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님포매니악>(2013)의 포스터

영화 <님포매니악>(2013)의 포스터 ⓒ 무비꼴라쥬


죽음과 섹스는 다르면서도 같다. 사회 구성원들에게 쉬이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점은 같고, 생성과 해체의 양립하지 못할 기능을 지닌다는 면에서 다르다. 그래서인지 그리스 신화에서의 에로스(Eros)와 타나토스(Thanatos)로도 알 수 있듯, 인류는 두 개념을 오래 전부터 다른 것이라 인식해왔다. 하지만 현대로 올수록 두 개념 사이를 좁히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과거에는 윤회라는 것으로 삶 뒤의 삶을 말했다면, 오늘날에는 두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가늠한다. 이것이 바로 에로토스(Erotos)다.

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이러한 에로토스가 주가 된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님포매니악>(2013)이다. 상영 시간이 길어 볼륨 1과 볼륨 2로 분리 상영된 이 영화는 현시점에서 감독의 가장 최근 작품이기도 하며, <멜랑콜리아>(2011), <안티크라이스트>(2009)와 더불어 '우울증 3부작' 중 하나다. 그리고 감독의 작품이 늘 그렇듯, 몹시 보기 불편하다. 작품의 제목인 '님포매니악(색정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온갖 섹스에 대한 기교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인 '조'는 색정증 환자다. 누군가에게 구타당해 거리에 누워있는 '조(샤를로트 갱스부르 분)'를 지나가던 행인인 '샐리그먼(스텔란 스카스가드 분)'이 부축해 자신의 집에 들여놓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노년의 신사 샐리그먼은 자상하게 조를 침대에 눕히고, 따스한 밀크티를 대접하기 까지 한다. 나이 든 숙녀 조는 그런 따스함 속에서 여태까지의 사연을 늘어놓는다.

 영화 <님포매니악>의 한 장면

영화 <님포매니악>의 한 장면 ⓒ 무비꼴라쥬


조와 샐리그먼의 대화는 굉장한 즉흥성을 통해 진행된다. 볼륨 1과 볼륨 2를 합친 5시간 30분에 거친 조의 일생은 총 8개의 장으로 나누어지는데, 조가 샐리그먼의 방에 있는 사물을 보고는 즉석에서 생각해 낸 주제로 진행된다. 챕터 1은 벽에 박힌 샐리그먼의 낚시 추로부터, 챕터 2는 케이크를 먹는 포크에서 시작되는 식이다. 그렇게 조가 이야기를 꺼내면, 샐리그먼이 자신의 사견을 덧붙이고, 그 사견에서 이야기를 끄집어내며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조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 이러한 작품의 이야기 구성에 대해 생각해보자. 샐리그먼은 왜 조를 구해주었을까? 길거리에 있던 여자를 부축해 침대에 옮긴 건 막연한 도덕심 때문이었을까? 샐리그먼은 본인의 입으로 자신은 특별한 종교가 없다고 말했으나, 작품에서 이런 선의를 강조하는 것은 어느 무엇보다 종교적 의미가 강하게 느껴진다.

또한 빈약한 상태로 누워있는 조의 모습은 마치 병자처럼 보이고, 그는 자신의 색정증을 죄라고 말한다. 종합하자면 두 사람은 '죽기 전에 죄를 털어놓는' 참회의 시간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샐리그먼은 종교적으로 선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장난기 많은 악마처럼 느껴진다. 그가 조의 맨 처음 이야기를 끌어낼 때 사용한 '낚시'의 비유가 계속해서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샐리그먼은 조의 이야기를 경청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사견을 덧붙이며 이야기를 특정 방향으로 유도한다. 샐리그먼이 가치중립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비유에는 이미 특정한 쪽으로의 판단이 내포되어 있다. 즉, 영화는 색정증에 대해 객관적인 판단을 끌어내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들, 선처럼 보이던 샐리그먼이라는 캐릭터의 특수성은 우리에게 내포된 무언가를 건드린다. 그것은 색정증이라는 것에 대한 우리들의 편견, 섹스에 대한 우리의 왜곡된 시야를 향하는 듯하다. 우리는 침대에 누운 조를 보며 최대한 객관을 유지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샐리그먼처럼 겉으로만 위로할 뿐 속으로는 저급하고 더러운 인간으로 취급할 뿐이다. 그래서 영화 속의 두 인물은, 어찌 보면 담판 중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낚시는, 색정증이라는 것에 대한 반박에 반박을 거듭하는 것이다.

 영화 <님포매니악>의 한 장면

영화 <님포매니악>의 한 장면 ⓒ 무비꼴라쥬


이러한 편견에 대한 은유는 영화의 형식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일단 작품을 이끌어가는 3+5라는 두 피보나치 수는 작품의 챕터 수와 같다. 하지만 이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피보나치 수가 황금 비로 이어진다는 것이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황금 비는 완벽하고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데 사용된다. 그러나 챕터에 챕터를 거듭할수록 조의 인생은 점점 더 핍진해진다. 그녀의 섹스는 내면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행위인데, 수천 명과 섹스를 해도 채워지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가며 육체는 늙어가니 아름다움과도 점점 멀어진다. 배운 것이 없어 제대로 된 직장조차 없이 불법적인 일에 손을 댄다.

