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09년도 영화 <여행자>의 포스터 및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돌아서니 발자취는 선명하고, 기억은 앞으로 새겨진다. 우리는 걷고 있다. 어딘가를 향해 여행, 혹은 방랑하고 있다. 이따금 고난이 찾아올 때도 있고, 우연한 행복에 웃을 수도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아쉽다. 동시에 그립기도 하다. 돌아갈 수 없기에 더욱 생각이 난다. 목적지 없이 방황하던, 그저 발길만을 재촉했던 인생이 후회스럽다. 그땐 몰랐지만, 길옆의 꽃들이 무척 아름다웠던 것 같기도 하다.

꽃으로 가득 찬 평원을 뛰놀면 꽃이 꺾이기 마련이다. 어리석게도, 나는 그걸 몰랐다. 따사로운 평원에 내 발자취가 꽃을 누이기 전까지는 해맑게 웃었다. 뒤늦게 돌아보니 꽃들은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고개를 들어봐도 픽하고 쓰러졌다. 그제야 난 울었다.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다. 그러나 운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풀 내음만이 점점 그윽해졌다.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상처는 선명히 기억된다. 살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여태껏 많은 상처를 받아왔음에도 상처받지 않는 법은 알 수 없었다. 부담스러운 호의를 거절할 수는 있었지만, 뼈아픈 상처는 나를 거절하게 했다. 세월이 흘러도 상처는 여전히 남았다. 치유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가슴 속의 흉터로 남았다. 가리는 것 말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감독의 기억, 영화의 진정성

 2009년도 영화 <여행자>의 포스터 및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여행자>(2009)는 뭐하나 잘난 것 없는 영화다. 이야기도 흔하며, 연출이 특출난 것도 아니다. 그러나 회한의 정수를 가졌다. 영화는 누구나 가진 상처를 건드린다. 가슴이 짠해지지 않곤 버틸 수 없게 한다. 관객은 그 시절, 그곳에서 바라보던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야기는 김새론(진희 역)이라는 아역 배우를 통해 전해진다. 내가 겪지도 않은 그 감정이 어째서 날 울리는 건지 알 수 없다. 다만, 스크린 위의 꼬마가 어떤 마음인지는 알 것 같다.
가상의 인물에게 이토록 연민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아역 배우의 연기가 뛰어나서? 그 말도 맞다. 김새론은 연기를 잘했다.

그러나 이유가 그것뿐만은 아닐 테다. 영화는 우니 르콩트 감독의 어린 시절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사실 영화 속의 버려진 소녀 "진희"는 가상의 인물이 아니다. 우니 르콩트라는 이름의 기억이다. 한국 사람임에도 한국어를 잊어버린 그녀의 세월이, 어린 시절의 상처에서 배어 나온 피가 영화에 스며들었다. 관객은 스크린 위의 우니 르콩트를 보며 가슴 속 어딘가의 기억을 떠올린다. 자세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떠오른다. 베이는 순간의 날카로움이 떠오른다. 기억은 흐릿하지만, 상처는 선명하다. 그 어린 녀석이 아버지의 뒷모습을 잊지 못하고, 우리도 그렇다. 영화는 낡은 기억을 통해 관객을 위로한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보내는 작은 위로, 영화가 관객을 끌어들이는 힘은 진정성에서 나온다.

진정성이라는 건 일종의 사실 감각이다. 나에게 찾아와 옛일을 사과하는 사람에게서 진정성을 느낀다면,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고 느끼기에 그렇다. 만약 거짓으로 연기하는 것이라도 진정성은 느껴진다. 진정성을 느끼는 사실감각이 이성이 아닌 감성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타인의 속임수를 명확하게 가려낼 방법이 없으니 여태까지 내가 보아왔던 순간들에서 그 "사실"을 뽑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용서하기는 쉽지 않다. 지나간 시간은 흐릿하고, 당시에 무엇을 받았고 무엇을 주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상처만이 뚜렷이 남는다.

이런 게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다. 영화의 진정성은 이러한 사실 감각에 기반을 둔 연출로 이루어진다. 마치 우니 르콩트 감독 개인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카메라를 따라 감독의 인생을 여행한다. 예를 들면, 어린 시절이 흐릿하게 기억나는 것을 아버지의 뒷모습으로 표현한다. 우니 르콩트의 기억 속 아버지의 모습이 흐릿한 것처럼, 식사하고 자전거를 타는 둥 마지막 시간을 보내지만, 뒷모습이나 턱 아래로만 보일 뿐이다. 진희의 기억 속에 아버지의 민얼굴이 뚜렷하게 보이는 건 단 한 번밖에 없다. 진희가 보육원 안으로 들어가는 상처의 순간뿐이다.

