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킬라킬>의 작품 포스터.

애니메이션 <킬라킬>의 작품 포스터. ⓒ TRIGGER


이런 관용어구가 있다. "옷이 날개다". 남녀노소 상관없이 옷만 잘 입어도 인물이 산다는 뜻이다. 실제로 우리가 타인을 볼 때도 그의 복장을 주요하게 본다. 패션의 완성이 얼굴이라는 우스갯소리는 잠시 넣어두자. 지금 말하려는 것은 복장에 따라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품위 같은 것을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이니까.

결국, 우리가 그토록 복장에 신경을 쓰는 건 단순한 자기만족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남들에게 대우받기 위해, 옷을 사는 데 많은 돈을 투자한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옷이 나의 신분이나 대우를 결정하니 '옷이 나를 입는다'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우스갯소리에 가깝지만, 지금 소개할 애니메이션은 정말로 그렇다.

<킬라킬>(2013)은 인격을 가진 옷이 주인공을 입는다. 주인공인 '마토이 류코'가 작품의 시작 부분에서 센케츠라는 옷을 발견한 후로 벌어지는 일들이 주요 서사다. 이 옷은 평상시에는 세라복(교복)이지만 옷을 입은 사람의 피를 빨면 전투복이 된다. 신기하게도 이 옷은 인격이 있는데, 더욱 신기한 것은 전투복이 되며 노출도가 극도로 높아진다. 보기 민망한 모습에 대부분 시청자가 떨어져 나간다. 문제는 그 모습이 나오는 게 1화라는 점이다.

그런데 작품이 진행되면 그렇게 노출하는 인물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기까지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성 상품화에 대한 비난을 받는 측면이 있다. 여성과 남성을 가리지 않고 무척 변태적인 복장(농담이 아니다)으로 '전투'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에 준하는 칭찬을 듣고 있기도 하다. 작품의 주요 주인공이 모두 여성이고, 그에 걸맞은 주체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그러한 민망함을 24화 동안 참아낼 자신이 있다 해도 그다음 문제에 직면할 것이다. 이 애니메이션은 제국주의(파시즘)를 소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제국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기는 해도, 언급 자체가 불편하다면 보기 힘들다. 이 작품에서 제국을 상징하는 것은, 결말까지 달려가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그러한 비판과 반론이 어느 부분에서 제기되는지 분석하려 한다. 작품의 줄거리를 짤막하게 언급하며 위의 사항을 논할 것이다. 그러니 이 작품을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작품을 소개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이미 작품을 보았다면 굉장히 즐거운 마음으로 글을 읽어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킬라킬>은 왜 파시즘을 모티브로 사용하는가

 애니메이션 <킬라킬>의 한 장면. 주인공 '마토이 류코'의 등장.

애니메이션 <킬라킬>의 한 장면. 주인공 '마토이 류코'의 등장. ⓒ TRIGGER


주인공 마토이 류코는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찾아 '혼노지 학원'에 전학을 오게 된다. 그녀에게 남은 단서는 범인이 아버지를 살해할 때 사용한 '반으로 갈라진 가위'뿐이다. 그런데 웬걸, 혼노지 학원의 학생회장인 '키류인 사츠키'가 가위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 눈치를 보인다. 류코는 그녀가 어떠한 형태로든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해 행패를 부린다.

그러나 복싱부장이 류코를 가로막고, 힘 싸움에서 밀리는 걸 확인한 류코는 도주한다. 그렇게 아버지와 살던 옛집으로 향해 신세 한탄이나 하던 중, 바닥이 꺼지며 나타난 어느 지하실에서 '센케츠'를 발견한다. 학생회 인물은 모두 '극교복'이라는 것을 입고 있어 강했던 것인데, '센케츠'도 극교복의 일종으로 생각한 류코는 몹시 기뻐한다. 마침 학원에 와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가 인질로 잡혀있다는 걸 알게 되어 곧바로 학원으로 향한다. 그렇게 류코는 센케츠와 함께 복싱부장을 무찌른다.

