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언제나 합리적 선택을 내려야 한다고 믿어왔다. 여기서의 '합리적'이란, 기회비용보다 편익이 큰 것을 말하며, 그 사고방식은 '효율'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이처럼 합리성을 강요받는 이유는, 이 세계의 자원과 가치들이 희소성을 가지듯, 모두가 만족하고 완벽할 수 있는 대안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효율을 추구하고, 문명을 발전시켜왔다. 이윽고 근대화를 거쳐 현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그리고 인간이 더 행복해졌다고, 역사와 문명이 늘 발전해왔다고 확답을 내릴 수 없다. 자동차가 발명되어 우리의 삶이 편리해졌지만, 그와 동시에 교통사고라는 새로운 위험이 발생했듯, 현대사회의 등장은 풍요와 비례하는 위험을 야기했다. 그래서 이에 경종을 울리고, 국가가 사회적 안전장치를 최우선으로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울리히 벡의 저서 <위험사회>의 요지이다.

독극물(포름알데히드) 방류 사건 용산 미군기지에서의 한강 독극물 방류사건은 영화 괴물의 모티프가 된다

▲ 독극물(포름알데히드) 방류 사건 용산 미군기지에서의 한강 독극물 방류사건은 영화 괴물의 모티프가 된다 ⓒ 청어람


국가의 의의

영화 <괴물>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한강에 갑자기 괴물이 나타났고, 주인공의 소중한 딸을 낚아채갔다. 주인공 가족은 딸의 생존 사실을 알게 되자, 격리시설을 탈출하여 스스로 딸을 구해나간다. 여기에서는 가족과 괴물이라는 당사자 외에도, 정부기관, 즉 '국가'가 갈등 구도의 한 축을 담당한다. 주인공 가족들은 국가의 방해를 이겨내며, 괴물과의 사투를 힘겹게 이어나간다. 즉 국가는 괴물로부터 시민을 보호해야 하지만,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식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결국 주인공 가족은 그들에게 닥친 위험에 대해 스스로 보호를 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자력구제'의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어느 한쪽의 잘못이라고 일방적으로 비판할 수는 없다. 아무도 자신들의 말에 귀기울여주지도 않고, 딸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주인공 가족의 입장도 일면 이해가 된다. 국가의 입장 역시 이해를 못할 것은 아니다. 보고된 바 없는 전무후무한 돌연변이로 인해 사상자가 발생했고, 피해자 중 한명이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것이 보고되었다. 그렇다면 국가로서는 어쩔 수 없이 격리를 택할 수밖에 없다. 느슨한 격리 등으로 인해, 이번 정부에서 메르스나 구제역, 조류독감 등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을 상기한다면, 국가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

공리주의와 자유론이 낳은 희생

사실 국가가 미지의 존재 등을 의심함으로써 최대한의 검증된 안전을 도모하려 하는 것은 지극히 공리주의적인 사고다. 사회의 안전을 위해서 소수의 불편함은 감수할 가치가 있는 것이고, 오히려 그런 식으로 사회를 지켜나가야만 궁극적으로 모두의 기본권을 수호할 수 있게 된다. 다만 오늘날에는 헌법과 민주주의라는 방식을 통해, 그러한 공리주의적 판단과 결정에 정당성을 부여할 따름이다.

국가의 통치 수단인 법이라는 것 자체가 공리주의적인 면모가 있다. 법은 정의를 위해서 존재하기도 하지만, 법적 안정성 및 합목적성 등을 고려해야 하기도 한다. 개인에 초점을 맞춰 법을 구현한다면, 사회 전체적인 관점에서는 이롭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정말 끔찍한 범죄가 발생했다 하더라도 적용할만한 법이 마땅치 않거나, 위법한 증거 혹은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면 절대 처벌할 수 없다. 사회 전체적으로 봤을 때 법에 대한 불신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피해자 혹은 유가족은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받는다.

<괴물>에서의 주인공 가족은, 어쩌면 이 공리주의의 희생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조차도 괴물의 희생자였지만, 정체도 모르는 괴물과 바이러스로 인해 무작정 격리 당해야만 했다. 딸을 구하러 가야한다고 수없이 호소했지만, 아무런 소용없이 희생을 감내야만 했다. 이런 공리주의와 종종 충돌하는 자유론 역시 그들의 편이 된 것은 아니었다. 가까스로 병원을 탈출한 그들은, 업체에게 천만 원에 달하는 바가지를 뜯기고 말았다. 분명 강제가 아닌 자유로운 거래였지만, 과연 공정한 거래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도 위험사회의 단면이라면, 단면일 수 있다.

위험사회를 위한 대안

이처럼 위험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권리를 온전히 보호하고 구제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의 역할이다. 사회 문제라는 것은 특정 개인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공통의 문제이기 때문에 개인 차원이 아니라 국가의 조직된 힘이 발휘되어야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영화 역시 국가가 딸을 신속하게 구출하고 괴물을 제압했다면, 조기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국가가 위험사회를 위한 안전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징후'를 빠르게 포착하고 이를 조기에, 그리고 물샐틈없이 해결할 수 있는 컨트롤타워 및 매뉴얼을 구축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던 재난사고들을 떠올려보자. 각종 붕괴나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는 분명 예방할 수 있는 '인재'였다. 부실공사를 제대로 감독했다면 삼풍백화점 등의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세월호 역시 과적과 선장 및 항해사들을 관리하였다면 사태가 더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완전히 예방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건이 발생한 후 신속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위와 같은 인재를 예방하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국가의 책임이고, 국가가 이러한 위험사회를 방치할 때에 발생하는 일들을 보여주는 것이 영화 <괴물>이라고 생각한다. 주한미군의 환경오염에 대해 예방 및 감시를 해야 했고, 낚시꾼과 투신자살자 등의 장면에서 괴물의 징후가 포착되었다. 또한 주인공의 딸을 구출하는 데에도, 제보를 믿고 위치추적만 했다면 구출은 물론, 괴물과 추가적인 피해를 조기에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찰은 위치추적이 매우 복잡한 일이라 거짓말을 하고, 망상으로 치부해버린다.

