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후반 유럽은 프랑스의 나폴레옹에 의해 좌지우지됐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에스파냐 등 당시 강대국과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승전고를 울린 프랑스는 빠르게 세력을 넓히는데 성공했다. 1806년, 독일 튀링겐 주에 있는 예나에서 프로이센을 물리친 나폴레옹은 보무당당히 도시에 입성한다. 당시 나폴레옹의 늠름한 모습을 본 철학자 헤겔은 "나는 말을 탄 세계정신을 봤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헤겔의 변증법- 현대 철학의 시작

17세기 독일 철학자 헤겔은 역사나 정신 같은 모든 세계는 변증의 논리로 전개된다는 절대적 관념론을 주장했다. 헤겔은 절대적 관념을 현실의 분열과 발전을 통해 거듭난다고 봤다. 여기서 헤겔이 주장한 변증의 논리란 정명제와 반명제, 두 명제의 대안이 되는 합명제를 찾아 궁극적으로 대상의 질적 변화를 추구했다. 헤겔은 변증 철학을 설명하기 위해 그 유명한 '정반합' 삼단 논법을 정식화했다. 즉, 세계는 하나의 주장인 정(正)에 모순되는 다른 주장인 반(反)이 등장하고 이 둘을 통합한 높은 차원의 주장인 합(合)에 이른다는 게 헤겔 철학의 핵심이다.

 과거 패스는 축구에 있어 중요한 플레이가 아니었다.

과거 패스는 축구에 있어 중요한 플레이가 아니었다. ⓒ FIFA 공식 홈페이지


현대 철학과 현대 축구의 만남

그런데 헤겔의 변증법을 단순히 철학적 사유로만 한정할 수 있을까. 헤겔의 변증법은 시간의 흐름에 영향 받는 모든 대상에 해당된다. 이는 축구도 마찬가지다. 축구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끊임없이 모순·대립을 통해 발전했다.

19세기에 시작된 축구는 이전까지 통일된 규정안이 없다가 1863년 12월 8일, 잉글랜드 축구 협회(FA)가 규칙을 제정하면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선수들끼리 볼을 주고받는 '패스'는 효율적인 플레이가 아니었다. 이는 지금과는 다른 오프사이드 규정 때문이었다. 당시 잉글랜드 축구 협회가 지정한 오프사이드 규정은 '볼을 갖은 선수가 킥을 했을 때, 상대 골라인 쪽에 더 가까이 있는 같은 편 선수는 그 공을 건드릴 수 없다'로 명시돼 있었다. 자연스레 상대 수비진에서 볼을 잡은 선수는 전진 패스보다는 옆이나 뒤로만 패스를 했다. 패스가 통용되지 못하자 공격수들은 오직 드리블을 통해 공격을 시도했다. 그 당시 드리블은 공격수들의 가장 정석(正)인 공격 플레이었다.

그러나 잉글랜드 축구 협회의 영향을 받지 않은 스코틀랜드가 패스를 바탕으로 한 '패스 축구'를 선보이며 드리블이라는 절대적 개념에 반기를 몰고 왔다. 사실 스코틀랜드 인에게 패스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잉글랜드 선수들에 비해 신체적으로 열세를 보인 스코틀랜드 선수들은 신체를 활용한 강력한 드리블을 펼칠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스코틀랜드 팀은 잉글랜드 팀과 경기를 펼칠 때 드리블보다 패스를 많이 이용했다. 1872년 11월 30일, 최초의 국제경기인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경기에서 스코틀랜드는 패스 플레이를 통해 신체적 열세를 극복하고 0-0 무승부를 거뒀다. 이후 잉글랜드 축구 협회는 패스가 드리블만큼 효율적이란 것을 깨닫기 시작했고 오프사이드 룰을 개정했다.