작품의 배경인 혼노지 학원은 파시즘의 형태를 띠고 있다. 힘에 따라 계급이 결정되며, 그에 따른 극교복을 부여한다. 학생회장은 나치 독일처럼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며, 그에 따른 정치는 권위적으로 이루어진다. 회장 아래에 있는 네 명의 간부는 장관급에 해당하는 역할과 능력을 지니고 있고, 그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 반대로 최하계급은 얼굴조차 묘사되지 않고 달동네에 사는 둥,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한다.

센케츠나 극교복과 같은 '옷'은 생명 섬유라는 것으로 만들어진다. 생명 섬유는 외계생명체고, 기생하는 생물의 신체능력을 늘려준다. 그것으로 옷을 만들어도 같은 효과가 있다. 단, 생명 섬유의 첨가율에 따라 그 능력치가 달라진다. '혼노지 학원'은 그것을 통해 학생들의 계급을 관리한다. 30%를 첨가하면 별이 세 개, 20%를 첨가하면 별이 두 개, 이런 식이다. 물론 주인공은 특별하니 옷 전체가 생명 섬유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학원 간부에 속하는 별 세 개와 싸우게 된다.

학원 간부의 별 세 개짜리 극교복은 개인에게 특화되어 있어 개성이 확실하며, 센케츠처럼 변형할 수 있다. 말하자면 주인공이나 간부처럼 힘이 있어야 개성이 생긴다. 그런데 여기엔 크나큰 모순이 있다. 남들보다 강해지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남들보다 강해야 하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경쟁에서 승리해 극교복을 받아야 더욱 강해진다. 즉, 강자는 더 강해지고 약자는 더 약해진다.

그래서 극교복은 계급의 상징이다. 약자의 개성을 지운다는 것에 첫 번째 이유가 있고, 계급만큼의 힘을 낼 수 있도록 설계된 것에 두 번째 이유가 있다. 능력에 걸맞은 권위를 부여하는 게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능력에 따른 책임이 부여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에게 책임이란 학생회장을 도와 학원을 이끌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회장이 학원을 그런 방식으로 이끌고 있는 건 그녀의 부모를 막기 위해서다. 키류인 가는 오래전부터 생명 섬유를 섬겨 왔는데, 사실 생명 섬유는 단순히 기생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을 먹어 치우곤 그 힘으로 행성을 하나의 고치로 만들어 터트리는 방법으로 번식한다. 회장의 부모 '키류인 라교'는 생명 섬유를 돕기 위해 전 세계에 생명 섬유를 심은 옷을 팔아왔고, 작품 후반부에 가서는 시장 점유율 백 퍼센트에 다가간다. 결국 생명섬유를 심은 옷들이 라교에 의해 폭주하고, 사람들을 잡아먹어 지구가 위기에 처하고 만다.

아이러니하게도 혼노지 학원의 학생들만이 생명 섬유에 내성이 있어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다. 회장의 생각이 맞았던 것이다. 작품은 이러한 부분에서 몹시 흥미롭다. 파시즘의 형태로 이루어진 집단이 더 큰 파시즘을 막아낸다. 막고 난 후에는 학원의 목적이 사라졌으니 자발적으로 해산한다. 우리는 여기서 여러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첫 번째,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할 수 있는가? 두 번째, 그것이 만화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무척 중요한 일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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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질문부터 풀어보자. 이것은 흔한 질문이지만 "파시즘에 대항하는 파시즘"이라는 중층구조를 띄기 때문에 색다르다. 혼노지 학원이라는 작은 틀에서는 대를 위해 소가 희생하고 있는 게 맞다. 그러나 지구의 방위라는 큰 틀에서는 대(라교)가 하려는 것을 소(사츠키)가 막아낸다. 중층구조로 들어가며 두 구조의 관계가 역전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小)가 승리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사츠키 휘하에 있던 학생들은 그동안 올바른 대우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물음에 맞닥뜨리고 만다. 파시즘의 전제는 국민의 동의로 이루어진 강압 통치다. 그런데 피지배층의 동의를 받아 이루어진 것이라면 정말로 강압이라고 할 수 있는가? 작품 내에서는 비록 지배계급층의 일방적인 점령으로 시작되지만, 결국 학생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간부들의 충성심도 그러하며 별 한 개 최하계급도 그렇다. 우리는 그들이 억압받고 있다 생각하는데 그들은 그것을 의무로 생각한다. 이때, 대체 올바름이라는 게 무엇인가?

