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전혀 공감이 가지 않는다. 말도 안 돼서가 아니라, 마음을 둘 곳이 없어서다. 분명 이창동 영화의 주인공은 우리 주변 사람처럼 흔하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평범하지 않고, 친하게 지내기 꺼려진다. 이창동 영화에서 주인공은 항상 순박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오아시스>) 그들은 자신이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아 떠난다. (<박하사탕>)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되며 주인공의 치부가 드러나고, 그들은 세상에 무언가를 빼앗긴 피해자에서 빼앗은 가해자가 된다. (<시>) 그리고 그 가해행위엔 그들 자신의 의지가 온전히 반영되어 있지 않다. (<밀양>) 타인이나 단체로부터 떠밀린 선택이거나, 선택지가 그것 하나밖에 없어서 선택한다. (<초록물고기>) 우리는 그들을 이해하는 동시에 경멸해야 하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이창동의 영화는 불편하다. 우리 주변에 살지만, 만나서는 안 될 인물을 스크린 위에 올려놓는다.

이창동의 인물과 형상

 영화 <오아시스>의 한 장면

영화 <오아시스>의 한 장면 ⓒ 이창동


이창동 영화가 타 영화와 차별화되는 게 그것이다. 그들이 정말로 대한민국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 같지만, 가슴 속에 와 닿지는 않는다. TV 채널 돌리듯 그들 이야기에서 눈을 돌린다. 정말로 있을법한 일이지만, 저건 이야기일 뿐이라며 거짓으로 치부해버리고 만다. 말하자면 현실 도피, 그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느끼는 불편함을 외면하기 위해서다.

우리에게는 그들을 이해할 마음, 이야기를 들어줄 마음이 없다. 어차피 답이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혹은 도와주려면 상상도 못할 노력이 필요해서. 우리에겐 길거리에 쓰러진 행인을 도울 때와 같은 당위성조차 없다. 만약 우리가 잊지 않고 기억한다면 우리에게 죄책감으로 남을 그들은, 우리가 그들을 잊음으로써 구천을 떠도는 망령이 된다. 이에 관해서 조선희 평론가의 멋진 말이 있다.

"90년대 이후의 한국영화 문제작들이 수많은 캐릭터들을 생산해냈지만, 그 인물들 가운데 대다수는 그야말로 트렌드 따라 왔다가 트렌드 타고 사라졌다. 그런데 유독 이창동의 인물들은 다들 주민등록번호와 주소가 정확히 찍힌 주민등록증 하나씩 지갑 안에 넣고 우리 주위에 섞여서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씨네21, 조선희 전 편집장, "<오아시스>를 보고 새로 쓴 조선희의 이창동론", 2002.08.09.)

우리는 이창동의 영화에서 사라져 가는 이웃을 보고 있다. TV 프로그램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오는 구구절절한 사연들, 밥을 굶는 A양과 B할머니, 돈이 없어 수술을 못하는 C군. 방송이 나오면 막대한 후원금이 쏟아지는데, 관심은 그때뿐이다. 우리에게 그들의 모습은 한낱 TV에 나오는 사회적 현상에 불과하지 않은가? 우리는 티브이 너머에 있는 그들이 정말로 실존하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돈을 보낸다. 그렇다면 우린 누구에게 돈을 보내고 있는 것일까. 막연하게 티브이가 그들이 있는 것처럼 묘사하니, 그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치 다큐와 같은 이창동 영화

 영화 <오아시스>의 한 장면

영화 <오아시스>의 한 장면 ⓒ 이창동


외면 받는 이들을 쫓아간다는 점에서 이창동 영화는 다큐멘터리적인 성격이 있다. 그러나 이창동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다큐멘터리는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 하지만 이창동의 영화에서 메시지는 불분명하다. 발신지가 있지만 수신지가 명확하지 않다. 반박에 반박을 거듭하는 이창동의 이야기는 쉽게 건드려서 안 될 만큼 꼬여있다. 그것은 곧 우리 사회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느 선을 잘라내야 이 폭탄이 터지지 않을까. 어디서부터 꼬여버린 것일까.

결국 이창동 영화는 '반성의 영화'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창동 영화에서 인물들은 끝없이 선택하고 끝없이 후회한다. 그들은 그냥 평소처럼 살아가는데, 그들을 둘러싼 것들이 더 극성이다. 그들은 우리 없이도 잘 살아가는데, 굳이 나서서 피해를 준 건 아닐까. 그러한 느낌이 우리로 하여금 이창동 영화를 관찰하게 한다. 관찰은 하되, 개입은 하지 말자는 다짐을 하게 된다.

우리가 스크린 속 그들의 옮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워진다. 그 부끄러움은 영화관 밖을 나서도 계속된다. 우리는 스크린이 그들과 우리의 경계를 나누는 것처럼 세상과 얇은 막을 두어 타인과 '거리를 둔 채' 살아가고, 영화관 밖에서 얇은 막이 스크린처럼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때 우리는 타인에게 무신경하게 살아왔던 자신이 부끄러워지게 된다. 스크린과 얇은 막 중, 어느 쪽이 영화인지 되묻게 된다.

