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오후 서울 구로구 고척 스카이돔에서 열린 2017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한국대표팀 훈련에서 김인식 감독이 생각에 잠겨 있다.

지난 8일 오후 서울 구로구 고척 스카이돔에서 열린 2017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한국대표팀 훈련에서 김인식 감독이 생각에 잠겨 있다. ⓒ 연합뉴스


유럽 축구에 대한 개념조차 잘 모르던 1970년대,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해 12년 동안 308경기에서 98골을 넣은 차범근 전 감독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출신의 박지성과 함께 한국 축구 최고의 영웅으로 꼽힌다. 하지만 이토록 엄청난 업적을 만들어낸 영웅이 한 순간에 한국 축구를 망친 역적으로 몰린 적이 있었다. 바로 차범근 감독이 대표팀을 이끌었던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이었다.

당시 한국은 멕시코에게 1-3 역전패, 네덜란드에게 0-5 완패를 당하며 조기 탈락했고 차범근 감독은 조별 라운드 도중 경질되는 수모를 당했다. 사실 북중미의 강호 멕시코나 스타군단 네덜란드는 분명 한국보다 한 수 위의 팀이었다. 하지만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스페인,독일과 대등한 승부를 펼치며 축구팬들의 눈은 너무 높아졌고 16강이 좌절됐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차범근 감독은 축구팬들 분노의 희생양으로 일찌감치 귀국길에 올랐다.

이렇게 스포츠에서 응원하는 팀이나 나라가 부진하면 모든 책임과 비난의 화살은 감독이 지게 돼 있다. 제4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 1라운드에서 이스라엘과 네덜란드에게 패하며 2라운드 진출이 좌절된 한국 야구도 대표팀을 이끌었던 김인식 감독이 온갖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하지만 김인식 감독은 '실패한 감독'으로 기억되기엔 한국 야구에 기여한 바가 너무 크고 위대하다.

초대 WBC에서 퍼펙트 4강 이끌며 '국민감독' 등극

배문고를 졸업하고 해병대와 한일은행에서 투수로 활약하던 김인식 감독은 어깨부상으로 26세에 조기 은퇴했다. 은퇴와 동시에 모교인 배문고 감독으로 부임한 김인식 감독은 상문고와 동국대 감독을 거쳐 1986년부터 1989년까지 해태 타이거즈의 수석코치로 재직했다. 김인식 감독이 해태의 수석코치로 재직한 시기는 해태가 한국시리즈 4연패를 달성하면서 '왕조' 시대를 연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해태에서 경력을 쌓은 김인식 감독은 1990년 쌍방울 레이더스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신생팀의 한계를 느끼며 3년 만에 사퇴했다. 그리고 1995년 집단 이탈 사건으로 최악의 팀 분위기에 있던 OB베어스를 맡아 부임 첫 해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며 명장의 반열에 올랐다. 베어스는 두산으로 팀 명을 바꾼 2001년에도 우승을 차지해 김인식 감독은 두산 팬들에겐 영원한 명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김인식 감독이 대표팀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코치로 나선 2000년 시드니올림픽이 그 시작이었다. 당시 김응룡 감독을 보좌하며 한국의 동메달을 이끈 김인식 감독은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는 전년 우승팀 감독 자격으로 대표팀을 맡아 금메달을 견인했다. 하지만 김인식 감독이 국가대표 감독으로서 본격적으로 진가를 드러낸 것은 2006년 제1회 WBC 감독을 맡았을 때부터였다.

박찬호, 이승엽, 김병현, 서재응, 김선우, 최희섭 등 해외파들을 총동원하며 최강팀을 꾸린 한국 대표팀은 세계 야구의 중심이라 자부하던 일본과 미국을 차례로 꺾으며 6전 전승으로 4강에 오르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 김인식 감독은 1라운드에서 박찬호를 마무리 투수로 기용하는 등 상대의 허를 찌르는 작전을 구사해 야구팬들로부터 '국민감독', '야구계의 히딩크'라는 칭호를 얻었다.

3년 후 제2회 WBC를 앞두고 SK와이번스의 김인식 감독(한화 이글스)과 두산의 김경문 감독(NC다이노스)은 건강과 시즌준비 등의 이유로 대표팀 감독 자리를 고사했다. 결국 야구계는 다시 김인식 감독을 찾았고 김인식 감독은 '박찬호도 없고 이승엽도 없는' 대표팀을 맡았다. 1회 대회에 비해 전력이 약해졌다고 평가 받던 대표팀을 이끌고 제2회 WBC에 참가한 김인식 감독은 한국을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출정식에서 강조한 '위대한 도전'이 성공을 거둔 것이다.

고령의 나이에도 늘 대표팀의 부름에 응답했던 김인식 감독

김인식 감독은 한화 이글스 감독을 맡은 직후였던 2004년, 뇌경색으로 쓰러져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다행히 빠른 시간 안에 회복해 2005년부터 5년 동안 한화를 이끌었고 대표팀 감독으로서도 두 번의 WBC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김인식 감독은 뇌경색 후유증으로 오른쪽 다리를 절 만큼 거동이 불편함에도 경기 도중 좀처럼 자리에 앉지 않고 서서 경기를 지켜보며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2009년 김인식 감독은 WBC 대표팀을 이끄느라 정작 소속팀(한화)의 시즌 준비에는 소홀히 할 수 밖에 없었고 그 해 한화는 최하위로 추락하고 말았다. 김인식 감독 역시 2009년을 마지막으로 한화 사령탑에서 물러나며 통산 1000승에 단 20승만을 남겨두고 현장을 떠나게 됐다. 그리고 김인식 감독이 떠난 대표팀은 조범현 감독(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과 류중일 감독(제3회 WBC, 인천아시안게임) 체제로 운영됐다.

그러던 2015년 프리미어12라는 대회가 신설됐고 류중일, 염경엽 감독 등이 감독직을 고사하면서 사령탑 선임에 난항을 겪었다. 결국 일흔이 넘은 김인식 KBO 기술위원장이 대표팀을 맡게 됐고 김인식 감독은 또 한 번 우승이라는 최고의 결과물을 얻어냈다. 비록 빅리그 40인 로스터에 속한 선수들이 참가하지 않았다곤 하지만 일본 프로야구 최정예 멤버들로 구성된 일본을 준결승에서 4-3으로 꺾은 것은 대단한 성과였다.

김인식 감독은 제4회 WBC에서도 자연스럽게 대표팀을 이끌었지만 복병 이스라엘과 강호 네덜란드에게 차례로 패하며 2라운드 진출이 좌절됐다. 김인식 감독이 대표팀을 이끈 이후 최초로 '실패한 대회'로 기록된 것이다. 물론 선수 선발 과정과 기용, 작전 등 세부적인 부분들을 살펴 보면 지적할 부분도 상당히 많다. 특히 선수들의 동기를 이끌어내지 못한 채 '태극마크의 무게'만을 강조한 부분은 대표팀의 최종 책임자로서 좋은 평가를 받기 힘들다.

하지만 처음이자 마지막 실패로 김인식 감독이 그 동안 쌓아온 업적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김인식 감독은 모두가 대표팀 감독을 꺼리는 순간마다 '독이 든 성배'를 드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 거의 모든 대회에서 좋은 성적으로 야구팬들의 기대에 보답했다. 이제 한국나이로 72세가 된 김인식 감독이 다시 대표팀을 맡게 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하지만 우리는 WBC 4강과 준우승, 프리미어12 우승을 이끈 국민 감독을 대한민국 야구의 '영웅'으로 기억해야 한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WBC 김인식 감독 국민감독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