두 번째 질문도 풀어보자. 그들에게 주어진 기간은 매우 짧았고, 지구의 존속이 달린 중대사다. 냉정하게 결과만 보고 생각한다면 하향식 의사결정이 신속하고 효율적이었던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건 결국 파시즘이라는 구조 덕분이다. 반대의견을 모두 묵살하고 일사천리로 진행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결국 두 번째 질문은 첫 번째 질문을 전제로 하고 있다.

<킬라킬>과 파시즘, 그리고 철인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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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독재자라는 개념은 오래전 그리스 때부터 있었다. 플라톤이라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는 철인에 의한 통치를 주장했는데, 여기서 철인이란 '지혜로운 사람'을 뜻한다. 여기서 지혜롭다는 것은 '이데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현상의 본질'을 볼 수 있다는 걸 뜻한다. 즉, 철인은 어떠한 사건이든 진실을 꿰뚫어 보아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당연하게도 이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에 가깝다. 하지만 그 개념만큼은 매우 올곧은 것임으로 오늘날에도 철학사에 깊게 내려오고 있다.

철인을 선출하는 방법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공정한 시험을 거쳐 인재를 선출한 후 군 복무를 시킨다. 제대 후 모든 학문을 십 년 동안 가르치고, 여기서 다시금 인재를 거른다. 남은 인원을 대상으로 5년 동안 철학을 가르치고, 이후 15년 동안 실무를 맡긴다. 그리고 15 년 후 남은 사람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를 철인으로 선출한다. 만약 이러한 방법들이 충분히 가능하지 않으냐고 생각된다면 이것이 이천 년 전에 창립된 개념임을 상기해보자. 저 과정을 모두 수료할 시 대략 오십 살이 되는데, 그때 기준으로 오십 살은 오늘날의 백 살이다.

철인의 개념을 꺼낸 건 작품에서 회장을 철인이라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해 묻기 위해서다. 엄밀히 말하자면 큰 틀에서 철인은 독재자라고 부를 수 있는데, 회장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선 작품의 줄거리를 이어서 설명하며 언급해야 한다.

그렇게 혼노지 학원의 학생으로 인정받은 류코는 기회를 엿보며 하루를 살던 중, '해산총선거'라는 것을 접하게 된다. 그것은 혼노지 학원의 연례행사로 학생회가 자발적으로 해산하는 것이다. 이후, 장애물을 뚫고 학교가 있는 산 정상까지 올라오는 순서대로 학생회를 구성한다. 류코는 높은 순위로 올라와 간부급에 해당하는 계급을 얻어야 했지만, 네 명의 간부를 이겨야 인정해준다는 회장의 말에 그들과 싸우게 된다.

그런데 싸우던 중 '히라메 누이'라는 여자가 나타난다. 그녀도 '반쪽 가위'를 사용하고 있어 류코는 혼란에 빠진다. 그렇게 싸움과 계급이 흐지부지되어 버리고, 회장은 학원의 수학여행을 예고한다. 학원의 수학여행이라는 것은 혼노지 학원에 대항하는 다른 지역의 학원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이다. 그렇게 수학여행이 얼마 남지 않은 가운데, 류코는 갑자기 나타난 히라메 누이에게 센케츠를 분쇄 당하고 만다.

