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세월은 막지 못한다. 그러나 흘러가는 세월 속에 잊지 말아야 할 혹은 잊지 못할 기억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자신에게 행복을 준 잊지 못할 기억, 기억하기도 싫은 가슴 아픈 기억, 그리고 아쉬워서 잊지 못할 기억 등 인간의 뇌리 속에 박힌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애처롭게 느껴지는 것이 아쉬워서 잊지 못할 기억이다. 기자에게 아쉬운 기억은 야구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응원하는 팀이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던 순간의 눈앞에서 안타깝게 놓쳐버리는 경우도 많았으나, 한 사람의 인생 전반을 살펴볼 때 '잘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선수가 아쉽게 기억의 저편으로 없어질 때만큼 더욱 아쉬운 기억이 있을 리가 없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인간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줄 때만큼 기쁜 일이 또 있을까. 그런 면에서 야구선수는 이름값으로 먹고 사는 직업이다. 하지만 야구선수만큼 팬들의 기억 속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어려운 직업이 또 있을까.

'경쟁률'을 따져보았을 때 '공부가 제일 쉽다'는 어른들의 말씀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다. 야구를 보면 60개가량의 엘리트 고교야구 팀에서 날고 긴다는 선수들만 대학 혹은 프로 팀에 올라설 수 있다. 또 전국에서 '야구 좀 했다'는 선수들만 모인 곳에서 두드러지는 능력을 보여줘야 1군에 올라서게 된다. 그중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위치별로 최고로 인정받으면 주전이 되어 비로소 그라운드를 밟을 수 있다. 물론, 열 개 팀의 각 포지션별 선수 혹은 전체 선수들과 경쟁을 해야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힘겹게 그라운드를 밟았다고 해도 이듬 해부터 들어오는 후배들 또는 용병 선수 중에 더 나은 선수가 있으면 금세 밀려나야만 하는 것이 프로야구 무대이다. 그렇게 밀려난 선수에게 '이 선수 있었나?', '이 선수 뭐하지?'라며 잠시나마 기억하고 다시금 사라지는 기억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밀려난 선수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는 것이 팬들이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하는 선수의 이름은 한정적이며 야구선수로서 이름을 팬들에게 각인시키는 것이 그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야구선수는 자기 자신의 한계와 싸우고 팀내 경쟁자와 승부하지만 더 긴 시간 동안 상대팀과 그리고 세월과 맞서 싸워야만 한다. 그리고 아쉽게 싸움에 진 장수들을 이 글에서 소개해 보려고 한다. 필자의 영웅들이 되었을 수도 있었던 전장 위의 야구선수들. 아쉽고 아쉬워 더욱 애처롭게 느껴졌었던 선수들을 4편에 걸쳐 소개하겠다. - 기자 말

한파를 피해가지 못한 '속초출신' 양훈, 다시 유니폼을 입은 모습을 볼 수 있을까
 
투수는 키가 클수록 유리하다. 타자는 움직이는 공을 쳐야 하고 공을 놓는 타점이 높은 키가 큰 투수의 투구는 타자를 힘들게 한다. 또한 실제로는 스트라이크처럼 날아오는 공처럼 보이는 투구가 높은 볼일 경우가 있으며 타자의 무릎쪽에 걸치는 듯한 스트라이크처럼 보이는 투구가 낮은 볼일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점을 잘 이용하면 투스트라이크 이후 높은 직구와 떨어지는 포크볼 같은 변화구로 타자들을 현혹시켜 승부를 유리하게 이끌어갈 수 있다. 대표적인 투수가 KT 위즈와 계약한 더스틴 니퍼트였다. 기본적으로 프로야구장 규격상 투수들의 투구를 돕기 위해 마운드가 높이 솟아있기도 하다.