영화에 자신의 기억이 얼마나 반영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보육원에 갔던 것과 그곳에서의 일 년, 그리고 그 후의 기억을 토대로 연출한 건 알 수 있다. 영화의 연출은 어린 소녀가 겪는 감정적인 묘사에 집중되어 있다. 약속을 어긴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반복해서 보여주고, 그 사이에서 변해가는 감정의 흐름을 묘사한다. 영화는 줄곧 개인의 기억을 따라간다. 진희가 어딘가를 바라볼 때는 진희의 얼굴 위로 카메라가 올라가지 않는다. 진희가 바라보는 좁은 세상처럼 구도를 좁게 잡고, 인물의 눈높이에 맞추어 카메라와 눈을 마주칠 수 있게 한다. 진희가 바라보는 세상을 카메라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한다. 이러한 쇼트는 보통 카메라가 진희를 관찰하며 진희의 눈높이를 맞추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만, 때때로 진희의 개인적인 시점을 보여줄 때도 있다. 예를 들어, 풀숲에 숨은 진희가 자신을 달래는 수녀님들을 바라보는 쇼트나, 야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행동하는 누군가를 바라볼 때가 그것이다.

이러한 숏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진희가 누군가를 염탐할 때의 시선이라는 점이다. 카메라는 진희의 시선을 따라 철창 너머로, 수풀 너머로, 난간 너머로 보이는 누군가를 잡는다. 진희를 보여주는 쇼트를 넓게 잡았다면 바라보는 대상도 넓게 잡고, 좁게 잡았다면 바라보는 대상도 좁게 잡는다. 누군가가 진희를 바라볼 때는, 진희와 진희를 바라보는 대상을 한 쇼트에 같이 잡는다. 나의 발언과 상대방의 발언이 한 화면에 보이도록 한다.

그런데 진희를 바라보기 위해 진희를 카메라의 정중앙에 놓는 것이 아니라, 진희를 바라보는 인물을 정중앙에 놓고 진희를 그 주변 인물처럼 잡는다. 주인공을 주인공으로 잡지 않는 것이다. 이른바 소격 효과다. 오랜 세월이 지나 과거의 자신을 되돌아보듯, 카메라는 기억 속의 "나"를 제 3자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카메라의 구도를 통해 관객은 두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관객으로서는 진희가 움츠러들고 상처받아 주변에 휩쓸리는 민감한 소녀임을 깨닫고, 작품적으로는 우니 르콩트 개인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역할을 한다. 카메라를 통한 약소한 소격효과로 해당 장면에서의 진희는 주인공으로 인식되지 않고, 주변 인물로서의 진희의 모습이 두드러진다. 한국이 고향인 우니 르콩트가 프랑스에서 느끼는 감정도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검은 눈의 이방인, 입양아였으니.

영화에서 단 두 번 나오는 음악은 진희의 기억 속에서 편집점처럼 작용한다. 음악은 진희가 버스를 타고 보육원 앞에 도착했을 때 한번, 그리고 새로이 입양되어 비행기 탑승구로 향할 때 흐른다. 이 음악이 영화 외부에서 흐른다면, 영화 내부에서는 진희가 부르는 노래가 있다. '당신은 모르실 거야'(1975)가 그것이다. 영화 내부의 노래와 외부의 음악은 모두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다. 어린 시절, 상처로 남은 기억을 보육원으로 들어가던 순간부터 일 년이 흘러 떠나던 공항까지 한정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여행자의 기억이다.

영화 내부에서 진희가 부르던 노래는 과거의 기억을 되짚고, 외부에서 흐르는 음악은 오랜 세월이 지나 상처를 바라보는 자신을 되짚는다. 영화에서의 음악은 우니 르콩트라는 인생의 편집점인 셈이다. 그 시절의 자신은 아버지와 함께하던 순간을 모두 기억했다. 아버지와 식사를 하던 술자리에서 노래를 부를 정도이니 말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기억은 흐릿해졌고, 보육원에 들어가던 순간과 떠나는 순간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사이에는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어긴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영화 내내 반복해서 보여주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감독의 마음을 보여주는 연출이 있다. 진희가 보육원으로 들어가기 전에, 아버지가 딸의 발을 씻어주는 장면이 나온다. 논에서 뛰어놀아 진흙이 묻은 진희의 발을 화장실에서 씻어준다. 세족은 기독교적으로 의미가 있는데, 최후의 만찬이 있던 밤에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다는 성서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 장면을 보면 자연스럽게 전날 진희와 함께 식사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 떠오르게 된다. 동시에, 진희가 부르는 '당신은 모르실 거야'의 가사 중 하나인 "나의 눈물로 당신의 아픈 마음을 깨끗이 씻어 드릴게"가 생각나기도 한다. 이별을 준비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그것을 용서한 우니 르콩트 감독의 마음이 간접적으로 전해진다. 슬플 때 흘리는 눈물조차 과거를 미워하지 않을 정도로 세월이 흘렀으니 말이다.

'당신은 모르실 거야'는 진희가 약속을 어긴 당신에게 보내는 찬송가다. 보육원의 아이들이 성가를 부르지만, 그렇지 못하는 진희가 예수님 대신 아버지를 찬송하는 노래다. 수십 년 후, 자신을 되돌아보는 영화를 만든 우니 르콩트가 진희에게 <당신은 모르실 거야>를 노래하게 만든 건 어딘가에 있을 아버지에게 "내가 당신을 용서했음을" 말하고자 했던 게 아닐까. "세월이 흘러가면 그때야 뉘우칠 거야"라는 노랫말은, 마치 우니 르콩트가 자신의 지난날을 떠올리며 아버지에게 말하는 것만 같다. 영화 속의 인물인 진희는 그것을 직접 겪고 있는 처지다. 아버지는 진희를 보육원에 맡기고 떠났다.