 애니메이션 <킬라킬>의 한 장면. 왼쪽부터 재봉부 '이오이 시로', 정보부 '이누무타 호카', 문화부 '자쿠즈레 노논', 운동부 '사나게야마 우즈', 선도부 '가마고리 이라'. 간부는 네 명이지만, 재봉부는 극교복을 만드는 부서라 그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

애니메이션 <킬라킬>의 한 장면. 왼쪽부터 재봉부 '이오이 시로', 정보부 '이누무타 호카', 문화부 '자쿠즈레 노논', 운동부 '사나게야마 우즈', 선도부 '가마고리 이라'. 간부는 네 명이지만, 재봉부는 극교복을 만드는 부서라 그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 ⓒ TRIGGER


혼노지 학원은 성공적으로 타 학원을 제압해 나가고, 그 과정에서 류코도 조각난 센케츠를 모아 부활시킨다. 그런데 수학여행의 목적은 단순한 무력통일이 아니라 학원에 반하는 조직을 양지로 끌어내 무너뜨리기 위함이었다. 조직의 이름은 '누디스트 비치'로, 회장의 부모가 전 세계에 생명 섬유를 뿌리려는 것을 알고 옷 입기를 거부한다. 회장이 그들 조직의 본거지를 폭격해 누디스트 비치는 전력 대부분을 잃게 된다.

본진으로 귀환한 회장은 승리를 기념해 '대문화 체육제'라는 것을 개최한다. 회장의 어머니 겸 학교의 이사장인 라교는 그곳에서 생명 섬유의 계획을 실현하려 한다. 기회를 엿보던 누디스트 비치와 류코가 저지하기 위해 달려들려던 순간, 회장이 라교를 칼로 찌른다. 혼노지 학원은 처음부터 회장이 어머니에 대항하기 위해 철저히 기획되었던 것이다.

해산총선거라는 것은 의원내각제의 요소로 보인다. 하지만 의원내각제의 '요소'가 있다고만 언급했지 의원내각제는 아니다. 혼노지 학원은 의회와 내각이 일체화되어 있으므로 어떤 정치제도라 부를 수 없다. 굳이 말하자면 중세시대에 흔히 보던 전제군주정에 가깝다. 아마도 이쯤에서 당신이 궁금해할 법한 것이 하나 있다. 전제군주정과 파시즘의 차이가 무엇인지, 둘 다 권력자에게 막연한 지지를 보낸다. 권력자가 철인에 가까울수록 다른 체제보다 막대한 효율을 뽑아내는 것도 같다. 하지만 전제군주정은 강력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에 준하는 신권이 있다. 조선왕조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듯이, 가끔은 신하들의 권력이 더 세어 군주가 군주 역할을 못하는 때도 있다. 두 체제의 차이점은 그것이다. 파시즘에는 신하가 없고 부하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작품에서의 해산총선거는 허울뿐이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내각을 해체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불공평하다. 주어진 권력(극교복)을 회수하지 않고 다시금 경쟁(선착순 등용)에 내보낸다. 비유 하자면 우리가 금수저에게 느끼는 박탈감을 들 수 있다. 서로가 같은 선에서 출발해도, 그들의 발이 더 가볍다. 그런데 막연하게 욕하기만 할 수도 없다. 작품에서의 권력은 금수저의 경우처럼 세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명확하게 자신의 실력으로 쟁취한 것이어서, 설사 그들이 권력이 없는 상태에서 경쟁하더라도 같은 권력을 쟁취할 가능성이 높다.

다시금 이것에 반론을 제기해볼 수 있다. 위에서 했던 말의 반복, 능력에 따라 등용하는 건 무척 공평한 것이 맞지만 강자는 더 강해지고 약자는 더 약해진다. 이것이 막연하게 나쁘게만 보인다면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 분명 약하면 버려지는 것이 생태계의 섭리이다. 그러니까, 작품에서의 제도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수능을 볼 때 재수생이 유리한 것처럼, 한 번 학생회를 겪었던 경험자가 재진입에 유리한 것은 문제 될 일이 아니다.

우리가 지적해야 할 것은 그 통치과정에서 벌어지는 권력의 위계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동물이기에 생태계의 섭리를 따르지만, 동시에 인간이기도 해서 힘이 센 사람에게 조건 없는 복종을 하지 않는다. 상관이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다면 명확하게 지적하고 반대의사를 표하는 것이 맞다. 그가 나보다 뛰어난 능력으로 그 위치에 있다고 해도, 가끔은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자가 철인에 가까워 비판점을 찾을 수가 없다고 가정해보자. 그때, 우리는 그가 완벽하게 직무를 수행하고 있으니 아무런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의 없음이 그의 능력을 대변해주지는 않는다. 만약 그가 잘못된 판단을 할 때, 우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여태까지의 행보로 형성된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작품 내에서 학생회장의 상태다. 이것을 전제로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자.

