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테이블> 스틸 사진

영화 <더 테이블> 스틸 사진 ⓒ 엣나인


타원형의 짙은 고동색 나무 테이블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이내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마른 수건으로 테이블을 정성스레 닦는다. 영화 <더 테이블>의 첫 장면이다. 김종관 감독이 그렇게 돌아왔다.

작년, 김종관 감독은 <최악의 하루>로 관객들을 찾았다. 배우 지망생 '은희'(한예리 역)의 하루를 그렸던 작품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은희는 무려 세 명의 남자를 만난다. 처음 만난 남자, 지금 만나고 있는 남자, 전에 만났던 남자까지. 능력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재수가 없어서다. 누구나 있지 않은가. 자꾸만 꼬이고 안 풀리는 날. 낯선 여인의 트위스트 같은 하루를 따라가다 보면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묘한 매력의 작품이다.

어떤 하루

여인의 하루에 이어 이번엔 테이블의 하루다. 어느 한적한 동네 카페의 테이블. 탁 트인 창가 옆, 수선스럽지 않게 위치한 그 자리는 그 카페의 인기 자리인 듯하다. 그 테이블(The table)은 하루에도 몇 번, 사람들을 앉히고 떠나보낸다. 영화 <더 테이블>은 그 자리를 머물러 간 네 쌍의 인연들의 모습을 담았다.

오전 열한 시, 처음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유진(정유미 역). 선글라스와 마스크. 연예인 외출의 정석 차림인 유진은 역시 배우다. 그것도 스타 배우. 그녀가 숨을 돌리고 있을 때 그녀의 전 남자친구, 창석(정준원 역)이 들어온다. 아마도 둘은 그녀가 뜨기 전에 만났던 사이인 듯하다. 그녀는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고 여자 유진으로 창석 앞에 앉았다. 하지만, "연예인은 그렇잖아요"라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는 창석에게는 그녀가 여전히 톱스타 유진으로만 보이나보다. 그는 그녀에 관한 뜬소문들의 진상을 '진상'처럼 물어본다. 순수한 얼굴을 하고서 집요하게. 연인 사이였던 것을 보여줄 증거사진을 부탁하기도 한다.

 영화 <더 테이블> 스틸 사진

영화 <더 테이블> 스틸 사진 ⓒ 엣나인


그만 일어나자는 유진의 말에 창석은 아쉽다고 말했다. 유진이 "나도"라고 답했다. 그들의 아쉬움은 결이 다른 아쉬움이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스타와 더 오래 같이 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어 아쉬웠고, 그녀는 자신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이 남자가 참 아쉬웠을 것이다.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유진 앞, 맥주를 들이키는 창석은 관객의 입장에서도 너무나 아쉬운 남자였다.

오후 두 시 반, 테이블 위 유진과 창석의 흔적은 어느새 깨끗하게 닦였다. 대신 두잔의 커피와 초콜릿 무스케이크가 올려졌다. 하룻밤 사랑 후 다시 만난 경진(정은채 역)과 민호(전성우 역) 사이에는 어색한 기류가 흐른다. 표정이 좋지 않은 경진. 말없이 여행을 떠나고는 사진도 한 장 보내주지 않은 민호가 원망스러웠던 탓이다. 애매한 관계에 내내 불안에 떤 그녀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일까. 하지만 민호는 여행 내내 그녀를 생각했다. 체코에서는 손목시계를 보고, 독일에서는 카메라를 보고 그녀를 생각했다. "보이는 대로 사고 싶어서요" 민호의 말의 속뜻은 어쩌면 이것일지도 모른다.

"보이는 대로 (경진이) 보고 싶어서요."

테이블을 떠나는 그들 사이에는 냉기 대신 훈기가 감돌았다.

오후 다섯 시에 그 나무 테이블은 사기 결혼을 위해 만난 은희(한예리 역)와 숙자(김혜옥 역)를 위한 비밀모의의 장이 된다. 사기극을 위해 다정한 모녀 사이가 돼야 하는 그들. 테이블 위에는 라떼 두 잔이 나란히 놓여 있다. 어쩐지 닮은듯 한 두 사람은 커피 취향마저 비슷하다. 오후 아홉 시, 부슬부슬한 밤비와 잘 어울리는 혜경(임수정 역)과 운철(연우진 역)의 방문을 마지막으로 주인은 마감 준비를 한다. 카페에는 불이 꺼진다.

 영화 <더 테이블> 스틸 사진

영화 <더 테이블> 스틸 사진 ⓒ 엣나인


소탈한 소품

끝이냐고? 끝이다. 왠지 모든 걸 꿰뚫어 볼 것 같은 인상을 가진 주인의 하루도, 테이블 위 작고 하얀 꽃의 하루도, 유진, 창석, 경진, 민호, 은희, 숙자, 혜경, 운철의 하루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느라 누구보다 바빴던 테이블의 하루도 저문다. 내일이야 어쨌건 오늘은. <더 테이블>은 어느 테이블이 쓴 일기 같다. 소탈하고 사랑스럽다.

카페에 가면 가지각색의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다. 이어폰을 꽂은 채 토익 교재를 풀고 있는 대학생. 오후 한때를 즐기기 위해 삼삼오오 모인 아주머니들. 서로의 '인생샷'을 찍어 주는 연인들. '종특'(종족 특성)이라고 해야 할까. 특유의 여유로운 분위기를 가진 주인의 모습까지. 그리고 기분 좋은 소리가 그 공간을 떠돈다. 비밀스럽기도 장난스럽기도 한 대화 소리와 그 대화를 결코 방해하지 않는 센스 있는 음악이 섞인 부드러운 소음. 카페는 살아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이야기와 함께.

영화관을 나와 단골 카페로 향했다. 자몽티 한 잔을 주문하고 노트북을 켰다. 작업을 할 요량이었는데 오늘따라 사람들의 대화에 자꾸만 귀가 쫑긋해진다. 그들의 컵 속에 라떼가 담겼는지 홍차가 담겼는지 궁금해진다. 테이블을 들고 돌아온 김종관 감독 때문이다. 그가 다음에는 누구의 하루를 들고 찾아올 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자세한 내용은 극장에서 확인하라. 이왕이면 식을 준비가 된 따뜻한 음료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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