드리블과 패스가 혼용되자 다양한 공격 플레이가 가능해졌다. 선수들 간의 2:1 윌 패스 등 공간을 활용한 공격 패턴과 센터에 있는 공격수에게 볼을 투입하는 크로스의 빈도가 높아졌다. 축구라는 하나의 세계에서 드리블(正)과 패스(反)가 통합돼 선수들 간 유기적인 콤비네이션 플레이(合)가 가능해졌다. 드리블과 패스의 만남은 축구가 정반합의 개념이 적용되어 발전했음을 보여준 좋은 예다.

 마라도나를 묶기 위해 AC 밀란은 콤팩트 축구를 고안했다.

마라도나를 묶기 위해 AC 밀란은 콤팩트 축구를 고안했다. ⓒ 세리에A 공식 홈페이지


압박과 지역 방어의 태동

지금이야 대부분 축구팀이 압박을 기반으로 한 지역 방어(존 디펜스)를 사용하지만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압박과 지역 방어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지역 방어보다는 1대 1 수비 전술인 대인 방어를 즐겨 사용했다. 그러나 대인 방어 시스템은 디에고 마라도나라는 강력한 반정립(反定立)을 만나 위기를 맞는다. 뛰어난 개인 기량을 보유한 마라도나를 수비수 혼자 막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마라도나를 만난 대부분 팀들이 대인 방어를 쓰다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수비수들은 절망했다. 마라도나같이 개인 기량이 뛰어난 선수들은 막을 수 없는 것일까. 난관에 부딪힌 수비 축구지만 또다시 새로운 개념이 정립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1987년 이탈리아 명문 AC 밀란의 감독으로 부임한 아리고 사키는 나폴리의 마라도나를 잡기 위해 개인이 아닌 구조의 정형화를 통한 강력한 수비 전술을 고안했다. 바로 그 유명한 '콤팩트 축구'다. 오늘날 압박 축구의 시작은 사키 감독의 머리로부터 나왔다. 사키 감독은 이전까지 생소했던 압박, 지역방어, 오프사이드 트랩 같은 수비 전술을 구사했다. 삼선의 간격을 30m 이내로 유지해 촘촘한 공-수 대형을 만드는 게 사키이즘의 핵심이었다. 촘촘해진 삼선은 최대한 라인을 전진해 볼 흐름을 비교적 높은 지점에서 장악했다. 높아진 수비라인으로 인해 배후 공간이 열린 단점은 오프사이드 트랩으로 상쇄했다. 이전까지 축구에서 압박의 개념은 생소했으나 AC 밀란의 콤팩트 축구가 이탈리아를 넘어 유럽까지 삼키면서 최고의 전술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다.

 루이스 엔리케 바르샤 전 감독은 티키타카를 한 단계 진화시켰다.

루이스 엔리케 바르샤 전 감독은 티키타카를 한 단계 진화시켰다. ⓒ 바르셀로나 공식 홈페이지 캡처


티키타카... 변증법을 위협한 절대적 개념

오랜 시간 축구와 변증법의 애정 전선에 이상이 없었으나 최근 들어 이 둘은 위기를 겪었다. 바로 티키타카 때문이다. 스페인어로 '탁구공이 왔다 갔다' 한다는 뜻의 티키타카는 쉴 새 없이 짧은 패스를 선수들이 주고받으며 볼 점유율을 극대화하는 전술이다. 스페인 클럽 FC 바르셀로나(이하 바르샤)가 티키타카를 무기 삼아 스페인 클럽 최초로 메이저 트레블(리그, 국왕컵, UEFA 챔피언스리그)을 이뤘다. 당시까지만 해도 티키타카를 막을 방법은 거친 파울과 볼 점유율을 과감히 포기하고 수비만 전념하는 '안티 풋볼' 뿐이었다.