여기서 어떤 방식으로 신뢰를 받고 있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옳고 그름의 판단에서 명확하게 그름에 속하는 이들에게 지지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작품에서의 회장의 신뢰는 부모에게 세습 받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에 준하는 무력이 있기도 하고, 결과물로 나오는 판단이 옮았다는 것에 있다. 그러니까 작품 속의 혼노지 학원은 그러한 이유에 끌린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약육강식을 선택한 사람들이며, 무슨 일(지구멸망방지)을 하는지는 몰라도 그들의 대업에 간접적으로 참가하려는 것이다.

신뢰, 철인, 파시즘, 권력. 이것들이 여태껏 설명했던 키워드다. 이렇게나 설명을 늘어놓고 아무런 결론을 내지 않으니 조금은 짜증이 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정치에 관한 것은 이렇다 할 정의를 내릴 수가 없다. 개인이 원하는 이상향은 그 방향이나 실현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한국 사회에서 진보에 속한다면 아랫사람을 도구로 사용하는 회장을 비판할 것이며, 보수에 속한다면 대를 위해 소가 희생할 수 있다며 옹호할 것이다. 중요한 건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생각이 소중한 만큼 네 생각도 소중하다. 지금껏 설명한 것들을 바탕으로 이 작품에서의 혼노지 학원에 대해 각각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다음 주제를 읽으면 몹시 흥미로울 것이다.

<킬라킬>은 왜 극한의 노출을 선택하게 되었는가

 애니메이션 <킬라킬>의 한 장면. '키류인 라교'의 모습.

애니메이션 <킬라킬>의 한 장면. '키류인 라교'의 모습. ⓒ TRIGGER


위에서 판단을 보류하라고 요청했지만 그럼에도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수학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을 제패하는 시퀀스다. 아마 대부분 사람들이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을 떠올리며 전쟁에 대한 미화라고 비판할 것이다. 당시의 일본은 아시아를 서구의 지배에서 해방시킨다며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했고, 본 작품에서 생명 섬유와 라교를 서구로 본다면, 그들로부터 지구를 구하기 위해 사람들을 공격하는 혼노지 학원은 일본으로 읽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 작품이 옷을 소재로 한 것은 그것에 대한 비판을 하기 위한 것을 보인다. 이 부분을 앞으로 설명할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 이 작품은 노출이 몹시 심하다. 작품에서 말하는 이유는 이렇다. "생명섬유에게 기생 당할 수 있으니,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접촉면을 줄인다" 어찌보면 '기생'이라는 부분을 피해 '능력향상'이라는 효율만 얻으니 합리적인 선택이다. 문제는 왜 하필 능력향상이 되는 상태(전투복)에서는 노출도가 높아져야만 하느냐는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 별 세 개 극교복과 백 퍼센트 생명 섬유 복장(센케츠, 준케츠, 신라 코케츠)는 변형 기능이 있다. 그것은 개인의 특성을 반영하고, 따라서 이 작품에서 전투는 개성을 드러내는 행위다. 그러므로 개성을 드러냄과 노출이 높아짐은 같은 선에서 읽어야 한다. 즉, 작중에서 노출이라는 것은 집단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스스로 증명할 수 있는가를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극교복이 계급을 드러낸다고 말한 바 있으니, 옷을 입기 거부하는 집단 '누디스트 비치'는 탈권위주의 집단으로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일시적 권위주의 집단과 탈권위주의 집단이 서로 합쳐 상위 권위주의 집단을 무찌르는 것이다. 위에서 우리가 회장 사츠키와 이사장 라교의 관계를 권위대 권위로 놓았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작품이 그에 대한 여백을 남겨 놓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노출'이다. 분명 이 작품에서 옷은 개인에게 권력을 주는 게 맞다. 하지만 그러한 권력의 원천(생명섬유)를 이용하면서도(극교복)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노출을 택한다. 따라서 애초에 노출이 이루어지지 않는 평범한 극교복이 권력의 아래에 놓인 것이라면, 노출이 이루어지는 네 명의 간부와 류코와 사츠키의 옷은 권력의 힘을 빌리는 형태다. 이것은 언제든지 위쪽에 대항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복선에 해당한다.