프로필상 192cm, 103kg의 건장한 체구를 지닌 양훈은 키가 큰 투수의 이점을 잘 활용할 수 있었던 투수였다. 우수한 체격조건만큼 가능성 또한 무궁무진하였다. 한화 이글스 연고지인 충청도 출신이 아닌 강원도의 속초상업고를 졸업하고 2005년 신인드래프트에서 2차 1라운드 전체 4순위로 입단했다. 입단 첫 시즌 11경기에 선발로 출장하여 71이닝 3승 6패 방어율 5.83을 기록했다. 이후 선발과 중간계투요원으로 지속적으로 경기에 출장하다가 2009년 본인의 가치를 입증할 수 있었다.

시즌에 앞서 성적부진과 팔꿈치 부상으로 스프링캠프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대전야구장에 임시로 설치한 비닐하우스에서 한용덕 2군 투수코치와 특훈을 하며 시즌을 준비했다. 그 결과 130km 후반에 머물렀던 직구 구속을 시즌 중 평균 145km 최고 152km까지 기록하는 등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본격적인 불펜투수로 활약하며 67경기에 출장, 3승 6패 1세이브 11홀드 방어율 4.38을 기록했다. 90⅓이닝을 책임지며 홀드부문 리그 9위를 기록했다. 이닝 수는 불펜 투수 중에서 SK 전병두(133⅓이닝), SK 이승호(106이닝), 두산 이재우(97⅓) 등에 이어 리그 6위였다. 출장 경기 수는 SK 이승호(68경기)에 이어 2위였다. 혼자서 한화의 중간계투진을 이끌어 '양노예(양훈+노예)'라는 별명이 생기기도 하였다.

2011시즌에는 다시 선발투수로 복귀하여 6승 10패 방어율 4.28을 기록했다. 143이닝을 책임져 데뷔 이후 처음으로 100이닝을 넘겼다. 2011년 5월 28일 잠실 두산전에서 9이닝 동안 4피안타 6탈삼진 무실점으로 1128일만의 선발승, 개인 첫 정규이닝 완봉승을 장식했다. 7월 5일 대전 LG전에서는 10이닝 동안 6피안타 1볼넷 7탈삼진 1실점으로 괴력투를 펼쳤다. 총 투구수는 125개였고, 10회에도 146km를 기록하는 등 묵직함을 보였다.

2012시즌을 마치고 경찰청 야구단에 입대한 양훈은 북부리그 다승왕을 기록하며 복귀 후의 활약을 기대했지만 부진을 거듭했다. 결국 좌타거포와 포수를 필요로 했던 한화는 2015시즌 도중 양훈을 넥센 히어로즈로 내주며 이성열과 허도환을 받아왔다.

지난 시즌 직구 최고 구속이 135km에 머물고 제구가 되지 않으며 2군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던 양훈은 넥센에서 방출을 당했다. 지난 8일 서산구장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 트라이아웃에 모습을 드러냈으나 한용덕 감독 등 코칭스태프는 양훈의 투구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는 내리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 어느 때보다 추운 올 겨울, 양훈은 방출 통보를 받은 채 마지막 희망을 위해 애쓰고 있다. 다시 유니폼을 입고 도약의 날갯짓을 하기 위한 양훈의 2018시즌은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한화 소속 통산 271경기 출장 32승 48패 11세이브 21홀드 방어율 5.06.

'외유내강'을 꿈꿨던 잠수함 투수, 연천 미라클 투수 허유강
 
'서브마린'이라 불리는 사이드암·언더핸드 투수는 매력적이다. 몸을 비꼬아서 던지며 타자를 비웃듯이 느리게 날아가는 변화무쌍한 투구는 얕잡아 보면 큰코 다치는 스타일이다. 보기에는 우습고 구속이 느린 사이드암·언더핸드지만 타자들의 방망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외유내강'형 투수들이다.

허유강은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2009년 신인드래프트에서 한화 이글스에 2차 2라운드 전체 11순위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 대학시절 국가대표에서 선발투수로도 활약했던 그는 프로에 입단한 이후에는 줄곧 불펜투수로만 뛰었다.

직구와 체인지업, 싱커를 주무기로 던졌던 허유강의 문제점은 제구력이었다. 2009시즌 이닝당 볼넷허용률(BB/9)은 4.77이었고 2010시즌은 3.89였다. 데뷔 첫 등판에서는 세 타자 연속 사구를 던지기도 하였다.

