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속 한 장면.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포스터.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주의! 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변태라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섹스에 있어 비정상은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각종 성범죄나 페도필리아(소아성애증)에 오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이 말에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이라는 전제를 붙여야 될 것 같습니다. 여하간 일평생 수많은 성도착증 환자들을 관찰한 그가 남긴 말이라니, 참 아이러니하군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을 통해 인어를 사랑하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습니다. 이 영화를 '섹스'에 대한 키워드로 풀어보고, 이에 대한 제 개인적 감상은 맨 마지막에 남기고자 합니다.

섹스란 무엇인가?

섹스란 뭘까요? 일반적으로 종족 번식 행위로 알려져 있죠.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곳곳에서 벌어질 대부분의 섹스는 2세를 만드는 것과는 보통 무관합니다. 동성애자 간 성행위의 경우는 애초부터 임신 가능성이 없죠. 도리언 세이건은 그의 저서 <죽음과 섹스>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영원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자기 유전자를 남기는 행위'로 섹스를 해석하기도 합니다. 플라톤의 저서에도 이와 비슷한 문장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오늘 죽어도 좋으니 이 사람과 시간을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어도, 죽는 게 무서워서 섹스를 한 기억은 없는 것 같군요.

인간과 유전적으로 가장 근접한 보노보 원숭이나 오랑우탄의 경우, 섹스는 친교의 의미를 가집니다. 성별과 무관하게 처음 만난 개체끼리 자위행위를 시켜주기도 하는데, 처음 본 인간 사이에서 악수를 하는 것과 그 의미가 동일하다고 하더군요. 즉 일부 종교 단체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특별히 현대 인류가 더 문란한 것이 아니라, 섹스의 목적은 이미 오래 전부터 유전자를 남기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겁니다.

특히 인간에게는 더욱 그 의미가 복합적이겠죠. 누군가는 돈을 위해, 누군가는 상대의 기분을 맞추어 주기 위해 섹스를 합니다. 인간에게 섹스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단언할 수 없습니다'라는 답밖에 낼 수가 없습니다. 다만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의 경우는, 다른 것보다, 외로움과 소통에 방점을 찍은 것 같군요. 고독과 몰이해를 치유해줄 수 있다면 그 대상은 동성은 물론이고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이 영화의 주제인 것 같습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이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인간과 관계를 가지는 인어와 더불어 노인을 등장시켰습니다. 그리고 거기 그치지 않고 종전의 전통적인 남성상에 대한 비웃음까지 더했네요. 인간의 눈으로 봤을 때 비정상적인 섹스는 만족감을 주지만, 오히려 정상적인 섹스는 불만족을 주는 장면을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쓰는 이 주제에 익숙하지 않거나 도덕적인 거부감이 있다면 이 영화를 보는 것은 아마도 꽤 고역일 겁니다.

언어장애를 가진 여주인공에게 있어 섹스란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한 장면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한 장면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이 영화는 첫 장면부터 말을 하지 못하는 여주인공이 욕실에서 자위 행위를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쩌다 하루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용변을 보는 것처럼 아침마다 일정한 시간에, 시간을 정해두고 자위 행위를 합니다. 언어 장애를 가지고 있고 연약한 인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그녀에게 보고 싶은 이미지를 쉽게 씌워버리는 주변 남성들의 시선과 달리, 그녀가 명확한 성욕을 가진 건강한 주체임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인어인간 등장 이전에 다른 남성들과 관계를 갖지 않습니다. 자신과 대화하려고도, 자신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남자들과 관계를 가지는 것보다 그녀에게는 자위 행위가 훨씬 더 이상적인 성욕 해소의 수단인 것이죠.

아기나 반려동물은 소통을 할 수 없고 귀여운 외모를 가지고 있으니, 이를 보는 상대방은 자신의 감정을 투영하기 참 쉽습니다. 그러다 아기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고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자신이 머리 속에 그려왔던 착하고 귀여운 대상에서 벗어나기 시작하거든요. 하지만 이 과정이야 말로 온전한 이해의 시작인 경우가 많죠. 아마 반려 동물이 말을 할 수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여주인공이 천사 같은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년이 거의 다 되어가는데 어린 아기 같은 취급을 받고, 사람들은 그녀의 생각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녀에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란, 닫힌 세상으로서 소통되지 않은 타자들일 뿐입니다.

그녀가 살아왔던 그 세상은 인어인간이 갇혀 있던 수족관과 같을지도 모릅니다. 바깥에서는 간헐적인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고, 타자와 소통하는 시간은 극히 짧습니다. 그나마도 온전한 애정이 아니라 호기심에 그칠 뿐입니다. 그녀가 인어인간을 처음 본 순간, 그의 눈에서 감정을 바로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처한 상황이 인어인간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주제를 지지하는 화가 노인의 등장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속 한 장면.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속 한 장면.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노인 화가는 이미 사회적인 '쓸모'가 없어진 사람입니다. 광고 포스터를 전문으로 그리던 이 화가는, 사진이 그림을 대체하게 되자 회사에서 해고를 당하게 됩니다. 몇 안 되는 기회가 생겨 힘들게 그린 그림을 납품하지만 그마저도 결국은 매몰차게 거절당하죠.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극중의 할아버지는 동성애자로 보입니다. 여주인공과 동거를 하면서도 그녀와 섹스를 시도하지도 않고, 여주인공과 인어인간의 섹스를 보고도 어떤 질투심을 느끼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를 그림으로 남기죠.

