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서울 올림픽은 냉전시대 반쪽 올림픽으로 열린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년 LA올림픽을 지나 역대 최대 규모로 치러진 올림픽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졌다. 당연히 개최국인 한국은 좋은 성적을 올려 세계만방에 한국 스포츠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싶었고 이 때문에 남다른 각오로 대회에 임했다. 성적에 대한 열정(?)이 과하다 보니 복싱 미들급 결승전처럼 편파판정이 나오는 부작용도 있었다.

그렇게 비장하게 임한 서울 올림픽에서 한국 국민들이 거의 유일하게 마음을 졸이지 않고 편안하게 관전했던 경기가 있었다. 바로 한국 선수들끼리 맞대결을 펼친 탁구 남자단식 결승이었다. 무서운 신예 유남규와 백전노장 김기택의 맞대결로 치러진 한국 선수끼리의 금메달 결정전은 어느 쪽에서 득점이 나와도 관중석에서 뜨거운 박수가 나왔다. 어쩌면 우리 국민들이 올림픽을 '축제'로 즐겼던 유일한 경기였을지도 모른다.

30년 만에 다시 한국 땅에서 열리는 2018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도 우리는 서울 올림픽 탁구 남자 단식 결승 같은 장면을 자주 목격할지도 모르겠다. 동계올림픽 최고의 효자종목 쇼트트랙에서 말이다. 물론 쇼트트랙은 결승에서 최소 4명의 선수가 레이스를 펼치기 때문에 한국 선수끼리 1: 1 결승전을 치를 일은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 여자 쇼트트랙의 두 기둥 심석희와 최민정은 평창에서 세계 쇼트트랙 여왕 자리를 놓고 선의의 경쟁을 펼칠 것이다.

한국 여자 쇼트트랙에 등장한 175cm 장신 여왕

 심석희는 한국 쇼트트랙에서 일찍이 없었던 유형의 선수다.

심석희는 한국 쇼트트랙에서 일찍이 없었던 유형의 선수다. ⓒ 평창올림픽 공식홈페이지 화면캡처


지난 1992년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쇼트트랙이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면서 한국은 쾌재를 불렀다. 체구가 작고 순간 스피드가 뛰어난 한국 선수들에게 쇼트트랙은 맞춤 종목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쇼트트랙은 한국과 중국 등 체구가 작은 동양 선수들이 세계 무대에서 메달을 독식하곤 했다. 가끔씩 북미나 유럽에서도 세계적인 선수들이 등장하곤 했지만 체구가 큰 선수는 거의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시니어에 데뷔할 때 이미 신장 173cm에 달했던 심석희는 쇼트트랙 선수로서 매우 불리한 체격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심석희에게 체구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심석희는 시니어 데뷔 무대였던 2012-2013 시즌 월드컵에서 종합 우승을 차지하며 화려하게 데뷔했고 2013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1500m 2위, 3000m 1위에 오르며 종합3위에 올랐다. 당시 심석희는 막 중학교를 졸업한 어린 소녀였다.

심석희는 2013-2014 시즌에도 월드컵에서 9번의 1위를 추가하며 종합우승을 차지했고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서는 1000m 동메달,1500m 은메달에 이어 3000m 계주에서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특히 3000m 계주 결승에서는 마지막 한 바퀴를 남겨두고 아웃코스로중국 선수를 추월하는 '분노이 질주'를 선보이며 한국의 역전 금메달을 견인했다. 경기 막판 아웃코스 추월은 올림픽 같은 높은 레벨의 대회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심석희는 올림픽이 끝나고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1000m와 1500m, 3000m, 종합 우승을 휩쓸며 한국 쇼트트랙의 에이스로 우뚝 섰다. 물론 심석희가 올림픽의 여운을 느끼는 사이 최민정이라는 무서운 신예가 등장해 심석희의 자리를 위협했지만 심석희도 꾸준한 세계적인 기량을 유지하면서 최민정과 함께 세계 최강의 자리를 다퉜다.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도 유력한 다관왕 후보로 꼽히는 심석희는 지난 1월 코치에게 폭행을 당하는 사건으로 선수촌을 이탈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심석희는 세계적인 선수답게 훌훌 털고 복귀해 다시 담대하게 훈련에 집중하며 올림픽을 기다리고 있다. 아웃코스에서 추월하는 능력도 발군이지만 경기 초반부터 선두에서 레이스를 이끌어가는 능력까지 겸비한 심석희가 평창에서 자신의 커리어에 몇 개의 올림픽 메달을 추가할 수 있을지 기대된다.

'리틀 진선유' 최민정, 진선유처럼 금메달 쓸어 올까

 최민정은 한국 쇼트트랙의 여왕 계보를 잇는 전이경과 진선유의 스타일을 많이 닮았다.

최민정은 한국 쇼트트랙의 여왕 계보를 잇는 전이경과 진선유의 스타일을 많이 닮았다. ⓒ 평창올림픽 공식홈페이지 화면캡처


2000년대 여자 쇼트트랙의 간판스타 중 한 명인 최은경은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2번이나 종합 우승을 차지했고 올림픽에서도 3000m 계주에서 2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하지만 비슷한 또래에 고기현이나 진선유 같은 몬스터(?)들이 존재했던 바람에 올림픽 개인전에서는 은메달 2개에 만족해야 했다. 대단한 선수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올림픽 개인전 금메달이 없는 것은 최은경의 선수생활에 '옥에 티'로 남았다.

최민정에게도 바로 한 살(학년으로는 두 학년) 위에 심석희라는 엄청난 선수가 있다. 하지만 최민정은 당당히 선배와 경쟁해 심석희를 위협할 만한(때론 능가하는) 수준의 선수로 성장했다. 심석희가 쇼트트랙 선수로는 매우 큰 신장(175cm)을 바탕으로 선이 굵은 레이스를 펼치는 '돌연변이'라면 최민정은 전이경과 진선유로 이어지는 한국 여자쇼트트랙의 계보를 잇는 '정통파 에이스'다.

소치 올림픽이 끝난 2014-2015 시즌부터 대표팀에 승선한 최민정은 2015년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1000m와 3000m, 3000m 계주를 휩쓸며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최민정은 2016년에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종합우승을 차지했는데 한국 선수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2년 연속 종합우승을 차지한 것은 진선유(2005~2007년 3연패) 이후 9년 만이다.

최민정은 여느 한국 선수들처럼 스타트에 다소 약점이 있지만 순간 스피드가 워낙 좋아 단거리인 500m에서도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최민정은 500m에서 월드컵 통산 3회 우승 경험이 있는 만큼 평창에서도 500m에서 메달을 기대해 볼 수 있다. 만약 최민정이 가장 먼저 열리는 500m(13일 결승 예정)에서 좋은 성과를 올린다면 다관왕의 가능성도 더욱 커진다.

심석희와 최민정은 개인전에서는 선의의 경쟁을 펼치겠지만 3000m 계주에서는 한국의 올림픽 2연패를 위해 힘을 모을 것이다. 특히 쇼트트랙 계주 경기는 단순히 바통을 주고받는 육상과 달리 다음 주자의 엉덩이를 밀어주는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선수들 사이의 작전과 호흡이 매우 중요하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기량을 자랑하는 두 쇼트트랙 여왕이 모두 한국 선수라는 점이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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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심석희 최민정 라이벌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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