케이크와 마음

 2009년도 영화 <여행자>의 포스터 및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보통, 반가운 손님이 오거나 탄생일을 축하할 때 먹는 것이 케이크다. 그러나 영화에서 아버지가 친구들과 잘 지내라며 사준 케이크는 마지막 선물이 된다. 어머니가 잉태하고, 아버지에게 찾아온 자신을 축하하던 케이크가 이별의 선물이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한다. 자신을 보육원에 잠깐 놀러 온 것으로 생각한 진희는, 보육원의 이모가 나누어준 케이크를 먹지 않는다. 아버지가 자신을 찾으러 올 것이라 믿으며 "손님용" 케이크를 공손히 남겨둔다.

진희는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한다. 영화의 중반부까지 진희는 아버지가 돌아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데리러 온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버려졌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영화는 진희의 심정변화를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보여준다.

보육원의 이모가 진희에게 편한 옷을 주며 갈아입으라 말하자, 진희는 싫다며 거절한다. 단순히 옷을 갈아입기 싫은 게 아니라, 아버지가 자신에게 남긴 마지막 증표를 벗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준 것 중, 케이크는 아이들에게 나누어졌고, 자신의 존재는 보육원에 버려짐으로써 부정당했다. 이제는 몸에 걸친 옷가지만이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서로 잇는 마지막 증표다.

옷가지를 스스로 벗었다면 개인의 극복이라 볼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타인에 의해 벗겨진다. 옷 갈아입기를 거부하고 보육원 화단 넝쿨 안에 숨은 진희는 밤이나 되어서 보육원 안으로 돌아온다. 영화는 넝쿨 너머를 바라보는 진희의 시점 쇼트로 닫힌 마음을 보여주고, 버려졌다는 사실을 타인에게 내비치고 싶지 않음을 밤으로 은유한다. 운동장을 뛰어놀던 아이들도 없고, 직원들조차 잠이 들어 보육원 내부가 고요할 때 진희가 움직인다. 고작 넝쿨 밖으로 나오는 것조차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나오는 진희의 모습이 야생에 내던져진 토끼처럼 보인다.

카메라는 작고 여린 아이가 어두운 보육원 복도를 걷는 것을 후방에서 핸드헬드로 따라간다. 달빛에 늘어진 감정의 뒤꽁무니를 밟는다. 온종일 굶어 배가 고픈 진희가 부엌에서 엎어진 밥그릇을 들어보지만,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공허한 빈 밥그릇 속을 바라보며 조용히 주저앉은 진희가 울먹이는 모습이 어찌나 애처롭던지. 가족의 품에서는 부모의 따듯한 보살핌이 자신을 챙겨주었는데, 이곳은 떼를 쓴다고 해서 아무도 바라봐 주지 않는다. 빈 밥그릇에서 가족의 부재를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 진희는 울다 지쳐 잠이 들게 되고, 보육원 직원들이 다가와 잠옷으로 갈아입히고 눕히게 된다. 상처를 반강제적으로 떠맡아야만 했던 진희에게 옷이 벗겨졌다는 건 슬픈 현실이다.

아마 이때부터 진희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진희는 옷이 갈아 입혀지고 난 뒤에 중간에 깨어나게 되는데, 아이들이 화투패로 점을 치고 있다. 화투패에서 보육원에 손님이 찾아왔다고 말하자, 아이들은 어리둥절해 하며 손님이 왔던 적은 없다고 말한다. 화투패를 둘러싼 아이 중 한 명이 아까 낮에 온 진희가 손님이 아니냐고 묻자, 큰언니 "예신(고아성 분)"은 진희는 손님이 아니라 가족이라 말한다. "손님이 들고 온 케이크를 손님이 먹어선 안 된다"며 케이크를 거부하던 진희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보육원의 아이들과 운명공동체가 된다는 건 그 눈물에 의미가 담겨 있을 테고.

그래도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을 거부한다. 차려진 밥도 바닥으로 쓸어 버린다. 원장에게 찾아가 아버지에게 전화하겠다고 떼를 써보지만, 아버지 전화번호 같은 건 모른다며 거절당한다. 그리곤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답한다. "난 고아가 아니에요." 보육원은 엄마 아빠가 없는 아이들이나 오는 곳이라며, 아빠가 여행을 보내준다고 약속했다면서 돌아올 것이라 믿는 진희, 원장은 아무런 말도 해줄 수가 없다. 단지 진희에게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만 볼 뿐. 이제는 받아들이라고 나지막이 말해줄 수도 없다.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므로.