아무리 시민이 횡설수설하고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친다 하더라도, 국가는 그들의 근거 없는 낭설에도 귀 기울이고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야 하는 '입증 책임'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는 오래전 광우병 사태에는 그 안전성을 설득해야 했고, 얼마 전 가스 냄새, 그리고 특이한 구름과 개미의 이상 현상으로 지진을 우려하던 시민에게 그것들이 지진의 징후가 아님을 밝혀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국의 총리가 국회의 의혹 제기에, 유언비어에 대한 사법조치를 경고하는 오늘날을 돌아볼 때, 영화와 현실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집단사고라는 이름의 '괴물'

그렇다면 국가를 위험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도록 좀먹는 요소가 무엇인지가 중요하다. 그것은 바로 '집단사고'이다. 그것은 조직이 의사결정을 하는데 있어, 충분한 검증과 이의제기를 못하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집단사고에 빠진 조직은 경직된 사고를 함으로써, 합리적인 판단과 대안을 도출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리고 그 조직이 국가라면, 국가 전체가 마비되고 크나큰 위험이 닥칠 수 있다. 그러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들에게 전가된다.

<괴물> 속 정부 역시 집단사고로 인해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주인공의 딸이 사망했다는 것은 추정일 뿐 확실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전화가 걸려왔다는 증언에도 불구하고, 딸의 죽음이 사실이 아니라는 사고를 전혀 하지 못하였다. 또한 도널드 하사에게 알 수 없는 두드러기가 발생하자, 미지의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로 인해 정상적인 사고가 마비되었다. 괴물과 접촉한 송강호는 뇌 등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딸의 위험으로 절박했을 뿐이지만 그 어느 누구도 정신이상이라는 자신의 고정관념을 바꾸려들지 않았다. 집단사고로 인해, 감기 증상은 바이러스의 초기 증상, 불안한 정서는 뇌의 이상으로 변모했다.

이번 탄핵 정국을 지켜보며 드는 생각은, 결국 모든 원인이 대통령 개인의 '불통'에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바른 말을 하는 사람들은 '배신의 정치', '나쁜 사람'으로 일축하며 멀리하고, 듣기 좋은 말만 일삼는 최순실 같은 모리배만 곁에 두니 판단력과 사고는 더욱 좁아지는 악순환을 낳는다. 또한 사태가 본격적으로 접어들고 나서도, 그 어떤 기자회견도, 대면조사도 응하지 않았으며, 자신에 대한 정당한 비판과 지적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지금도 자신의 잘못은 결코 없으며, 이 모든 것이 음해라고 믿을 것이라 생각하니 참담한 심정이다. 영화이든, 현실이든, 모두 비판과 토론이 원활하지 않는 사회, 집단사고에 갇힌 사회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잘 보여준다.

불신의 사회

2017년 1월 22일, 서울지하철 2호선을 달리던 전동차가 화재로 정지되었다. 기관사는 매뉴얼에 따라 차내에 기다려달라는 안내 후, 보고 후 지시에 따라 대피 방송을 했다. 화재 발생 3분 만에 신속한 조치를 한 것이다. 그러나 승객들은 이미 연기를 보자마자 자발적으로 탈출한 뒤였다. 이와 같은 시민들의 불신은 일명 '세월호 트라우마'가 우리 사회에 깊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2014년 열차 추돌 사고 때에도, 2016년 사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시민들은 지시와 매뉴얼을 불신하고, 자력 탈출을 감행하였다. '안전불감증' 사회를 넘어, '불신'의 사회로 전환된 것이다. 더 신중해졌다 볼 수 있겠지만, 매뉴얼을 따르지 않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 역시 또 다른 위험사회에 지나지 않다.

최근 중국의 보복 조치로 새롭게 논란이 되고 있는 '사드' 역시 위험사회의 또 다른 단면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의 연이은 핵실험으로 긴장이 고조되는 이 시점에서, 그에 대비하는 것은 적절한 조치이다. 그러나 우리의 위험을 외부에 지나치게 의존하려는 것 때문에 또 다른 위험이 초래된 것이 아닌지 우려된다. 사드의 한계 등 그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마당에, 중국의 보복 조치까지 이어지자 이른바, '혹 떼려다 혹 붙인 꼴'이다. 분명 사드 갈등으로 가장 손해를 보는 것은 우리인데,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에이전트 옐로우의 무차별적인 가스 살포는, 단순히 괴물만을 위협하지 않았다. 무고한 시민들도, 자국을 지키기 위한 경찰들도 피아 구분 없이 공격하였다. 그리고 결국 괴물이라는 위험을 종식시킨 것은 누구였는가. 우리네 시민이었다. 씁쓸하게도, 바람직한 결과는 아니라 생각한다. 그렇게 사태가 종결되고 일상으로 돌아간 송강호는 수상한 인기척을 느끼고 빈 곳에 총을 겨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는 끝이 나지만, 그는 죽기 전까지 딸의 손을 놓쳐버린 것을 자책할지 모르고, 또 총을 계속 간직하며 불신의 사회를 살아갈지 모른다. 정작 이 모든 사태의 가장 큰 책임은 국가가 져야하지만, 국가는 그 책임과 고통을 일개 시민에게 전가해버렸다. 가장 큰 위험은 괴물이 아닌 '그들'이 아니었을까.

괴물 봉준호 위험사회 세월호 집단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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