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작품 포스터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작품 포스터 ⓒ tvN


최근 십 년에 걸쳐 이른바 '일상물' 장르가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이다. '일상물'이란 말 그대로 잔잔하게 흘러가는 일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러한 작품들은 대부분 큰 갈등 없이 행복하고 평범한 결말을 맞는다. 이를테면 드라마에선 <응답하라> 시리즈가 있고, 영화에선 <최악의 하루>나 <4월 이야기>, 애니메이션에선 <논논비요리>와 <나츠메 우인장>, 웹툰에선 <마음의 소리>나 <가우스 전자> 등이 있다.

사실 이러한 작품들은 전통적인 이야기의 구조에 약간의 변형을 줬다고 볼 수 있다. 본디 이야기라 함은 <호메로스 서사시>나 <오디세이아>와 같은 그리스 고전에서도 알 수 있듯, '영웅이 시련을 겪으며 성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영웅에게 자신을 투영해 어려운 현실을 헤쳐 나가는 '꿈'을 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일상물의 유행은 더는 영웅이 없다는 뜻일까? 혹은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는 뜻일까?

아마 후자에 동의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이 늘 그렇듯, 산다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지금 이때'가 가장 고달픈 법이다. 따라서 전자의 맥락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데, 왜 영웅이 나올 수 없게 된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 이전에 영웅이라는 단어에 대해 개념을 정립해보자. 영웅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영웅이란 '남들이 쉽게 해내지 못하는 것을 해내는' 사람이다. 기록상에 남겨진 최초의 영웅 '길가메시'부터 최근 개봉한 마블의 영화 <블랙팬서>나, <배트맨 대 슈퍼맨> 속 두 인물이 대표적이다.

모두 힘이 세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신과 함께>에서 귀인으로 나오는 주인공도 영웅이다. 힘이 있어도 올바른 곳에 사용하지 않으면 영웅이 아니다. 힘이 약해도 그 작은 힘이나마 올바른 곳에 사용한다면 그 누구도 영웅이라 불릴 수 있다. 즉 일반적인 영웅의 정의란 두 가지로 나뉘게 되고, 그것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인기의 정도가 달라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까 최근 십 년간 마블의 히어로 영화가 강세를 보이는 것은 그중 '힘'의 영웅이 주목받고 있다는 뜻이다.

삶이 힘들 때 영웅은 나타난다

 영화 <블랙 팬서>의 작품 포스터

영화 <블랙 팬서>의 작품 포스터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힘의 영웅은 우리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을 때 인기를 끈다. 위에서 언급한 대표적인 두 영웅 슈퍼맨과 배트맨은 2차 세계대전의 전후인 1930년대에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원작 코믹스의 팬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으니 세세하게 짚고 넘어갈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이 전쟁 중의 사람들에게 어떤 꿈을 꾸게 해주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두 사람의 성향은 다르나, 결정적으로 강력한 힘(돈을 포함해서)으로 '악인'을 처단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전쟁이란 단순히 사회적 문제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가항력'의 '사건'에 가깝다. 여러 가능성과 역학관계가 결합된 '전쟁'이라는 현상은, 마치 지진이나 토네이도처럼 대지를 휩쓸고 가는 재앙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0년대의 대공황을 거쳐 2차 세계대전을 맞이했다는 사실,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얼마나 핍진하고 고단한 삶을 살았을지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런 무기력한 삶,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현실에 '강한 펀치'를 날려 변화를 끌어내고 싶어 했을 것이다.

마블의 유행이란 그것이다. 우리는 지금 '변화하지 않는 부동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사회가 변화할 것이라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면 '힘없는 올바른 영웅'이 유행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비교적 최근에 흥행했던 <변호인>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런데 그 영화가 인기를 끌었음에도 그러한 풍조가 영화계에 퍼지지는 못했다. 이른바 '반짝 흥행'이었고 예외적인 경우로 평가되었다. 물론 당시의 사회적인 맥락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지만 영화 자체로만 보아도 그것이 어떤 현실을 반영하는지 어느 정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한 목소리가 이례적이고 예외적인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변화는 부동에 속하게 된다. 쉽게 말해 '어차피 변하지 않을 것 같다'며 환영쯤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이다.

