퀀스를 보면 영화사 건물이 막 무너지고 있고, 아까 그 인물이 해당 영화사 소속 감독이었음을 알게 된다. 영화사 설립 주년을 맞이해서 한때 영화사에 몸담았다 은퇴한, 전설적인 여배우를 인터뷰하려 감독을 보낸 것이다. 그 테이프는 그 여배우의 작품이었던 것, 감독은 필모그래피의 절정에서 갑작스레 은퇴해버린 그녀의 열렬한 팬이다. 여기서 감독과 여배우의 관계가 앞서 말했던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지만 같은 방향'인 것이다.

 영화 <천년 여우>의 작품 포스터

영화 <천년 여우>의 작품 포스터 ⓒ 무비즈 엔터테인먼트


또한 이러한 방향의 일치가 '환생'을 뜻하기도 한다. 영화 오프닝 장면에서 우주 비행대가 열리는 게 불교에서 환생을 뜻하는 연꽃처럼 보이기도 하고, 작품 속에 남겨진 그녀의 모습을 수백 번 돌려 보았다는 감독의 말이 '로테이션'을 뜻하기도 하므로 그러하다. 이때 우리가 명확하게 감지할 수 있는 이상기류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갑작스러운 은퇴의 이유이고, 둘은 백발의 노인과 중년의 감독이다. 

여기서 전자는 이 영화의 주요 서사가 된다. 수십 년 동안 세상을 등질 정도의 이유를 추격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녀가 '노인'이라는 점이다. 보통 노인이라고 하면 삶의 마지막을 의미하는 것인데, 우리가 이제 영화의 오프닝이 그녀의 필모그래피인 것을 알게 된 이상 그 작품을 그녀 자체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오프닝에서 역 재생되는 화면이 마치 그녀의 시간을 미래에서 과거로 돌려놓는 듯한 느낌을 준다.

여기서 우리가 의문을 품어볼 수 있는 게 하나가 있다. 이렇게 되면 사실상 영화의 오프닝 장면은 플래시 포워드가 되는 것인데, 결말을 미리 보여준 상태에서 어떻게 극을 진행시킬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했듯이, 이것을 궁금해할 필요가 없다. 본인 입으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니, 작품의 결말이 배우의 죽음인 것은 뻔하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실은 '어차피 죽는데 왜 열심히 사는가'와 동일한 물음인 것이다.

어쩌면 방금 전의 <원더풀 라이프>가 생각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삶에서 가장 기억하고 싶은 순간, 하지만 비슷하지만 약간 다르다. 그녀가 배우를 결심하게 된 건 어렸을 적에 우연히 만난 어떤 남성에게 반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배우로 유명해지면 유명세에 남성이 먼저 찾아오거나, 혹은 촬영차 만주에 갔을 때 그를 찾을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남성이 남기고 간 것이 열쇠다. 그녀는 어디에 사용되는지 모를 그 열쇠를 항상 목걸이처럼 메고 다녔었다. 그런데 그 열쇠를 어느 날 분실하게 되고, 그녀는 비로소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영화 <천년 여우>의 한 장면

영화 <천년 여우>의 한 장면 ⓒ 무비즈 엔터테인먼트


그러니까 은퇴 이유는 남자를 찾는 걸 포기했다는 게 된다. 하지만 그 열쇠는 사실 일종의 맥거핀이다. 원래 열쇠라면 그것이 들어갈 구멍이 있어야 하는데 영화 내에서 나오지 않는다. 사용 용도가 불분명하지만 그녀는 그것(남자)을 애타게 쫓는다. 결국 그 열쇠는 그녀가 배우로서 성공하게 해준 것이지만, 그 자체로 목표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걸 뒤늦게 깨닫고 허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꿈이 아니었던 것이므로. 그런데 그 꿈은 개인의 목표, 삶의 이유였기 때문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는 앞서 말했듯 '반복되는 삶'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반복은 개인의 삶에 해당하기도 하고, 나나 다른 사람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녀는 배우이기에 작품마다 다른 인격으로 환생하고, 작품을 돌려보는 누군가를 통해 계속 반복된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그럼에도 그녀가 배우였던 시절에 '열쇠'를 소지했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것이 작품마다 달라지는 모습을 유지해주던 축이었는데, 축이 무너지니 전체가 무너져버린 것이다.

작품을 통해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 배우인데, 미래에서 과거를 본다는 게 사실 '추억을 회상하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다. 그렇다면 배우들은 자신의 추억이 작품 자체다. 그런데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자신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달리는 것인데, 어떻게 보면 이게 유사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장면을 묶어서 편집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결국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기억하고 싶은 추억은 대체로 방향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향에 사실은 표지판이 없었다. 사실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뒤돌아보니 결국은 앞으로 나아가기는 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도 방향을 모른다고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건 확실하므로 그러하다.

즉, 이 작품은 영화 속의 영화를 그리므로 메타 영화에 해당하고,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배우'가 된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한 편의 영화이므로, 다른 한 편의 영화 형태로 다른 삶도 존재한다. 이것이 환생, 반복의 테마를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삶을 견인하는 건 눈에 보이는 목표가 아니고,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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