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포스터.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포스터.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다. 사전에서는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이라고 사랑을 설명한다. 예술가들은 이 복잡 미묘하고 추상적인 감정을 예술의 형태로 전달해왔고 덕분에 대중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시로, 노래로, 그림으로, 영화로 만나왔다. 그리고 판타지 영화의 대가이자 대단한 이야기꾼인 기예르모 델 토로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의 형태, 그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는 일반적이지 않은 소재로 지극히 일반적인 사랑을 표현했다. 지난 2월 22일 개봉한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이라는 아름다운 영화가 바로 그것이다.

1960년대는 미국과 소련이 경쟁적으로 우주개발을 하던 시기였다. 미국 항공우주센터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엘라이자(샐리 호킨스)는 들을 수는 있어도 말을 할 수는 없는 언어 장애인이다. 그녀는 남들이 퇴근하는 시간에 출근해 연구소 곳곳을 청소한다. 가족도 연인도 없는 그녀에겐 옆집에 사는 화가 자일스(리차드 젠킨스)와 동료 젤다(옥타비아 스펜서)가 유일한 친구다.

그러던 어느 날 연구소에 물고기도 사람도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가 도착하고 엘라이자는 이 생명체와 특별한 교감을 나눈다. 우주개발에 이용하기 위해 아마존에 살던 생명체를 납치해 온 미국은 '그'를 고문하고 급기야 해부하려 한다. 엘라이자는 그 생명체를 구출할 계획을 세우면서 평생을 약자로 살아왔던 자신을 숨기지 않고 편견과 폭력에 과감하게 맞서게 된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기예르모 델 토로 식 '미녀와 야수'로 보이기도 한다. 따뜻하고 다정한 미소를 가진 엘라이자와 보는 이에 따라서 '괴물'이 될 수도, 신비롭고 아름다운 생명체가 될 수도 있는 '그'의 사랑은 한 편의 동화 같다. 이들이 서로 다른 존재라는 사실은 사랑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 또한 말을 할 수 없는 엘라이자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그에게는 발화된 언어가 없어도 소통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 화려한 미사여구 없이도 진심은 전달되고 이 진심은 때로 기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나와는 다른 존재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의 한 장면.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의 한 장면.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영화는 우주개발 경쟁이 한창인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냉전 시대 소련과 이념·기술 경쟁을 하던 미국은, 각 가정에 텔레비전이 보급되면서 극장 사업이 쇠퇴했고 흑인 인권 운동이 본격화 되고 사진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삽화 대신 사진으로 잡지와 광고 표지를 장식하고 프랜차이즈 식당 사업이 활발해지는 등 변화의 물결 속에 있었다.

나와 다른 존재, 이념적으로든 성적으로든 나와 다른 가치를 지닌 존재에 대해서 적대적인 인식을 가지고 주류는 소수를 배척해도 된다는 인식이 팽배하던 시대이기도 하다. 공산주의자, 동성애자, 흑인, 장애인, 여성 등 다른 존재들을 배척하고 주류 백인 남성들은 자신만의 룰을 만들어 사회를 지배해왔다. 그리고 약자들은 암묵적으로 그들의 룰에 순응하면서 살아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해 경계하는 것은 모든 살아있는 것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상대를 알고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정복할 대상으로서 상대를 대할 때 '인간다움'은 사라진다. 연구소 보안 책임자 스트릭랜드는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인간의 치졸한 폭력성을 대변한다. 그에게는 아마존에서 잡아왔다는 '그'가 역겹기만 할 뿐이다. 물고기도 사람도 아닌 그가 고통을 절규하면 할수록 그는 자신의 몽둥이를 휘두른다. 나와는 다른 존재를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를 통해 우리는 그 사람의 '인간됨'을 알 수 있다.

외로움은 사람을 겸손하게 한다

일라이자는 처음부터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보육원에서 자라 선천적으로 말을 못하는 청소부. 늘 따뜻하고 다정한 미소를, 때로는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녀가 느꼈을 외로움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외로움은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겸손한 마음은 사랑을 소중히 여긴다. 사랑하는 존재가 위험에 처했을 때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과 위험을 감수하고 그를 위해 행동하는 용기는 역시 사랑에서 나온다. 또 그 용기에 지지를 표하는 것 역시 '인간다움'에서 나온다.

탈모가 고민인 삽화가 자일스는 파이 가게 금발 머리 청년을 짝사랑한다. 그를 보기 위해 가발을 쓰고 맛없는 파이를 사 먹으며 사랑을 꿈꾸지만 현실은 차갑기만 하다. 자일스는 청년이 인종차별주의자에 '호모포비아'라는 사실에 절망한다. 그제야 자일스는 엘라이자를 돕기로 결심한다. 자일스 역시 엘라이자의 진심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달은 것이다.

신은 곧 사랑이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의 한 장면.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의 한 장면.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아마존에서 신으로 추앙받던 '그'는 녹색 밀림 속에서 살다가 고철 수조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런 그를 괴물로 보고 고문하는 연구소 보안 책임자 스트릭랜드는 "신은 괴물이 아니라 우리 인간처럼 생겼다"고 확신을 담아 말한다. 그러나 '그'는 직접 스스로 신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리고 '그'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신을 살려낸 것은 엘라이자의 사랑이었다. 사랑은 사랑으로 살아난다는 조금은 낯 간지러운 해석일 수 있으나 사랑의 위대함은 때로 크고 작은 기적을 만들어내지 않던가?

판타지, 영화의 위대함

엘라이자는 극장 건물의 위층에 산다. 관객이 없어도 극장은 불을 밝히고 영화를 상영한다. 자일스의 텔레비전에서도 쉬지 않고 영화가 방영된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시작부터 '영화'가 주는 환상과 즐거움을 일라이자와 자일스는 물론이고 관객에게 전달한다. 1950년대 영화는 물론이고 이 시대 음악들이 쉬지 않고 영화를 채운다. 도망친 '그'가 발걸음을 멈춘 곳도 영화관 아니던가. 영화에 눈을 뺏긴 그를 보면서 델 토로 감독이 '영화'라는 매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추신

영화의 시작과 끝, 자일스의 모놀로그에서 인용된 시는 페르시아의 시인 루미가 쓴 시다. 델 토로가 우연히 서점에 갔다가 읽게 된 시인데 '알라'를 찬양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영화와 너무도 잘 맞아 떨어지는 시가 아닐 수 없다.

"그대의 모양 무엇인지 알 수 없네.
내 곁에는 온통 그대뿐.
그대의 존재가 사랑으로 내 눈을 채우고
내 마음 겸허하게 하네.
그대가 모든 곳에 존재하기에."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강지원 시민기자의 개인 브런치에도 게재됐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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