결국 최근 <신과 함께>의 유행은 그러한 풍조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영화 속에서 나타나는 불교적 세계관이란 '내세의 잘못을 후세에 심판받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맥락을 제하고 객관적으로 사실여부만을 따져볼 때, 사후 세계에 대해 '갈 수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기에 사실상 '확정되지 않은' 것에 책임을 미룬다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

따라서 <신과 함께>에서 나타나는 귀인의 모습이란, 살아있던 당시에 현실을 바꾸지 못하고 다음 세상에서야 비로소 현실을 바꿀 힘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작품상에서도 그런 맥락으로 묘사되나, 수십 년 만에 한 번 환생하게 된다는 귀인이라는 단어가 발목을 붙잡는다. 그것마저 무척 이례적이고 불확실한 일인 것이다.

정리하자면 마블 영화와 <변호인>, <신과 함께>의 흥행은, 지금 우리 사회가 '사회 근본을 변화시킬 구원자'를 상정하는 동시에 '사회 근본에 부닥쳐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절망감'을 갖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두 문장은 서로 상충하는 것이지만, 전자에 힘이 실려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할 수 없는 것'이라 느끼지만, 그 와중에도 힘세고 의로운 영웅상을 그리고 있다.

일상 없는 일상물의 의미 

 영화 <신과 함께>의 작품 포스터

영화 <신과 함께>의 작품 포스터 ⓒ 롯데엔터테인먼트


그런 맥락에서 일상물의 유행을 읽어낼 수가 있다. 영웅 이야기의 변형, 정반대의 노선을 걷는 것처럼 보이는 '일상물'은 사실 의미상으로 비슷하다. 일단 현대의 일상물에 공통으로 관찰되는 특성이 '현실'에서 '비현실'로 변화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 부모님 세대에서 가장 유명한 일상물, <전원일기>가 정겨운 농촌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일상물 <미생>과 <응답하라>시리즈가 정말로 '일상'이느냐고 묻는다면, 사람들 사이에 이견이 갈릴 것이다. 그건 우리가 아는 당시의 현실과 드라마 속 현실의 이미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통계적으로 보았을 때 '고졸' 장그래의 대기업 입사담은 현실의 우리에게 전래동화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사회운동이 제외된 '성북동'의 모습은 <1987>의 모습과 괴리감이 느껴질 정도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우리와는 다른 '평행세계'처럼 느껴지거나 혹은 일부러 후미진 곳을 조명하지 않으려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것은 사회적 문제에 정면으로 대립하던 영웅물과는 정반대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상이해 보이는 두 장르가 어쩌면 <신과 함께>의 그 풍조와 비슷하게 보이기도 한다.

<신과 함께>는 귀인 '김자홍'이 저승의 관문을 거쳐 환생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앞서 말했듯 이것은 해결되지 않은 현세로부터의 도피로 보이는 맥락이 있다. 그런데 저승이란 살아있는 우리로선 확언할 수 없는 공간이며 따라서 일종의 평행세계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여기서 일상물의 기조를 읽어낼 수 있다. 일상물이 평행세계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 혹은 해결되지 '않을' 문제로부터 도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말하자면 '다시 태어나는 것'만이 답이라는 뜻이다. 이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더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우리에겐 단지 불변에 부닥치고 풍파에 쓰러지는 삶만이 있을 뿐이다. 영상 속에서 가상 세계를 구현하고 현실의 자신과는 다른, 새로운 영웅으로 태어나는 것. 이것이 요즘 세대의 일상물의 풍조다. 그것도 큰 문제가 아니라 아주 소소한 문제를 해결하는 영웅이다. 말하자면 '시민'이 아니라 '소시민'이며 '삶의 소소한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지금 시대의 영상 매체는 극과 극으로 치닫고 있다. <원펀치 맨>의 경우처럼 모든 것을 박살내고 싶어 하거나 <킹스맨>, <데드풀>, <킥애스>의 경우처럼 정의에 얽매이지 않는 반(反)영웅이 대세다. 그 이면은 다시금 영웅물과 일상물로 나뉜다. 이러한 작품들을 틈새시장을 공략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영웅 서사의 맥락으로 보면 달리 보이는 게 사실이다. 기존의 영웅들은 정의와 도덕, 각종 현실 문제에 부닥쳐 제때에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못한다. 이를테면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에서 나타나는 대립 양상이 대표적으로, 그 영화에서는 '히어로가 법안의 관리 아래에 놓여야 한다'는 게 주요 테제다. 다시 말해, 위기 상황에서 먼저 행동하느냐 아니면 행동 권한을 얻고 행동하느냐의 차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 혹은 자구권이다.