그러나 이 안티 풋볼도 해답이 되지 못 했다. 수비 축구의 대가인 조제 무리뉴 감독이 안티 풋볼을 바탕으로 바르샤를 꺾긴 했지만 근본적인 해답이 되지 못 했다. 안티 풋볼은 티키타카라는 정명제를 뒤집지 못 했다. 특히 2009년에 이어 2011년에도 바르샤가 UEFA 챔피언스리그(이하 UCL)를 석권하자 티키타카는 변증법을 무시한 절대적 존재로 자리 잡은 듯했다. 한두 번은 바르샤를 꺾을 수 있었으나 근본적인 대안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티키타카와 바르샤는 축구팬들에게 축구의 재미를 반감시킨다는 원망 아닌 원망을 들어야 했다. 더해 변증의 흐름을 거스르는 막강한 힘은 축구 발전을 저해한다는 비판도 들었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바르샤의 티키타카가, 통념으로 자리 잡은 절대 개념이 드디어 무너졌다. 흥미롭게도 주인공은 바로 헤겔의 조국 독일이었다. 독일 분데스리가 소속의 도르트문트 감독인 위르겐 클롭은 '게겐 프레싱'이라는 신개념 압박 전술을 선보였다. 수비진을 높게 올리고 고도의 기동력과 체력을 바탕으로 최전방부터 강력한 압박을 통해 볼을 탈취하는 게겐 프레싱은 티키타카를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도르트문트의 라이벌 바이에른 뮌헨 역시 게겐 프레싱을 바탕으로 신체적 우위를 활용한 속도감 있는 공격 전개로 티키타카를 타파했다. 2013년 4월, UCL 4강에서 바르샤는 뮌헨을 만나 1,2 차전 합계 7-3으로 대패했다. 라틴족의 섬세함과 정열을 담은 티키타카는 게르만족의 냉철함과 월등한 피지컬, 속도에 철저히 유린됐다.

그러나 이대로 무너질 줄 알았던 티키타카와 바르샤는 자신들을 전복시킨 게겐 프레싱을 받아들여 다시 한 번 주류 전술로 거듭난다. 2014년 7월, 바르샤에 부임한 루이스 엔리케 감독은 볼 점유율을 극대화한 기존의 티키타카를 보다 직선적이고 간결하게 다듬었다. 티키타카의 목표는 볼 점유율 극대화지만 엔리케 감독은 승리가 필요한 경기라면 볼 점유율도 과감히 포기했다.

대신 짧은 패스와 함께 롱패스를 혼용해 전개 속도를 올렸다. 신체적 열세로 인한 세트피스 약점도 개선했다. 독일 축구의 속도와 과감함을 장착한 티키타카의 효과는 확실했다. 2014-2015시즌 바르샤는 UCL 4강에서 '게겐 프레싱의 상징' 뮌헨을 상대로 신개념 티키타카를 선보여 복수에 성공했다. 기세를 몰아 바르샤는 결승전에서 유벤투스를 꺾고 다시 한 번 유럽 최고로 올라섰다. 자신들과 반대 개념인 게겐 프레싱에서 해답을 얻어 더 높은 차원의 개념으로 나아간 신(新) 티키타카는 변증법과 축구가 여전히 뜨거운 사랑을 지속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축구는 변증법 그 자체다

티카타카를 고안한 펩 과르디올라는 축구를 항상 개선해야 할 존재로 봤다. "축구는 항상 문제점이 존재한다. 끝이란 없다. 왜냐하면 축구는 늘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과르디올라의 말처럼 축구에서 절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패스가 드리블을 재정립했고 대인 방어에서 지역 방어를 기반으로 한 압박이 태동했듯이 축구는 끊임없이 발전했다. 만약 헤겔이 생전에 축구 감독을 했다면 축구를 변증의 원리에 빗댄 과르디올라의 말에 찬성했을 것이다.

예나에 입성한 나폴레옹을 두고 절대적 존재로 칭한 헤겔이 지금의 축구를 보고 있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공격 축구(티키타카)가 발전하면 이에 대응해 수비 축구(게겐 프레싱)가 발전하듯 대립관계가 아닌 상호보완적으로 절대 가치에 도달하는 축구를 보고 미소를 띠지 않았을까. 축구가 자신이 주장한 절대적 관념론에 부합하는 또 하나의 '세계정신'이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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