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배구가 제19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동메달을 따내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홍성진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세계랭킹 10위)은 17일 필리핀 알론테에서 열린 3·4위 결정전에서 중국을 세트 스코어 3-0으로 꺾으며 3위를 차지했다. 전날 태국에 완패하며 결승 진출이 좌절된 한국은 동메달로 아쉬움을 다소나마 만회했다.

하지만 이번 대회는 성적뿐만이 아니라 기량, 행정, 비전 등 한국 여자배구의 현 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줬다는 평가다. 내심 이번 대회에서 우승까지 노렸던 한국이지만 간판스타 김연경에만 의존하는 전력의 한계와 부족한 선수층, 협회의 부실한 지원을 절감하며 아쉬운 성적표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열악한 조건에서 고생한 선수들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거의 없었다.

사실 여자배구 대표팀은 이미 이번 대회 개막 전부터 '혹사' 논란에 시달렸다. 주장 김연경 등 주축 선수들은 지난달 월드 그랑프리 대회부터 한국과 유럽을 오가는 장거리 이동 속에 빡빡한 경기 일정을 소화하느라 강행군을 펼쳐야 했다.

그랑프리를 마치고 지난 1일 귀국한 뒤 다시 아시아선수권이 열린 필리핀으로 출국하기까지 휴식 시간은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 특히 주축 선수들은 두 대회를 넘나들며 별다른 선수 변동 없이 살인 일정을 소화했다. 상대국들이 대회의 경중에 따라 1·2진을 번갈아내며 로테이션을 가동할 동안 한국은 보장된 최소한의 정규 엔트리도 채우지 못하는 촌극을 빚었고 실제 경기에서는 6~7명의 주전급 선수들만 계속해서 경기에 나서야 했다.

결국 참다못한 김연경이 선수단을 대표하여 대회 출국 직전 인터뷰에서 대표팀의 열악한 현실을 공개적으로 폭로하며 " 고생하는 선수만 고생한다"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대표 차출에 소극적이라는 의혹을 받은 특정 구단과 선수도 실명이 거론되며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직까지 없다. 실제로 아시아선수권 기간중 센터 양효진이 결국 과도한 일정에 따른 피로누적과 허리부상으로 하차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김연경에 대한 의존도는 여자배구의 또다른 숙제였다. 어느덧 서른을 바라보는 김연경은 여전히 그랑프리와 아시아선수권에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과시했지만 '원맨쇼'의 한계도 분명했다. 태국이 작은 신장과 걸출한 슈퍼스타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탄탄한 조직력과 스피드로 한국의 덜미를 잡았고, 세대교체중인 일본도 안정적인 전력을 과시하며 10년만의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은 3.4위전에서 중국을 이겼지만 젊은 선수들로 구성된 2진급에 가까웠고, 김연경이 없을때는 한 수아래로 꼽히던 베트남에게도 고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이로 볼때 김연경의 전성기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장 2~3년 후만 되어도 어떻게 될지 걱정스러운 대목이다.

한국 여자 배구는 그동안 국제무대에서 꾸준한 성적을 올릴수 있었던데는 김연경의 존재감이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김연경도 나이를 먹어가고 있고, 다가오는 2020 도쿄올림픽은 김연경이 대표선수로서 출전하는 마지막 무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김연경은 2014 인천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올림픽에서는 2012년 런던대회 4위, 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5위로 항상 메달권에 2% 부족했다. 김연경을 제외하면 여자대표팀의 전력이 정체된 상황에서 도쿄올림픽 메달권까지 진입할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대단히 낮아보인다.

현재 여자배구, 나아가 한국 배구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상대국이 아니라 바로 배구계 그 자체에 있다는 평가다. 특히 스포츠팬들 사이에서 사실상 '공공의 적' 취급을 받고 있는 대한민국 배구협회의 무능과 부패는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2014년 아시안게임 우승 이후 고생한 선수들에게 무성의한 김치찌개 회식 논란에서부터, 리우올림픽에서는 경기장 출입에 필요한 AD카드를 구하지못했다는 이유로 지원 스탭도 제대로 파견하지못하여 선수가 직접 통역이나 매니저 역할까지 수행한 촌극이 알려져 뭇매를 맞기도 했다.

지난 7월 있었던 그랑프리 대회때는 예산 부담을 핑계로 오한남 배구협회장 지시로 선수단중 절반이 이코노미석에 배정받아 차별 논란을 일으켰지만 정작 협회 행사 때는 호텔에서 호화 취임식을 벌였다는 구설수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심지어 최근 혹사 논란에 대한 비판 여론이 심각한 상황에서 배구협회 임원이 김연경에 대하여 국제대회 추가 출전을 압박했다는 의혹이 드러나 또다시 논란에 휩싸였다.

최근 2년 사이 두 번의 협회장 교체에 임원진 역시 수시로 교체되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밥에 그 나물'이었고 행정력 공백만 드러났을뿐 개선의 여지는 별로 보이지 않는 실정이라는 평가다. 오죽하면 감독도 아니고 일개 선수인 김연경이 앞장서서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내야할만큼 타성에 젖은 배구계의 부조리와 무사안일주의가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준 장면이다. 그나마 김연경 정도가 되었으니 목소리라도 낼수 있었지만 다수의 선수들은 협회의 강압이나 불이익이 두려워 부당한 대우에도 묵묵히 참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쯤되면 지금의 여자배구대표팀이 과연 진정으로 국가를 위한 대표인지, 아니면 협회만을 위한 노예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언제까지 국가를 위한 사명감이나 애국심을 볼모로 삼아 선수들에게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구시대적인 발상이다.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는 선수들이 자칫 부상이라도 당하면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적이 좋지못하면 선수와 감독만 그 상처를 뒤집어쓰기 일쑤다.

이런 적폐가 반복될 경우, 장기적으로 누가 과연 대표팀을 위하여 충성심을 바칠지 의문이다. 국가의 역할을 대신하여 선수들을 보호하고 관리해줘야할 임무를 위임받은 협회가 오히려 선수들의 땀과 눈물을 착취하고 있는 모양새는 한참 잘못됐다.

어느 국가든 조직이든 적군보다 무서운 것이 바로 '내부의 적'이다. 배구계 내부의 확실한 인적 청산과 장기적인 구조 개혁없이 막연하게 3년뒤 올림픽 메달 따위를 운운하는 것은 모래성으로 고층빌딩을 건설하겠다는 환상에 불과하다. 태극마크가 더 이상 자랑스럽지못하고 오히려 "국가대표라서 불쌍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여자배구 대표팀의 이 한심한 현실에 대하여 이제는 배구계가 책임있는 대안을 내놓아야할 때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배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