분명 섹스라는 것은 쾌락적이기도 하고, 생명의 탄생시키는 신성함이 있다. 그런데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다. 섹스라는 것을 통해 이어지는 그녀의 모습은, 쾌락을 말하기보단 어딘가로부터 도망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자신이 만들어 낸 또 다른 자신일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 되고 싶은 것을 마음속으로 그리며 현실과 이상의 격차를 가늠해보는 것일 테다. 섹스에서의 삽입이라는 건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내면의 결핍은 우리에게도 있다. 어떠한 것도 될 수 있다. 조처럼 어머니에게 받지 못했던 사랑일 수도 있고, 더 나아가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벽에 대한 반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섹스라는 건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섹스는 본능이다. 본능에는 구체적인 목표나 주제 같은 게 따르지 않는다. 우리는 죽고 싶지 않고, 섹스는 하고 싶다. 그래서 조의 섹스에 대한 갈망은 가난과 사랑과 같은 부차적인 것이 아니다. 본능과 본능에 대응하는 것, 삶과 죽음에 대한 반복적인 행위이다.

여기서 다시금 낚시라는 개념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 무엇을 삽입해야 할까? 보통 낚시를 할 때는 대어를 낚으려고 생각한다. 그것을 위해 물고기의 입에 낚시 추를 삽입하고, 그것을 끌어올려야 한다. 그것은 달리 보면 섹스처럼 보인다. 물고기의 입이라는 거대한 구멍, 그리고 삽입. 숨을 허덕이며 펄떡이는 모습까지 그렇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의 낚시는 삶과 죽음을 반복하는 섹스에 대한 은유로 보인다. 낚시가 주가 되는 이 영화는 한 편의 거대한 섹스인 것이다.

그렇다면 관객은 이 영화에서 어떠한 위치를 지닐까. 당연하게도 관객은 남성적인 위치에 있다. 관객은 영화를 보며 자신의 현재 위치와 사고를 삽입하기 때문이다. 그 삽입의 대상은 조이다. 조의 욕망은 영화 전반에 걸쳐 구멍을 뚫어 놓는다. 이 영화는 - 챕터로 나누어진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반복되는 황금 비의 비유에서도 그렇듯이, 정밀하게 교차하는 편집에서도 보이듯이 - 무척 형식적인데, 그럼에도 조의 욕망이 형식을 파괴하고 구멍을 뚫는 이질성이 있다. 이 구멍은 곧 조의 결핍을 뜻하며, 동시에 관객이 삽입하는 구멍이 된다.

 영화 <님포매니악>의 한 장면

영화 <님포매니악>의 한 장면 ⓒ 무비꼴라쥬


그 구멍이 바로 에로토스다. 삶과 죽음이 맞닿는 곳이다. 에로토스는 두 극단을 오고 간다. 알을 낳는 동시에 죽음에 이르는 연어를 생각해보자. 자손을 생성함과 동시에 본인은 탈락된다. 그때 알이 부화하기 전까지의 기간은 공백이다. 알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에로토스는 삶도 죽음도 아니다. 분명 맞닿아 있지만 이어지지 않는 게 결핍이기 마련이므로 그렇다. 그래서 낚시를 하는 샐리그먼은 우리의 감정이입 대상이다. 침대에 누운 조를 바라보는 위치이자, 관객이라는 위치다. 그렇게 영화는 스크린의 경계를 해체한다.

에로토스, 편견, 결핍. 이것이 영화를 이끌어간다. 이번엔 조의 이야기를 이것들을 통해 알아보자. 첫 번째로 에로토스다. 에로토스는 이 영화에서 간극을 지우는 역할이다. 조와 샐리그먼의 차이, 영화와 관객의 차이, 더 나아가서는 영화가 그것을 조를 통해 말하는 것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근본적으로 에로토스의 간극이라는 것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다.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각각 삶의 충동과 죽음의 충동이다. 말하자면 살기 위해 나아가는 것과 죽기 위해 퇴행하려는 것의 차이다. 주인공은 그 사이에 있다. 즉, 에로토스를 느끼는 상태다.

그렇게 느껴지는 건 조가 방황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조가 성장에 따른 섹스의 경험을 풀어놓는 것으로 진행되지만, 그 과정에서의 조는 불만족스러운 상태로 그려진다. 섹스는 분명 쾌락을 추구하는 행위일 것인데도 말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위에서 말한 결핍이라 말할 수 있고, 부차적으로는 우리의 현실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원하는 걸 손에 넣어도 금세 흥미를 잃을 때가 있다. 혹은 금세 흥미를 잃어도 원하고 싶은 게 있다. 에로토스는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삶에서 원하고 싶은 무언가를 향한 욕망, 그리고 죽음으로써 그것을 부재하고 싶은 결핍. 이것이 두 번째다.

그러나 영화의 결말은 이 모든 것이 무색해진다. 다른 남성들과는 다르다며 조가 치켜 세우던 샐리그먼은 다른 남성들처럼 행동하고 만다. 남성 색정증 환자에게도 그런 죄책감이 주어졌는지에 대한 샐리그먼의 물음, 관객이 조의 결핍에 삽입하던 욕망, 섹스가 신성한지 죽음이 신성한지에 대한 감독의 연출. 우리는 그것에 답할 수 있을까? 이것이 영화의 세 번째 주제인 편견이다. 우리는 샐리그먼이 낚시를 하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에게 이끌려 갔다. 가히 에로토스라는 것에 걸맞은 최후다.

덧붙이는 글 브런치, 블로그 중복게재.
영화 라스폰트리에 님포매니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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