그다음 쇼트에는 원장이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자, 보육원 담벼락 위에 올라가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진희의 모습이 보인다. 처음에 수녀님들은 내려오라며 걱정해주지만, 이내 관심을 끄라며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만다. 자신이 어떤 떼를 써도 받아주지 않는다는 걸 다시금 확인한 진희, 이모가 열어준 문으로 나가보지만 혼자 힘으로 어디도 갈 수 없다. 홀로 다닐 힘이 있었다면 버려지지 않았을 테니까. 직후의 쇼트는 밥때가 지나서 돌아온 진희가 부엌에 앉아 솥을 긁어먹는 모습을 보여준다. 밥때가 지날 때까지 밖에서 방황하다 돌아온 진희에게 세상은 고작 그 시간 동안의 깊이를 가진다. 보육원에 갇힌 진희의 세상에서 내디딘 발자국의 크기만큼.

다음 성당 시퀀스에서 아이들은 성가를 부르지만, 진희는 배운 게 없으니 멀뚱멀뚱 앉아 있기만 하다. 영화는 목사의 말을 빌려 관객에게 직접 물음을 던진다.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이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이 박혀 죽기 전, 하나님에게 자신의 운명에 대해 원망을 고하는 말이다. 그때 카메라는 진희와 보육원의 인물들, 그리고 진희가 바라보는 대상인 어느 부녀를 한 쇼트에 잡는다. 중요한 건 카메라의 구도인데, 진희 옆의 두 부녀가 왼쪽부터 오른쪽을 향하는 대각선의 구도로 아이-어른의 형태로 앉아 있는 것을 진희에게도 같이 적용한다. 진희와 보육원 이모의 모습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향하는 대각선의 구도로 만들고, 두 인물의 쌍을 나란히 배치하며 대비를 통해 가족의 부재를 부각하는 동시에 이제는 보육원 사람들이 진희에게 가족이 되었음을 말한다. 슬프지만, 진희는 가족과 멀어지며 가족이 되고 있다.

닫혀가는 마음

 2009년도 영화 <여행자>의 포스터 및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진희의 마음은 점점 닫혀만 간다.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Elisabeth Kübler-Ross)가 죽음의 5단계를 주장했던 것처럼 단계적으로 닫혀간다. 그는 인간이 죽음을 선고받고 일어나는 심리의 변화를 5단계로 나누었다. 부인,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이다. 작품에서 진희의 심리변화가 이것과 같다. 진희의 여행은 아버지와의 삶을 죽음으로 이끄는 여행일지도 모른다. 아버지와 삶을 정리하고 자신을 입양한 가족과의 관계에서 새 이름, 새 삶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실제로 영화의 주요 시퀀스를 대략 나누어본다면, 위의 5단계와 유사하게 나누어진다. 케이크를 거부하며 풀숲에 숨던 부인과, 밥을 내동댕이치며 담장 위에 올라서던 분노, 그리고 이젠 협상의 차례다. 정확히 중반부의 지점에 왔고, 영화도 중반부에 이르렀다. 머리를 잘라주던 보육원 이모는 "여기 들어오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며, 이곳에서 예쁘게 행동해야 어른들이 데려간다"는 말을 한다. 그 말에 진희는 "난 아무 곳도 가지 않는다"며 아버지가 데리러 올 것이라 말한다. 이제는 현실과 타협해야 할 시기가 왔음을 깨달은 것이다.

아버지가 올 것이라 굳게 믿지만, 전처럼 적극적으로 부정하며 찾아 나서지는 않는다. 가만히 아버지를 기다릴 뿐이다. 그 대사가 나오는 장면이 머리카락을 자르는 장면인 것은, "머리카락을 적당히 쳐내는" 이발의 행위가 협상의 의미 와도 어느 정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전부 자르지는 못하고, 예뻐 보일 만큼 숱을 쳐내지 않는가. 바닥에 떨어지는 머리카락이 진희의 지나간 것들, 감정 혹은 아버지의 존재처럼 보이기도 한다.

겉으로는 침착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점점 더 조급해졌을 것이다. 후에 이어지는 병원 시퀀스에서 속마음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찌를 때 말해줘야 한다며" 간절히 빌던 소녀의 말이 무색하게 간호사는 순식간에 주사기를 찔러 넣는다. 진희는 "그렇게 해야 덜 아프다"는 간호사를 원망하며 말한다. "말해준다고 했잖아요" 간호사는 이렇게 찌르니 아무렇지도 않다며 진희를 격려하지만, 그런 간호사에게 약속하지 않았느냐며 진희가 되묻는다.

약속은 무겁다. 어린아이에게는 더욱 그렇다. 아직 겪어보지 못한 세상이기에 배신을 당해본 적이 없다. 모든 것이 새로운 아이에게 처음이라는 의미는 크고, 배신의 여파는 충격으로 다가온다. 무작정 받기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부모의 사랑을 돌려준다. 해맑게 웃어 보이거나, 나름대로 성의를 보인다. 작은 세계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성의를 보인다.

그렇게 좁은 세상 속에 살고 있는데, 함께 부대끼던 가족과의 친밀감만큼 배신감도 클 것이다. 진희는 아버지에게 배신을 당했고, 지켜지지 않는 약속에 미련을 두고 있다. 배신감은 온대 간대 갈 곳이 없고, 우울감만이 남는다. "말해준다고 했잖아요, 약속했잖아요" 라는 말의 의미는 제 상처를 보듬어달라는 구원의 요청이기도 하며, 아버지에 대한 모멸감을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양가적이다. 올 것이라 믿으면서도 반은 믿지 않았고, 이젠 오지 않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져 간다.

