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오전, 지인들과 함께 <택시운전사>를 관람하기 위해 용산의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가 시작할 무렵, 갑자기 객석에서 커다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문재인 대통령이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영화관에 들어선 것이었다. 많은 시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깜짝 등장이었기 때문에 놀라웠다.

문 대통령 뿐 아니라, 고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의 아내인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 여사 그리고 주연배우 송강호, 유해진, 장훈 감독 등이 함께 자리에 앉았다. 영화가 끝나갈 때 쯤, 나는 슬쩍 뒤를 돌아 보았다. 대통령은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내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택시운전사>를 관람한 문재인 대통령,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 여사, 송강호, 유해진

<택시운전사>를 관람한 문재인 대통령,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 여사, 송강호, 유해진 ⓒ 이현파(직접 촬영)


문 대통령은 변호사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위르겐 힌츠페터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기로에 선 한국>을 부산 가톨센터에서 상영한 적이 있다. 전국으로 전파된 이 다큐는 시민들에게 군사 정권의 악랄함을 폭로했으며, 더 나아가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한편, 대통령의 옆에 앉은 브람슈테트 여사의 눈가 역시 촉촉해져 있었다. 생전 광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던 남편에 대한 생각이 많이 났던 모양이다. 대통령이 영화를 관람하러 왔으니 상영관이 시끌벅쩍할만했지만 조용했다. 약간의 카메라 셔터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광주에 대한 숙연한 마음들이 상영관을 가득 채웠다.

'먹고사니즘'에서 '시대의 증인'으로

몇 가지 결점에도 불구하고, <택시운전사>는 재미있는 영화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광주에 대한 예의를 갖춘 작품이다. 철저한 고증을 통해 그 날의 광주를 재현했으며, 광주를 바라보는 '외부인'들의 시선을 잘 그려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광주 항쟁을 접한 김만섭(송강호) 개인이 변화해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송강호는 이 영화를 움직이는 절대적인 동력이다. 사실 초중반의 김만섭, 송강호는 우리가 흔히 보아 온 송강호의 모습이다.

간단하게 말해, 송강호가 <괴물>이나 <우아한 세계>에서 보여 온 소시민적 주인공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담배와 소주를 즐기고, 기분이 좋으면 운전대를 잡고 노래를 부르는 '그 송강호'의 모습이다. 그가 연기한 김만섭은 결코 정치적인 캐릭터가 아니다. 그를 움직이는 이념은 바로 '먹고사니즘'이다. 젊은 시절 사우디아라비아에서 5년 동안 트럭을 몰다가 돌아온 그에게 대한민국은 살 만한 조국이다.

시대가 어떻게 흘러가든, 아무렴 상관없었다. 딸과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만원이라도 돈을 더 벌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데모질이나 하고...' '나라에서 하지 말란 건 하지 말아야지' 라고 말하던 그는 분명 방관자였다. 그러나 이 영화의 진가는 그 방관자가 시대의 증인이 되어가는 순간에서 나온다. 죄없는 시민들이 국군의 총을 맞고 죽어 나가는 것을 보면서, 그가 수십년간 믿고 있었던 세상은 송두리째 뒤집힌다.

세상에서 송강호가 할 수 없는 연기가 있을까 싶다. 그는 광주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부채의식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표현했다. 식당에서 주먹밥을 보면서 광주 시민들을 떠올릴 때, 마음을 달래기 위해 '제 3한강교'(혜은이)를 부르다가 눈물을 흘릴 때, 우리도 함께 눈물을 흘리고 만다. 5월의 그날, 광주가 고립되는 것을 막지 못했던 대학생들의 심정이 이랬을까,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뉴스를 철썩 같이 믿고 있던 이들이 으스러진 광주 시민들의 사진을 보았을 때의 기분이 이와 같았을까.

 영화 <택시운전사> 스틸컷

영화 <택시운전사> 스틸컷 ⓒ 쇼박스


송강호의 연기는 보는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라면 운전대를 돌릴 수 있었을까?'라는 고민을 하도록 만든다. 앞서 말했듯이, <택시운전사>는 결점이 없는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택시운전사>는 그 시대를 지켜보아야 했던 이들의 부채 의식을 훌륭하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피아니스트> <어벤저스 2: 에이지 오브 울트론> 등으로 인지도를 쌓은 토마스 크레취만이 출연한다고 해서 큰 화제가 되었다. 사실 그가 맡은 배역은 생각보다 평범하게 보일 수 있다. 영화적 상상력보다는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의 증언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마스 크레취만은 '푸른 눈의 목격자'를 연기하는 데에 있어 자신의 몫을 확실하게 해낸다. 특히 시신들이 줄을 잇는 병원에서 주저앉아 있던 그의 모습이 특히 인상 깊었다. 유해진, 류준열을 비롯, 광주 시민을 연기한 조연들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주먹밥을 나누고, 기름을 나누었던 광주 정신을 잘 보여주는 캐릭터들이다.

지금 우리는 '5월의 광주'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광주의 피를 밑거름 삼아 바로 선 것이다. 그럼에도 광주는 오랫동안 외로웠다. 9년 동안 '임을 위한 행진곡'은 터무니없는 이유로 제창되지 못 했다.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은 광주를 외면하다시피 했다. 인터넷 극우 커뮤니티에서는 광주에 대한 입에 담지 못 할 말들이 판쳤다.

최근에는 광주 학살의 총 책임자가 조준 사격을 부인했고, 5.18을 '폭동'으로 표현하면서 다시 한 번 광주를 모욕했다. 광주의 과거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광주에게 미안함을 떨치기 쉽지 않다. 앞서 말했듯이, <택시운전사>는 결점이 없는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택시운전사>는 그 시대를 지켜 보아야 했던 이들의 죄의식을 훌륭하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 하다.

5.18 항쟁을 세계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위르겐 힌츠페터는 2003년 송건호 언론상을 수상했다. 그는 자신을 태워준 택시 기사 '김사복씨'를 수차례 찾았다. 단 며칠 동안 함께 한 인연이었지만 그는 김사복씨를 진정한 친구로 여겼다. 김사복씨를 찾는다면 '말도 안 되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택시 운전사를 만나지 못하고 작년 초 숨을 거두었다. (힌츠페터의 유해 일부는 현재 광주에 묻혀 있다.)

김사복의 선택이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며 운전대를 잡은 택시 운전사들, 주먹밥과 기름을 나누었던 광주 시민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못 했다며 부채 의식을 안게 된 시민들. 이들의 선한 의지가 역사를 진보시킨 것이다. <택시운전사>는 가슴 아픈 역사의 참극을 다루고 있지만, 동시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 <택시운전사> 스틸컷

영화 <택시운전사> 스틸컷 ⓒ 쇼박스



택시운전사 장훈 송강호 유해진 토마스 크레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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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음악과 공연,영화, 책을 좋아하는 사람, 스물 아홉.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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