오아시스는 고발적인 영화일까

 영화 <오아시스>의 한 장면

영화 <오아시스>의 한 장면 ⓒ 이창동


<오아시스>의 종두(설경구 분)는 사회 부적응자다. 뺑소니로 감옥에 들어가 이제 막 감옥에서 출소했다. 형 집에 얹혀살았으나 출소 후 찾아가니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형이 갚아줄 거라며 식당에서 무전취식을 한다. 종두와 연을 끊으려 몰래 이사했던 가족은 경찰의 연락을 받고 탐탁지 않아 한다. 종두에게 직장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다. 그러던 어느 날, 온종일 집에 있던 종두는 아무런 대책 없이 자신이 낸 교통사고 피해자의 집에 찾아간다.

여기까지만 보면 종두가 사람 되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총체적 난국, 사실 종두는 형 대신 감옥에 간 것이다. 종두가 찾아간 피해자 가족은 뇌성마비 환자 '한공주(문소리 분)를 이용해 장애인 아파트에 산다. 단속반이 올 때만 한공주를 데려오곤, 금세 누추한 옛집에 데려다 놓는다. 그 누추한 집 화분에 놓인 열쇠로 집안에 들어간 종두는, 홀로 있는 한공주를 강간하려 한다. 하지만 한공주의 모습에 반한 종두가 행동을 멈추고, 한공주도 종두에게 반하게 된다.

지금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 혹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당신은 어느 부분에 태클을 걸 것인가? 공주가 강간미수범과 사랑에 빠지는 부분? 종두가 뇌성마비 환자에게 성욕을 느끼는 부분? 사회 부적응자라고 형 대신 감옥에 간 부분? 장애인 아파트에 장애인 없이 사는 부분? 영화는 그런 당신을 위해 반박을 준비한다. 공주는 난생처음 자신을 평범하게 대한 종두에게 반한다.

공주는 자신도 여자라며 종두에게 성관계를 제안한다. 그때 들이닥친 공주의 가족은 종두를 강간범으로 신고한다. 종두는 자신이 말해봤자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기에 아무 말 없다. 공주는 뇌성마비에 걸려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종두의 가족도, 공주의 가족도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 없다. 그들 생각은 단 하나밖에 없다. 종두는 가해자 공주는 피해자다. 그들에겐 오직 현상만이 중요할 뿐이다. 종두가 경찰서에 왔다는 것. 종두가 하는 일은 제대로 된 적 없으니 이번에도 잘못됐으리라는 것. 공주가 낯선 남자와 있다는 것. 공주에게 호감을 느낄 이성이 있을 리가 없으니 돈이나 성욕이 목적이었을 것이라는 것.

종두는 모자랄 뿐 나쁜 사람이 아니다. 공주는 몸이 불편할 뿐 모자란 사람이 아니다. 그들이 가진 외피와 내피는 다르다. 그들은 사회로부터 받는 따가움을 피하고자 두꺼운 외피를 입는다. 사회가 없었다면 그들은 내피만으로도 충분히 잘 살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 둘러싼 사회가 없다면 그들의 본가가 나온다. 종두는 모자란 게 아니라 착한 것이다. 공주는 불편한 게 아니라 천천히 나아갈 뿐이다. 그런데 그들을 둘러쌀 사회가 없다면 그들을 보호해줄 사람도 없다. 내피는 연약하고, 보호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두 사람은 명백한 약자다.

우리는 영화 속 종두를 보며 아무런 판단도 할 수 없다. 어느 쪽을 옹호해도 당신은 나쁜 놈이 된다. 당신이 반론하면 할수록 죄질만 나빠질 뿐이다. 결정적으로, 내 일이 아니라 남 일일 뿐이다. 따라서 이런 인물이 우리 주변에 있었다면 모른 체하고 지나가는 게 상책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당신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전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창동 영화는 현실이 아니라 현상이다. 현실이 우리에게 이야기를 전한다면, 현상은 우리를 목격자로 만든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애써 모른 체하거나 무의식적으로 지나쳐가는 것들. 이를테면 아침 출근길에 내 앞에 앉아있던 아저씨, 내 옆에서 지하철 개찰구를 지나가던 여자, 무덤덤한 얼굴로 계산대에 서 있던 청년과 같은 사람들. 그들은 남남이다. 다시 말해, 궁금해 할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다. 우리에겐 그들을 보았다는 인식만이 남아있다.

이창동 영화가 목격이자 현상인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염증이 생기고 제때 치료가 되지 않으면 흉터가 지고 만다. 그 흉터는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는다. 이창동 영화의 인물은 그러한 흉터를 안고 살아간다. 여기서 확실히 해두어야 할 것은 '흉터'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창동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창동 영화는 그런 점에서 사회 고발적인 영화가 아닐 수도 있다. 그보다는 사회 안에서 벌어지는 초자연적인 현상에 관한 이야기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선호 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동시 게재되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기사에 한하여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영화 이창동 오아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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