이 화가 노인을 버티게 해준 것은, 프랜차이즈 파이점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잘생긴 젊은 남성입니다. 그러나 노인 화가는 프랜차이즈 파이점에서 산 파이를 냉장고에 수북히 쌓아 놓기만 합니다. 이 노인을 동성애자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바로 이 장면 때문입니다. 실상은 이 화가 노인 역시도 프랜차이즈 파이 가게의 파이를 맛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주인공에게 이 파이를 추천하며 항상 이 프랜차이즈 가게를 방문하죠. 물론 나이가 들어, 자기 말벗을 해주는 사람에 대한 고마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먹지도 않는 파이를 잔뜩 쌓아놓을 정도의 열정은 에로스에 기반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 화가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화가 노인에게도 섹스란, 여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소통'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다만 동성애라 함은 이제 비교적 익숙한 소재이고, 인간이 아닌 존재와의 범성애에 집중한 이 영화 특성상 이 화가 남자의 에로스는 중점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소통이 된다면 대상은 누구든 상관 없다는, 이 영화의 주제를 귀퉁이에서 지탱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군요.

이 영화는 전통적인 남성성을 비웃는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속 한 장면.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속 한 장면.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영화 내내 악역으로 주인공과 인어인간을 괴롭힌 스트릭랜드는 매우 남자답게 생겼습니다. 한국 전쟁부터 지금까지 실패한 임무가 없습니다. 손가락 두 개가 잘리고도, 여자들을 만족시키는데는 문제가 없다는 마초적인 농담을 던지곤 하죠. 인간보다 신체능력이 월등한 인어인간을 산 채로 포획해왔다는 점에서 벌써 그 비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매우 성공한 사람입니다. 미국인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단발 금발 머리의 순종적인 와이프와, 두 명의 자녀, 멋진 집과 캐딜락까지 있네요. 남자다움과 사회적 성취에 집착하는 전통적 남자상의 모습이 보입니다. 하지만 정작 스트릭랜드의 인생은 삐걱거리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 사람은 온전히 소통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광고 포스터마냥 완벽해보이는 가족들은 이 남자의 외로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순종적인 금발의 부인과 관계를 가질 때, 이 남자는 이 여자의 입을 막음으로써 그녀의 자아가 삐져나오는 것을 회피하고 소통을 거부합니다. 신성한 결혼 아래 이루어진 강인한 이성애자 남성과 아름다운 여성의 섹스 보다 인간과 인어의 섹스를 더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당연히 이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전통적인 섹스의 맹점을 비웃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영화는 남성들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남성들은 권위주의적이고 소통이 전혀 안 되는 꼰대들과 사태를 주도적으로 해결할 용기라고는 전혀 없는 연약한 남자들, 이 두 부류 밖에 없죠. 화장실에 소변기 조준 하나 못 하는 존재로 비웃음 당하고 남편은 매일 앉아서 방귀를 뀌고 텔레비전이나 보는 인간입니다. 그는 경제 활동이든 집안 일이든 간에 손톱 만큼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인물로 나옵니다.

이 영화는 범성애를 다루며, 이 사회에 만연한 남자다움이라는 기준의 헛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남자는 해결사가 되기보다는 분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은 존재들이다'라고 말하고 있는것 같군요. 게다가 객체로서의 남성뿐 아니라, 실제 가부장적 가치와 강함으로 무장한 스트릭랜드의 삶 역시도 매우 비극적인 것으로 묘사하죠. 실로 기예르모 델 토로다운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속 한 장면.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속 한 장면.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동성애를 다룬 영화는 많았습니다만, 인간이 아닌 존재와의 범성애를 다룬 영화는 얼마나 있었을지 궁금하군요. 만약 영화 ET의 마지막 장면에 ET와 십대 여주인공 간의 정사가 등장했다거나, 에일리언이나 프레데터가 인간 여성과 성행위를 하는 장면이 나왔다면 어떨까요. 아마 이 작품들은 희대의 괴작으로 명성을 얻었을 것이고 영화사적으로 화끈한 획을 그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겠죠.

<셰이프 오브 워터>는 그런 면에서 신선합니다. 영상도 아름답고요. 다만 좀 단순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가 보았던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들은, 감히 "주제가 무엇이다"라고 말하기 어려웠거든요. 여러 가지를 복합적으로 다루면서도, 그게 전혀 어색하지 않고 유려하게 흘러가는게 제가 좋아하던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입니다. 영화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가 그랬고 <오퍼나지-비밀의 계단>이 그랬죠. 사실 요즘은 이 감독 영화가 전보다 심심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이 같은 감상은 제가 이성애자 남성이라는 한계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그럼에도 충분히 즐길만한 영화이고요. 이 영화를 기점으로 좀 더 많은 범성애적 영화가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시도만으로도 좋았다고 평가합니다.

쉐이프 오브 워터 범성애 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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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투자자, 소설가, 아마추어 기자. "삶은 지식과 경험의 보고(寶庫)이자 향연이다. 그러므로 나 풍류판관 페트로니우스가 다음처럼 말하노라." - 사티리콘 中 blog.naver.com/admljy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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