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전력이 아니어도 만리장성의 벽은 여전히 높았다. 허재 감독이 이끄는 남자농구대표팀은 26일 고양체육관에서 개최된 '2019 중국 농구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A조 2차전에서 중국에게 81-92로 패했다. 당초 전력상 어려운 상대로 예상되었던 뉴질랜드를 원정에서 잡으며 기세를 올렸던 한국이지만, 반면 이번엔 오히려 해볼 만하다는 평가를 중국에게는  홈에서 덜미를 잡히며 1승 1패가 됐다.

뉴질랜드전이 한국농구만의 스타일과 가능성을 보여준 경기였다면 중국전은 약점과 숙제를 남긴 한 판이었다. 지난 아시아컵을 통하여 확실하게 정립된 '허재호'의 장점은 슛과 패싱게임이었다. 선수들이 평균 신장은 작아도 전원이 유기적인 움직임과 현란한 패스워크로 공간을 창출하는 모션 오펜스는, 한국농구의 전매특허인 정확한 3점슛-스피드와 결합되어 기대 이상의 화학작용을 일으켰다.

하지만 중국전에서는 한국농구의 이런 장점들이 거의 살아나지 못했다. 오히려 한국농구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슛'이 막혔을 때 마땅히 경기를 풀어갈 해법이 없다는 고민거리를 남겨줬다.

중국전 패배의 근본적인 원인은 결국 '선수층'과 '개인기'의 차이에서 갈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은 개최국 자격으로 이미 자동출전권을 확보한 상황에서 이번 대회에서는 평균 연령 24세의 젊은 선수들 위주로 라인업을 꾸렸고, 이젠롄, 궈아이룬, 리무하오등 핵심 멤버들이 대거 빠졌다. 일각에서는 중국 라인업이 '역대 최약체'라는 섣부른 평가까지 내리며 한국의 중국전 승리를 낙관하기도 했다.

하지만 1.5군-2군 정도의 평가를 받았던 젊은 중국대표팀도 뚜껑을 열자 강력했다. 전반엔 선밍후이, 후반엔 딩안유항을 앞세운 중국의 엄청난 개인기와 높이에 한국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박찬희, 최준용, 양희종 등 한국에서 나름 신장과 수비력을 갖춘 선수들이 저지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한국은 뉴질랜드에서 재미를 봤던 3-2 드롭존 수비를 다시 꺼내 들었으나 앞선에서 너무 쉽게 돌파를 허용하며 효과를 거두지못했다. 맨투맨으로 다시 수비에 변화를 주는 것도 쉽지않았다. 중국은 빅맨만이 아니라 포워드, 가드들도 신장이 모두 큰 데다 빠르다 보니 미스매치의 부담이 컸다. 반면 한국은 2대 2게임에서 중국의 높이 때문에 바꿔막기를 해도 아무런 차이가 없었고 자연히 픽앤롤에 의한 돌파나 골밑 공략이 여의치 않았다. 결국 외곽 위주의 제한적인 공격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전 세대의 농구 한중전에서도 자주 반복되었던 흐름이다.

현대농구의 흐름이 많이 변했다고 해도 '높이'는 여전히 농구에서 강력한 무기다. 프로리그에서 1대 1 위주의 공격농구를 적극 장려하고 있는 중국은 장신이면서도 스피드와 슈팅능력을 갖춘 스윙맨들이 많았고 상성상 한국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 한국은 장기인 3점슛을 9개 성공시켰지만 성공률은 36%에 그쳤고, 팀 리바운드에서도 29-39로 밀렸다. 홈에서 실점을 92점이나 내준 것은 수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허재 감독, 내년 중국 원정에서는 설욕에 성공할까


한국은 이날 운도 따르지 않았다. 중국 감독조차 경계대상으로 꼽았던 기둥 오세근이 초반부터 파울트러블에 걸리며 위축됐고 전반 막판에는 김종규까지 골밑 돌파를 시도하다가 불안한 자세로 코트에 쓰러지며 부상을 당했다. 무릎과 골반에 충격을 입은 김종규는 결국 후반에는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가뜩이나 높이에서 불리한 한국은 핵심 빅맨 두 명을 잃은  3쿼터 초반, 중국의 파상공세에 점수차가 10여점 차 이상 벌어지며 흐름을 완전히 넘겨줬다. 이승현과 이종현이 그나마 분전했지만 중국의 높이와 물량공세를 감당하기에는 힘에 부쳤다.

이번 대표팀에 합류하지 못한 리카르도 라틀리프와 김선형의 존재감이 생각날 수 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한국 귀화를 추진 중인 라틀리프는 절차가 아직 완료되지 않아 내년이 되어야 합류가 가능한 상황. 아시아컵 주전 가드 김선형 역시 발목 부상으로 당분간 결장이 불가피하다. 골 밑에서 든든하게 득점과 리바운드를 책임져줄수 있는 정통 빅맨과, 경기가 안풀릴 때 개인 돌파와 스피드로 상대 수비를 흔들어줄 수 있는 슬래셔의 부재가 크게 다가온 장면이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단지 선수 1~2명에 의존하거나 보강하는 차원을 넘어 선수층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돌아봐야 할 순간이기도 했다. 이 정도의 전력의 팀을 3~4개 정도 만드는 것도 가능한 중국에 비하여 한국은 한두 명을 제외하면 사실상 최정예 전력이었다. 그나마도 스타일이 엇비슷한 선수가 많고 현역 시절의 허재처럼 경기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창의적이고 유니크한 선수가 부족하다는 것은 한국농구의 오랜 고민이다. 단지 대표팀 감독의 영역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한국농구가 구조적으로 고민해야 할 지점이기도 하다.

허재 감독도 경기후 기자회견에서 패배를 인정하며 역시 중국의 풍부한 선수층을 높이 평가했다. 지역방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수비가 너무 쉽게 무너지며 대량 실점을 허용한 것을 가장 아쉬운 장면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허재 감독은 현역 시절부터 감독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국제대회에서 번번이 중국의 벽을 넘지못하고 있다. 기자회견에서는 중국 기자들이 이 점을 지적하며 도발성 질문을 해오기도 했다. 6년 전 우한 아시아대회 당시 중국 기자들의 무례한 언행에 발끈하는 모습을 보였던 허재 감독은 이번엔 "다음에 이기면 된다"라며 간결한 답변으로 대응했다. 허재 감독이 내년 중국 원정에서는 설욕에 성공할 수 있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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