상담하는 의사가 왜 보육원에 왔는지 아느냐고 묻자, 진희는 섣불리 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인다. 어린아이의 좁은 식견으로는 아버지가 왜 자신을 버렸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유를 만들어낸다. 자신이 새어머니의 아기를 품에 안았을 때 우연히 아기를 찌른 옷핀이 버려짐의 이유가 된다. 버려짐에 대해 자신과 타협한 것이다.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버림받은 것이라고, 그럴 만했다고 말이다. 진희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무척이나 괴로워한다. 목적 없는 물음은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덧없는 메아리처럼. 왜 그랬느냐고 물어도 내 목소리만이 돌아올 뿐이다.

보육원 아이들 목록에 올리기 위해 사진도 찍고, 본격적으로 입양 준비를 하는 진희다. 자신은 아직 이곳에 남지만, 하나둘 선택되어 떠나가는 다른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짓는다. 아이들은 누군가를 떠나 보내며 노래를 부르지만, 울며 슬퍼하지는 않는다. 각자 가야 할 길이 다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들어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기에, 서로가 애틋하지 않다. 다시 한번 이별하는 모습에 울먹이지 않기 위해서 정을 주지 않는다. 이미 한 번 헤어졌던 아이들이 오는 장소, 보육원은 그런 곳이다.

쉽게 헤어지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진희가 의지하는 존재가 있다. 영화에서 숙희는 진희를 이끌어주는 실질적 보호자의 역할을 한다. 진희가 처음 보육원에 오던 순간에 몇 살이냐고 묻고, 두려워 숨은 덩굴 속에서도 어서 나오라고 말해준다. 담장 위에 올라간 진희를 끌어내리려 하고, 빨랫비누로 머리를 감던 진희에게 머리가 상한다며 샴푸를 건네준다. 진희는 자신에게 잘해주는 숙희에게 쉽사리 마음을 열지 못하지만, 비밀을 공유하며 친해지게 된다. 피 묻은 팬티를 손빨래하는 진희의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그리고 옆에 있던 아버지 대신 의존하게 된다.

아이들을 위해 공연을 하는 미군을 보며 다른 아이들처럼 해맑게 웃는 진희, 극 중에 미군이 "너도 미국 가고 싶어?"라며 익살스럽게 묻는 말에 입꼬리가 내려간다. 그날 밤, 숙희(박도연 분)와 함께 보육원 천장에서 카스텔라를 몰래 훔쳐먹으면서도 자신은 미국 같은 곳은 가지 않는다며 심통을 부린다. 맛있는 카스텔라를 마음껏 먹을 수 있어도, 결국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옆에 있는 진희가 외국인 부모의 눈에 띄기 위해 영어도 배워야 한다는 둥 열심인 것과는 정반대다. 진희와 숙희의 나이 차만큼, 상처에 익숙한 정도도 다른 것 같다. 숙희는 이별을 말하는 것에 담담하다.

진희와 숙희, 그리고 보육원의 절름발이 큰 언니 예신(고아성 분)은 이별을 대하는 태도가 각각 다르다. 숙희가 과거를 훌훌 털고 일어나 새로이 입양되기 위해 외국인 부모 앞에서 영어를 자랑하며 적극적인 것과는 다르게, 두 사람은 소극적이다. 예신은 입양되어 봤자 식모 노릇 밖에 더하느냐며 울분을 토하기도 하고, 진희는 아무 곳도 가지 않는다며 아버지를 기다린다. 예신은 운명점에 따라 고백이 성공할 것이라 믿고 보육원에 자주 오는 젊은 청년에게 연애편지를 준다. 그러나 돌아온 답장을 읽고 큰 실망에 빠지고, 자살 기도를 한다.

예신이 느낀 감정은 무엇일지 갈피를 잡기 어렵다. 화투로 알아본 자신의 미래가 부정당해서 배신감을 느꼈을 수도 있고, 사라진 인연의 끈이 다시금 이별로 다가왔을 수도 있다. 다만 보육원에서 만난 자신의 사랑을 떠나보냄으로써 보육원에 남을 이유가 사라지고, 식모 역할이라도 입양을 결심하게 된다. 누구나 하나씩 가지고 있는 과거와의 접점이 있는데, 과거와 남아야 할 목적이 사라지면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붙잡을 것이 없기에 새로운 것을 찾아 나아가는 것이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선 성장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마음이 부족하므로 퇴보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별은 항상 현재에 머물러 있다. 오도 가도 못하게 발을 붙잡는다.