그 말인즉슨 여러 규약에 얽매여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것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어떠한 오류에 직면하게 된다. 사회가 발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오류다. 그러나 이것은 법이 제정되고 분위기가 확정되는 과도기의 현상임에 틀림없다. 아직은 미숙한 법과 넓은 간극의 인식 사이에서 판단을 유보하고 갈팡질팡하게 되기 때문이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퍼지고 있는 성 평등 인식과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가 대표적이다. 우리는 분명 이것을 포함한 역설들이 나아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애니메이션 <뉴 게임>의 작품 포스터

애니메이션 <뉴 게임>의 작품 포스터 ⓒ 토쿠노 쇼타로 원작 & 동화공방 제작


계속해서 실패하는 삶이란 

철학자 니체의 발언에서 이것을 짊어보자면 조금은 특수하게 보이는 게 사실이다. 니체의 유명한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그렇게 말했다>에서는 '영원회귀'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끝없이 반복되는 삶이라면 최고의 선택을 하라는 뜻이다. 쉽게 말해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배우자랑 결혼할 것인가?'의 맥락이다. 단언컨대 니체의 영원회귀는 끝없는 일상이 반복되는 현대의 일상물에 쉽게 도입될 수 있다. 하지만 도입만이 가능할 뿐 그 이상을 보지는 못한다. 앞서 말했듯이 현대의 일상물은 '현재의 책임'을 끝없이 뒤로 미루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국형 일상물의 대표인 홍상수의 작품을 예로 들어보자. 홍상수의 작품 전반에서 인물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자각하기도 하지만 끝내 변하지 않는다. 홍상수의 작품이 비판받는 지점 중의 하나는, 그러한 책임 의식의 부재에 있다. 홍상수는 인물의 영원회귀를 통해 우리가 갖는 삶의 모순을 지적하지만, 끝내 그가 하는 선택을 '후대의 것'으로 치워 둔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해결책이 못 된다. 그러한 '굴레의 업'을 제시함으로써 관객이 무언가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이미 마블 영화의 유행을 통해 '변하지 않는 사회의 현기증'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기증을 표현하자면 마치 '반복해서 노력하지만 계속해서 실패하는' 것과 같다. 이를테면 젊은 층에게는 계속되는 구직난일 것이고 청소년층에게는 반복되는 시험에 대한 불안일 것이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이전부터 있었지만 이제서야 비로소 조명 받는 것은, 단지 문제가 그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라 추측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미디어와 매체의 발달을 통해 하나의 '현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 현상은 스마트폰이라는 공유 기기를 통해 나타난다. 스마트폰은 영상물을 널리 확산시키는 데 공헌했고, 사람들 간의 소통 또한 그렇다. 하지만 정작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삶을 반복하며 문제를 회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정해볼 수 있다.

영웅물과 일상물, 영상 매체와 일상, 둘 중 어느 곳으로 가더라도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회피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누군가에게 문제해결을 대리하거나 혹은 문제가 제거된 가상의 공간을 가정하곤 하는데, 그때 영원회귀의 선택이란 저 어딘가로 사라지고 만다. 그 선택은 마치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동시에 끊임없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 과정에서 언젠간 닳아 없어져 버릴 고무벨트에 걱정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는 일상물을 보며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있지만, 언젠가 맞닥뜨릴 현실에 대해 미리 준비해두어야 할 것이다.


영화 신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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