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카페의 문이 열렸습니다. 창가 앞 테이블 위에 꽃이 담긴 물컵이 놓였고, 테이블은 나지막이 손님을 기다립니다. 오전 11시, 오후 두시 반, 오후 다섯시, 그리고 저녁 9시. 각기 다른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 테이블에 앉아 자신의 일상을 이야기하고 나눕니다. 

마음 가는 길과 사람 가는 길이 왜 이리 다른 것일까요. 한 여자는 추억을 공유했던 과거의 인연에게 따뜻한 배려와 미소로 다가갔지만, 그 남자는 추억을 상처투성이로 만들어버립니다. 남자는 이른 시간에 마신 맥주처럼, 이번 재회를 취기 혹은 한때의 즐거움과 과시로 남기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여자가 시킨 에스프레소는 씁쓸함만 남겼습니다. 

 영화 <더 테이블> 스틸 사진

영화 <더 테이블> 스틸 사진 ⓒ 엣나인


마음 가는 길이 같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밤의 불꽃을 틔운 남녀는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분명 마음 가는 길은 같아 보이는데, 남자가 본심을 털어놓지 않으니 여자는 초조해합니다. 반면에 남자는 여자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웃기만 할 뿐입니다. 여자는 실망감에 휩싸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납니다. 그제서야 남자가 초조해하네요. 남자는 선물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합니다. 하루에 한 번씩 돌려야 움직이는 태엽 시계는 체코에서 사 온 것입니다. 한국에 돌아온 지금까지, 시계는 움직이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시킨 건 초콜릿 무스 케이크네요. 케이크 안에는 숨겨진 아몬드는 보석과 같습니다. 포장되지 않은 시계 선물처럼요. 남자의 진심은 포장되지 않고 여자에게 전달됩니다. 

 영화 <더 테이블> 스틸 사진

영화 <더 테이블> 스틸 사진 ⓒ 엣나인


노을빛이 깔린 오후 5시, 한 여자는 중년의 여사에게 '거짓말을 의뢰'합니다.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 두 사람의 삶이 온통 거짓말투성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 두 사람은 우연히 삶의 접점을 발견합니다. 결혼, 그리고 딸. 여자는 한 남자를 만나 처음으로 진짜 사랑을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그녀에게서 자신의 혈육이 겹쳐 보였던 여사는, 거짓말을 해야 하지만 그 위에 노을빛 진심을 덧칠합니다. 그리고 그 거짓말을 여자에게 미리 보여줍니다. 그 따뜻함을 전해 받은 여자는 눈가를 훔치며 잘해주셨다고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두 사람은 라떼를 마십니다. 두 사람의 삶은 우유 향에 덮인 커피와 닮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여사는 라떼에 작은 각설탕 하나를 넣어 마십니다. 거짓투성이면 뭐 어때요. 오늘 마시는 라떼는 그 무엇보다도 달콤한걸요. 

 영화 <더 테이블> 스틸 사진

영화 <더 테이블> 스틸 사진 ⓒ 엣나인


저녁 9시, 누군가는 잠에 빠져 꿈꾸고 있는 시간입니다. 지금 만난 두 사람에게도 그렇습니다. 피곤한 남자는 여자를 기다리다가 물컵에 놓인 꽃을 찢어놓습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잔소리를 했지만, 남자는 이미 죽은 꽃이라고 귀찮다는 듯 말하네요. 아이러니하게도 여자는 죽은 잎을 끓인 홍차를 시켰네요.

한때 사랑의 꽃을 틔우던 두 사람. 하지만 지금은 그 꽃이 시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간직하고 있던 그 시든 꽃을 버려야 하는 날입니다. 두 사람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여자는 솔직했고, 남자는 마음을 숨기느라 힘들었습니다. 붙잡아 달라는 여자, 힘들게 그 부탁을 뿌리치는 남자. 내내 본심을 숨겼던 남자는, 카페 밖으로 나와 헤어지기 직전에, 처음으로 본심을 털어냅니다. 

"당신과 자는 꿈을 꿨어. 당신과 함께 꿈속에서 걸었어." 

지금 이 순간이 꿈이기를 바라는 남자, 그의 본심을 읽은 여자. 두 사람은 그렇게 각자의 길로 헤어집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영화 <더 테이블> 스틸 사진

영화 <더 테이블> 스틸 사진 ⓒ 엣나인


밤이 깊었습니다. 오늘의 카페는 여기 까집니다. 우리는 테이블 앞에 앉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표정을 지켜보았습니다. 빈자리는 금세 다른 사람으로 채워지고 또 다른 이야기와 표정이 오갔습니다. 네 가지 이야기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본심'입니다. 누구에게나 쉽게 들킬 만한 본심을 아닌 척하면서 말하고, 빙빙 돌려가며 말하고, 누군가는 그 본심을 끝내 모른 체하기도 하고 조심스럽게 그 마음을 받아줍니다.  

사람들의 본심을 털어놓게 되는 공간, '테이블'이 이 영화의 중심에 놓여있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본심을 아주 쉽게 들으며 웃고 떠들고 감동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테이블에 앉게 된다면 어떨까요? 

내일도 카페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창가에 놓인 테이블을 닦고 그 위에 꽃이 담긴 물컵이 놓이겠지요. 오늘처럼, 사람들이 테이블 앞에 앉아 각자의 본심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 영화를 본 후에 당신과 카페를 간다면, 당신이 주문한 음료가 무엇인지 신경 쓸 것이고, 당신이 말할 때의 표정을 놓치지 않으려 애쓸 것입니다. 그리고 내 이야기를 듣는 당신의 입꼬리를 유심히 바라보겠지요. 나는 카페에 앉아 있는 내내 당신의 마음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마음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소소한 만남이 있는 일상에 작은 마법을 걸어주는 테이블에, 여러분의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앉아 마음을 주고받았으면 합니다. 좋은 영화거든요.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건의 시민기자의 '브런치'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영화 더테이블 정유미 한예리 임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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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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