아마 보육원이라는 장소가 방금 언급한 의미와 비슷할 것이다. 과거로부터 버려지고 미래를 향하기 전 머물러 있는 곳이 보육원이다. 이별을 당해서 온 장소인 동시에 함께 생활하던 아이들을 계속해서 떠나 보내는 장소이기도 하다. 깊은 이별의 수렁과도 같다. 이런 아이들의 감정을 잘 담는 연출이 예신이 좋아하는 청년이 편지를 전해주는 장면이다. 보육원 문이 닫혀있어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철장 밖에서 진희와 숙희를 불러 편지를 전달하게 한다.

이때 철창으로 분리된 두 공간이 마치, 근본적으로 다른 방향과 세계에 사는 것처럼 보인다. 애초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청년은 평소에도 보육원 안에 자주 드나들던 것으로 보아 이때도 편지를 전해주려고 마음먹었다면, 안으로 들어와 본인에게 직접 전해주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청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직접 거절의 의사를 전달하기가 껄끄러웠기 때문이고, 영화가 이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철창이다. 카메라는 철창에 바짝 붙어서 거리감을 강화한다. 인물의 얼굴 위에서부터 세로로 가로막힌다. 감옥처럼 말이다.

카메라는 이러한 감정의 흐름을 철저하게 관찰자의 시선으로 담아낸다. 눈앞에 보이는 모습 말고는 어떠한 것도 알 수 없는 진희의 시선을 따라간다. 진희가 주인공이기에 주변 인물인 예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예신을 따라 카메라가 이동하지 않는다. 예신에 대한 묘사는 진희가 지나가다 간간이 마주친 장면들로 이루어진다. 부엌에서 음식을 훔치다 서둘러 숨은 채로 엿듣는 예신의 대화를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원경으로 잡고, 아래에서 편지를 읽는 예신의 모습을 위에서 훔쳐보는 아이들의 시선으로 위에서 아래로의 원경으로 보여준다. 카메라는 두 장면을 두 번에 걸쳐 담는다.

후자의 장면을 예로 들면, 아이들과 함께하는 진희의 시선으로 폭넓게 한번, 아이들이 들어가고 혼자 남은 진희가 문 사이에 걸쳐 진희를 바라보는 모습을 미들 쇼트로 한 번 잡는다. 풀 쇼트에서 미들 쇼트로 나아가며 카메라에 담긴 감정이 점점 커진다. 전자의 장면에서는 한없이 높아 보이는 큰 언니를 올려다보지만, 후자의 장면에서는 그런 언니조차도 나보다 성숙하거나 완벽하지 않다는 걸 알고 동정하게 된다. 이것이 영화에서 카메라가 관객에게 감정을 전달하는 방법이다. 무리 속에 파묻힌 감정은 잘 드러나지 않지만, 홀로 서 있을 때야 극대화된다. 진희는 카메라의 깊이만큼 예신을 이해했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사랑이 뭔지는 몰라도, 이별이라는 것의 아픔은 아니까. 이별은 누구에게나 뼈아프다.

진희에게 과거와 미래를 잇는 것은 다친 아기 새다. 병원에서 검사하고 난 뒤, 진희와 숙희는 죽어가는 아기 새 한 마리를 발견하고 보살피게 된다. 먹을 것을 훔쳐 아기 새에게 주고, 비가 오자 추위에 떨지 않도록 방 안으로 몰래 데려온다. 그러나 애틋한 보살핌에도 아기 새는 죽고 만다. 두 사람은 아기 새를 화단에 묻어 준다. 나뭇가지로 만든 십자가와 함께.

진희가 유독 아기 새를 유달리 아낀 것은 생명에 대한 소중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기 새에게서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둘 다 가족에서 떨어져 나와 상처 입은 상태여서 보살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 아기 새가 다친 날개를 펴서 훨훨 날아가길, 자신도 그러하길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아기 새의 사망과 함께 여러 악재가 닥쳐온다. 예신 언니는 거절당한 충격에 자살 기도를 하여 병원으로 실려 가고, 아이들끼리 하는 화투 점은 숙희가 입양되어 떠나리라는 것을 예지한다.

예신은 병원에서 돌아와 아이들 앞에서 기독교식으로 자신의 죄를 고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하나둘 웃자 자신도 웃기 시작한다. 단 두 명, 숙희와 진희만이 이별의 의미를 알기에 웃을 수가 없다. 사랑을 거절당해 보육원에 있을 이유가 없어진 예신은 결국 떠나게 되고, 두 사람은 멍하니 밖을 바라보기만 한다.

이제 곧 숙희도 떠나게 되면 진희는 혼자 남는다. 진희의 마음은 복잡하다. 그때, 보육원 안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만난 이모의 모습이 이별에 대한 보육원 사람들의 모습을 대변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훈육하던 보육원 이모가 빨래를 털며 조용한 눈물을 흘린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아이를 떠나 보냈지만, 그런데도 이별은 항상 슬프게 다가온다. 다들 겉으로 티를 내지 않을 뿐이다. 어른이기에, 성숙하기에, 더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정을 주어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아기 새가 죽은 후로, 진희의 감정은 수용 단계에 들어선다. 과거와의 이별을 준비한다. 숙희는 자신을 입양한 양부모님에게 진희도 같이 입양해 달라고 말하겠다 약속하며 영어도 가르쳐준다. 그러나 숙희는 양부모님 댁에서 자고 온다며 약속을 지키지 않고, 진희는 다시 한번 지켜지지 않은 약속에 상처를 받고 죽은 새를 떠올린다. 죽은 새처럼 파묻힐 것으로 생각하며 애꿎은 땅을 판다. 버려진 새를 살려내겠다고 약속하며 애틋하게 보살핌에도 죽은 것처럼, 자신도 버려진 상태로 보육원에 있지만, 약속을 어긴 숙희에 의해 죽어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뒤늦게 숙희가 다가와 미안하다 사과를 해보지만,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상처를 받은 진희에게 사과가 통할 리 없다. 그저 모두가 같은 사람으로 보일 뿐이다. 겉으로는 담담하게 숙희를 떠나 보낸다.

