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봤다. 종교와 철학적 물음이다. 개봉 당시 스크린은 물론 안방에서도 이미 수십 번은 넘게 방영이 되었을 이 영화는 여전히 새롭고 흥미롭다.

나는 운명론자는 아니다. 운명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이빨 빠진 빗자루를 앞으로 휘휘 저으며 개척하는 것이라는 상투적인 믿음으로 살아왔다. 가끔씩 인터넷이나 TV를 볼 때 마다 그 믿음이 우지직 깨지기도 하지만 어쩌랴, 이 세상의 8할은 시도 때도 없이 스킨십을 해대는 횡단 보도 앞의 고등학생 커플처럼 상투적인데. 하지만 살다보면 몇가지 예외적인 상황도 있는데 그중 하나는 보게 될 영화는 보게 된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한 만나게 될 사람은 어젠가는 만나는 것처럼.

일년간의 '셀프 안식년' 혹은 '자발적실업자'

라이프 오브 파이 스틸컷

▲ 라이프 오브 파이 스틸컷 ⓒ 20세기 폭스


서른살부터 시작한 지역아동센터(사회복지사)일이 12년이 넘었다. 몸과 정신이 부서지기 직전이었다. 퇴직 후 일년간 자발적 실업자 생활을 했다. 실업가가 아닌 실업자의 부수적 효과는 시간과 돈이 반비례 한다는 점이다. 정확히는 반만 맞다. 돈은 영혼이 녹슬고 뼈가 녹아 내리게 일을 할 때도 많지 않았으니까.

무료한 주말 오후 영화 채널을 심드렁하게 터치하던 리모콘의 엄지 손가락 밑에서 <라이프 오브 파이>는 운명처럼 재생되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들었다. 당췌, 운명 '따위'라니. 이런 영화는 그냥 킬링타임으로 보는거지. 영화에 나오는 '리처드파커'는 특이한 존재다. 그는 사람이 아닌 뱅갈 호랑이다. 맹수에게 사람의 '이름'과 '인격'을 부여한 감독의 의도가 의아했지만 온통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부유하는 듯한 영화를 보다 보면 멍청이가 아닌 이상 그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본능-도덕-종교-믿음-절대자... 그리고 굶주림

본능과 도덕. 종교와 믿음과 절대자. 그리고 굶주림. 이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들이다. 어떤것이 도덕적인가? 라는 물음은 이 영화에서 영혼이 있는 인간에게만 해당된다. 어떤 것이 선인가? 하는 물음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유명하지만 나는 알지 못하는 한 철학자가 말했듯이 '영혼이 없는 가장 복잡한 기계장치일 뿐'인 동물에게 도덕과 선을 강요 해서는 안 된다. 먹이 앞에서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는 '리처드파커'에게 굶주림을 참으라는 것은 비겁한 인간의 도덕이다. 그런 비도덕적인 요구는 채식주의자인 파이의 어머니가 대서양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화물선의 주방장에게 고기를 뺀 식단을 요구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동이다.

월 백만원이 넘는 사립유치원과 국립 초등학교를 다닐수 없는 맹수의 도덕이란? 본능에 충실한 것이다. 일주일을 넘게 굶고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먹이를 앞에 두고서 굶주림을 참는 맹수가 있다면 단군신화의 웅녀처럼 인간이 되기 직전의 상태 일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그 맹수에게는 법정 최고형을 선고 한 뒤 가차없이 철창에 가둬야 한다.

영화는 현실과 환상을 절묘하게 섞어 놓았다. 나는 하루 24시간 중 15시간은 하품이 날 정도로 현실적인 존재이므로 현실과 환상, 그리고 환상 너머의 판타지를 넘나드는 이런 마술적 리얼리즘 장치에는 혼이 나갈 정도로 흠뻑 취한다.

시가 재정 지원을 중단하여 더이상 동물원을 운영 할 수 없게 된 파이의 부모는 동물을 데리고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다. 하지만 바다 한가운데에서 예기치 않은 폭풍을 만나고 화물선은 침몰하고 만다. 파이(수라즈 샤르마 분)를 제외한 승객들은 배와 함께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 앉는다. 폭풍이 지나간 뒤 작은 구명 보트에는 파이와 하이에나, 원숭이, 쥐,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친 파도를 헤엄쳐온 리처드 파커만이 남아 있다.