2014시즌을 앞두고 경찰청 야구단에서 제대한 허유강은 2014시즌 1경기, 2015시즌 5경기만을 출장한 채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2015년 11월 30일 한화 구단으로부터 웨이버 공시되었다. 당시 결혼을 5일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안타까움을 더했다.

야구에 대한 꿈을 접지 못한 허유강은 독립야구단 연천 미라클 트라이아웃에 참가하며 의지를 불태웠다. 이후 지난해 7월 23일 방영된 KBS2 <다큐멘터리 3일 : 힘내라! 미라클 - '독립야구단' 연천 미라클>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후배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여 허유강의 소식을 잠시나마 접할 수 있었다. 통산 기록은 75경기 출장 2승 2패 4홀드 방어율 6.23. 

검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7억팔' 유창식

한화 이글스의 15번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대성불패' 구대성이 한국에서 선수로 뛰던 시절 등번호로 달고 활약했으며, '괴물' 류현진이 입단한 후 잠시동안 달았었다. 그리고 2010년 9월 3일 구대성이 한국에서의 현역선수 은퇴식을 가지면서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지 않았다. 은퇴 몇주 전 열린 기자회견에서 구대성은 "영구결번은 구단에서 결정할 일이나 후배가 원한다면 물려주고 싶다"며 "내 번호를 달고 잘한다면 나도 유명해지는 것 아닌가"고 말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유창식이었다.

고교 시절 유창식은 '탈고교급'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150km를 넘나드는 직구와 136km의 빠른 슬라이더가 장점이었다. 특히 마운드에서 고교선수로는 드물게 여유가 느껴지고 노련한 경기운영능력을 겸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3학년이던 2010년 KBS 고교야구 최강전과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최우수 선수상에 뽑혔다.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장충고와의 결승전에서 9이닝 10탈삼진 완봉승을 기록하는 등 30이닝 3승 방어율 0을 기록했다.

2011년 신인드래프트에서 야구명문 광주일고를 졸업하고 전체 1순위 지명을 받고 한화 이글스에 입단했다. 한화 이글스가 유창식의 손에 쥐어준 금액은 7억 원이었다. 당시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러브콜이 있었던 유창식이 한국에 남아준 것에 대한 프리미엄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한기주의 10억 원에 이은 역대 두 번째 기록이었다.

류현진과 좌완 원투펀치를 이룰 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1승에 그쳤고, 이후 부상과 부진이 겹치면서 기대 이하의 성적을 냈다. 2015시즌 도중 김광수, 오준혁, 노수광과 함께 기아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됐다.

고향 팀으로 이적했지만 야구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한화 시절 승부조작 혐의가 발각된 것이다. 유창식은 한화 소속이던 2014년 4월 1일 삼성 라이온즈 박석민에게 볼넷을 내주는 승부조작을 한 후 브로커에게 500만 원을 받았다고 KBO에 자수했다. 또 같은 해 4월 19일 LG 트윈스를 상대로 승부조작에 가담하여 300만 원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KBO가 정해진 자수기간 중 자진신고 한 유창식에게 법원은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KBO는 3년 실격 제재라는 징계를 부여했다.

프로야구 선수로서 치명적인 오점을 남긴 유창식은 독립야구단인 저니맨 외인구단에 입단했다. 타자로 전향하기도 했던 유창식은 다시 한 번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지난해 1월 12일 오전 6시쯤 자신의 집에서 여자친구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2017년 11월 9일 대전지법 제11형사부는 지난해 11월 9일 유창식에게 징역 2년 6개월과 성폭력치료프로그램 40시간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전국무대를 누렸던 '제2의 류현진' 유창식, 김광현을 넘어서고 싶어했던 젊은 유망주는 검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죄질이 나쁜 전과자로 기억되었다. 또한 한국 야구사에 한 획을 그은 레전드의 등번호마저 더럽힌 선수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한화 소속 통산 107경기 출장 16승 27패 방어율 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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