숨길 수 없는 마음

 2009년도 영화 <여행자>의 포스터 및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그러나 속마음까지 숨길 수는 없다. 보육원에 들어온 기부 물품을 아이들끼리 나누어 가지지만, 진희는 벽에 딱 붙어서 거절한다. 그리곤 다른 아이들이 받은 물품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그 행동에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아빠와 숙희에 대한 원망도 있고, 보육원 안에 갇힌 자신의 마음이 보육원의 물품을 받음으로써 영원히 나가지 못하게 될까 하는 두려움도 있다. 과거로부터 도망치고 싶고, 미래로 나아가기는 싫은 것이다. 그저 보육원에 있는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기에 말이다.

아이들이 진희의 행동을 고자질해 달려온 보육원 이모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진희의 뺨을 때린다. 그리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널려 있는 빨래 앞으로 데려가 기분이 풀릴 때까지 마음껏 치라 말한다. 이모는 보육원의 아이들을 떠나보낼 때마다 자신이 홀로 삼켜야 했던 슬픔을 진희에게 알려준다. 고작 그것으로 울분이 풀린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아무리 이불을 세게 친다 한들 이별의 아픔이 사라질 리가 없다. 결국, 이모가 진희에게 알려준 건 슬픔을 극복하는 법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법이다. 자기 몸뚱어리만 한 빨랫방망이를 휘두르는 진희의 모습이 얼마나 안쓰러운지. 방망이가 슬픔의 형태라면, 같은 크기의 슬픔이라도 어른에게는 거뜬하지만, 어린아이에게는 버거워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단 한 번, 원장에게 찾아가 아빠를 꼭 만나야 한다며 자신이 아는 집 주소를 불러준다. 전화번호는 몰라도 집 주소는 알고 있으니 원장에게 주소를 찾아가 달라 부탁한다. 전화번호와 집 주소는 각각 청각(귀로 듣는 전화)과 시각(눈으로 보이는 집)의 주소로 일컬어지는데,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로는 이미 버림받았음을 깨달았지만,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원장이 확인해본 바로는, 아버지와 새 식구들은 이미 옛집을 떠나고 사라져 버렸다. 귀로나 눈으로나 자신이 돌아갈 곳이 없음을 깨달은 진희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 모습이 전에 떠나버린 예신 언니와 똑같다. 예신 언니처럼 "누군가를 기다릴 이유"가 사라지자 보육원에 있을 이유가 없어진다. 많은 생각에 잠겨 이불을 덮고 누워 미동도 하지 않고, 다른 아이들이 모두 외출할 때 건물에 남아 아이들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본다. 이때 카메라는 철창을 가만히 비추다가 통과하는 아이들로 시선을 이동하고, 진희의 얼굴을 한 번 보여준 뒤, 굳게 닫힌 철창을 아래에 놓고 그 위로는 아이들의 행렬을 보여줌으로써 만나는 것과 떠나는 것을 한 장면에 담는다. 진희는 자신이 들어오던 날과 떠나게 될 날을 동시에 보는 것이다.

이후 진희는 모두가 떠나 텅 비어버린 보육원을 한 번씩 흩어본다. 카메라도 진희의 눈높이에 맞추어 중간 단계의 높이를 유지한다. 밖으로 나온 진희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굳게 닫힌 철문을 바라본다. 카메라는 이러한 모습을 여태껏 진희가 건물 위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넓고 높은 구도로 잡는다. 진희가 처음 보육원에 오던 날 철창 너머로 보이던 아이들이 철창 앞의 낡고 작은 건물 지붕 위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것처럼 말이다.

그 후로도 그 아이들의 위치에서 자신이 바라보기도 하고, 보육원 침실 창문으로 밖을 바라보기도 한다. 그리고 그 쇼트들은 모두, 진희가 "누군가가 떠나는 모습"을 보는 장면이다. 카메라는 진희의 시선으로 진희를 재현함으로써 감정 또한 재현한다. 내가 떠나는 모습을 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진희는 조금 전에 떠났던 아이들의 행렬과 그동안 떠나보냈던 아이들을 생각하며 자신도 언젠간 떠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지는 않는다. 전에 도망을 가려 했을 때와는 다르게 이제는 이곳이 자신이 있을 곳이며, 곧 떠나야 함을 알고 있다.