하지만 라교의 신라 코케츠는 노출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라교의 몸이 생명 섬유 그 자체이기 때문에 온전히 옷을 입을 수 있다. 즉, 라교만큼은 옷이 사람을 입는 게 아니라 사람이 옷을 입는다. 이 작품에서 옷이 권력과 계급을 상징하는 것을 볼 때, 그녀는 그 자체를 뜻한다. 주인공 류코는 그래서 특별하다. 라교처럼 온몸이 생명 섬유로 이루어져 있으나, 옷에 지배당했을 때 자의로 풀어내기 때문이다.

라교는 '커버즈'라는 생명 섬유의 부하들을 부리며 전 세계를 자신의 하위로 두려 한다. 커버즈는 옷의 형태를 띠고 인간을 삼켜 괴물이 된다. 그때, 인간은 주체가 아닌 객체가 된다. 그러나 극교복은 그러한 계급의 '형태'를 빌리되 주체임을 잊지 않는다. 이 부분에서 작품은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계급(옷)에 종속되어 있는가? 혹은 옷(권력)을 입으려 하는가?"

이제 이 작품의 의의를 마무리 지으려 한다. 2003년의 <실미도>라는 영화는 그것을 설명하는 데 곁들이면 아주 적절하다. <실미도>의 줄거리는 이렇다. 북에서 간첩이 내려와 대통령을 암살하려 하지만 실패에 그친다. 이에 분개한 정부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전략으로 북에 파견할 특수부대를 양성한다. 그 부대는 사회에서 사망 처리된 범죄자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실미도라는 섬에서 극한의 훈련을 받는다. 그러나 훈련이 진행되던 중 남북 간의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그들은 버려진다. 이에 분개한 부대원들은 청와대로 향하다 사격을 받아 사망한다.

물론 <실미도>와 <킬라킬>은 같지 않다. <실미도>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고 실사 영화다. 또한 범죄자들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킬라킬>의 학생들과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같다.

"대업(지구방위, 김일성 암살)을 이루기 위한 집단이 권위의 아래에 놓인다."

그리고 <실미도>가 던지는 물음은 이것이다.

"폭력으로 점철된 권위에 굴복했지만, 끝내 그 권위에 의해 강요받은 목적조차 부정되었을 때. 과연 범죄자인 그들이 울분을 토할 자격이 있는지."

그리고 <킬라킬>이 던지는 물음은 다음과 같다.

"권위에 의해 강요받은 목적을 부정하기 위해, 폭력으로 점철된 권력을 생성해 대항한다. 그런데 과연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 권위가 더 높은 권위를 타파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말하자면 두 영화의 대전제와 소전제의 위치가 다르다. 즉, 위치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방향이 확연하게 달라진다. 예를 들면 이 작품에서 서로 대립하는 관계에 있던 것들 - 혼노지 학원과 외부 집단, 전학생 류코와 회장 사츠키 - 은 서로의 위치가 뒤바뀌는 경험을 한다. 류코는 사츠키의 옷을 입고 사츠키는 류코의 옷을 입는다. 그리고 사츠키의 권력은 라교 앞에서 무참하게 무너진다. 누디스트 비치와 혼노지 학원은 서로 대립하는 관계였다. 그런데 대문화 체육제 이후로 혼노지 학원 자체가 그들 상위에 대항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서로 연합하게 된다. 결국 이 작품에서 위치를 바꾸지 않는 것은 이사장 '라교'밖에 없다.

아마도 당신은 이제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어느 정도 눈치챘을 것이다. 위치를 바꾸면 의도가 달라진다. 그 위치란 것은 어느 것에도 적용할 수 있다. 너와 나, 스승과 제자, 상사와 부하. 당신은 평상시에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며 옷을 입는가?

ⓒ TRIGGER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선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영화 킬라킬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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