극한의 '긴장'과 한없는 '지루함' 그 사이에서

라이프 오브 파이 스틸컷

▲ 라이프 오브 파이 스틸컷 ⓒ 20세기 폭스


이 기괴한 동거는 파이와 파커 둘만의 동거로 이어진다.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 한 달. 광막한 바다 한가운데 작은 보트 위. 인간과 호랑이. 한없이 지루할 것만 같은 바다에서의 이 기막힌 상황은 그러나 시도 때도 없는 긴장과 몰입을 안겨준다. 이제 리처드파커는 굶주림에 시달리는 본능에 충실한 맹수로, 심판하는 절대자로, 그리고 바다를 표류하는 파이의 삶을 유지 시키는 보호자로 등장한다. 날치와 돌고래, 그리고 절대자의 계시. 파이는 공포와 굶주림속에서 신의 사랑을 깨닫는다.

당신은 누군가의 첫사랑, 아니 그를 괴롭혔을 '리처드파커'

리처드파커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는 가족일 수도 있고 직장 상사일 수도 있고 거래 업체 직원일 수도 있다. 나는 '누군가의 첫사랑'일수도 있지만 그를 괴롭히던 '리처드 파커' 일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의 리처드 파커다. 그것은 내가 확언 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진실이다. 당신 옆이나 뒤나 위에서 끊임없이 긴장 시키는 존재. 하지만 리차드파커는 결코 당신 앞에는 서지 않는다. 숨을 쉬는 한 앞으로 나가야 할 그 자리는 각자의 몫이기에. 그는 찬사와 환영을 받기보다는 치우고 싶은 불편한 존재다. 하지만 떨쳐버릴 수도 없다. 떨쳐 내서도 안 된다. 리처드파커가 없다면 당신이나 나의 존재 이유는 연필이나 바닥을 굴러다니는 돌덩이와 별 차이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우여곡절끝에 도달한 육지. 파이는 모래사장 위에 쓰러지고 리처드 파커는 모래사장을 건너 밀림 앞에 선다. '나를 한 번만 돌아 봐줘!' 파이는 속으로 외친다. 하지만 리처드파커는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그의 안식처인 정글속으로 성큼성큼 들어간다. 리처드 파커는 그렇게 소년에게서 사라졌다. 오줌싸게로 놀림을 받던 파이에게 리처드파커는 이제 불필요한 존재다. 그는 바다 위에서 모든 것을 잃었지만 자신은 잃어버리지 않았고 리처드 파커와의 동행을 통해 충분히 성장했다.

다시 밀림속으로 들어갈 '나'를 위하여

라이프 오브 파이 스틸컷

▲ 라이프 오브 파이 스틸컷 ⓒ 20세기 폭스


지난 일년 동안은 자발적 실업 기간이었다. 셀프 안식년이었다. 삶이 조금 불안했지만 아침에 눈을 뜨면 30분 정도는 행복했다. 가야 할 곳이 없어서 좋았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싫었다. 일을 쉬는 동안엔 일상에서 나를 특별히 불편하게 하는 '리처드파커'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다시 밀림속으로 들어섰다. 내 앞에는 무수한 '리처드파커'가 나타날 것이다. 혹은 그들 앞에 선 나일 수도 있다. 어젯밤 '당신 옆을 스쳐간 사내 혹은 소녀의 이름'은 밀림 속으로 사라져 버린 리처드파커 일수도 있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지 않았거나, 혹은 천사의 미소를 감추었을 뿐. 지금 밀림 속에 있어야 할 나의 리처드파커가 저기 새로 솟아난 밀림에서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낸 채 내게 성큼성큼 걸어 오고있다. 예전처럼 두렵고 떨리기는 하지만 회피하지는 않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인철 시민기자의 <네이버블로그>와 <페이스북>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라이프오브파이 리처드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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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 뉴스 시민기자입니다. 진보적 문학단체 리얼리스트100회원이며 제14회 전태일 문학상(소설) 수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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