철창 앞에서 망설이는 다음 장면에는, 진희가 화단에 누워 자신을 파묻고 있다. 숙희가 떠날 때부터 몰래 파오던 구덩이다. 죽은 아기 새처럼 땅속에 파묻히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보지만, 얼굴까지 다 덮고서도 이내 고개를 들고 숨을 쉰다. 이어지는 장면에는 아기 새가 묻힌 십자가와 그 뒤로 자애로운 성모 마리아의 모습만이 보일 뿐이다.

그다음 장면에는 진희가 물이 흐르는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보육원에서 대청소하며 창문에 물을 끼얹은 것이다. 진희는 물이 흐르는 창문에서 여러 상처를 떠올린다. 비에 젖을까 봐 아기 새를 안으로 들여놓다가 예신이 상처받고 뛰어나가던 모습을 목격한 그 날도, 숙희가 떠나고 나서 원장선생님에게 집 주소를 찾아가 달라며 애원하던 그 날도 비가 왔었다. 진희는 왜 어린 동생들에게만 케이크를 주냐며 항의하던 숙희의 모습, 생리할 나이가 되면 아무도 데려가지 않는다며 야밤에 몰래 나와 팬티에 묻은 생리혈을 지우던 숙희의 모습, 그런 가정집에 입양되어봤자 식모밖에 더 되느냐며 답답함을 토로하는 예신의 모습, 좋아하던 남자가 답한 편지의 내용을 읽고 밖으로 뛰쳐나간 예신의 모습을 기억한다. 이별의 순간뿐만 아니라, 각자가 가진 상처를 기억한다. 각자가 가진 여러 상처가 모여 흉터가 된다.

상처, 흉터, 치유

 2009년도 영화 <여행자>의 포스터 및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이제 때가 왔다. 진희는 어떤 외국인 부부에게 입양된다. 처음 보육원에 왔을 때 아버지가 사준 새 옷을 벗던 것과는 다르게, 이모가 예쁜 차림을 하고 가라며 새 옷을 입혀준다. 여태껏 봐왔던 송별식의 주인공이 자신이 되었고, 아이들은 이별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환하게 웃으며 사진 찍는다. 보육원을 떠나는 외국인 부부의 자동차 안에서 돌아본 보육원의 모습은, 진희가 처음 오던 날과는 정반대의 구도로 보인다. 그토록 떠나고 싶어했지만, 가족의 품을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떠나게 되는 곳의 풍경이 진희의 눈앞에 아른거린다.

같은 날, 진희는 외국으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자전거를 타던 꿈을 꾼다. 카메라는 어둑어둑한 골목길을 비추는 자전거의 플래시 라이트를 따라 뒷모습을 보여주지만, 그다음 장면에서는 진희가 도착지의 게이트 밖으로 나오는 모습을 정면에서 보여준다. 낯선 곳에 주눅이 들어 고개를 내리고 걷던 진희의 모습이 진희의 시점 쇼트로 바뀌면서 자신을 입양한 외국인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고개를 든 채로 영화가 끝난다.

마지막 장면을 두 갈래로 해석할 수 있다. 어두운 밤길에서 밝은 낮으로의 전환과, 좁은 통로를 빠져나가는 탈출구이다. 터널 속을 달리는 것처럼, 어두운 과거와 이별하고 출입구에서 쏟아져 나오는 밝은 빛을 맞이한 것이다. 이런 것이 감독이 자신의 신앙, 혹은 믿음에 묻는 물음처럼 느껴진다. 영화에서 수녀님이 보육원의 직원인 것으로 보아, 가톨릭 단체에서 운영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유독 영화 중간마다 성모 마리아상이 많이 나온다. 거의 열댓 번은 나오는 것으로 기억한다. 중요한 장면에는 카메라 구석이든 어디든 간에 성모 마리아상이 나온다.

아마 의도된 것 같다. 우니 르콩트 감독이 입양된 가정이 개신교를 믿었던 만큼, 감독에게 신앙의 존재란 각별했을 것이다. 어떤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겨내는 힘을 준 게 신앙심이라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아무리 하늘에 빌어도 소원을 이루어주지 않는 하늘에 덧없음을 고하고 싶었던 것일까? 하느님에게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데 왜 아기 새는 죽어야만 했고, 자신은 버림받아야만 했는지. 아마 영화 속의 진희처럼 "둘 다" 그런 마음을 가졌을 것 같다. 현재의 집인 보육원을 떠나며 기억 속의 집을 떠나보내야만 했으니까. 이겨내는 동시에 상처받아야만 했으니까.

그래서 사실, 흉터는 그 자체로 흉터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 흉터는 실체가 없다. 단지, 그 당시의 사건들에 박힌 상처가 묶여 보이지 않는 흉터를 만들어 냈을 뿐이다. 그래서 상처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흉터에 쌓인 케케묵은 먼지를 덜어내기 전까지는 상처가 보이지 않는다. 손에 손을 잡은 상처들이 흉터를 내고, 우린 흉터가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게 상처라는 사실은 그 당시의 상황들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그만큼 우리의 과거는 복잡하다.

 2009년도 영화 <여행자>의 포스터 및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선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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