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와일드>의 한 장면

영화 <와일드>의 한 장면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이 삶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 자기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무너져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질문을 한 번쯤 던져 보았을 것이다. 나에겐 군대에 있던 때가 그런 시기였다. 2년이라는 길다면 긴 그 시간은 순간이기도 했다. 유유히 흘러가던 삶 위로 분절의 빗금이 그어지던. 나의 몸은 완벽하게 무력해지는 경험을 했고, 그 위로는 매일 아침의 햇살처럼 경멸이 쏟아졌다. 동정과 호기심의 시선 앞에서 조차 공포에 몸을 떨었던 날들이 내 몸에 음각으로 아로 새겨졌다. 어쨌거나 그 곳에도 사람들은 있었고, 나는 밖에서도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만 했다. 그리고 내 몸은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 어디로 가야할까, 어떻게 가야할까, 저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그 모든 것이 명확했던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 당시 나와 메일을 주고받던 숙모는 그런 나의 방황을 눈치 채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내게 전역 후에 도보 여행을 떠날 것을 추천했다. 길을 걸으면 생각도 정리가 되고 삶의 방향도 명확해지리란 것이었다. 나는 주저 없이 제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언젠가 본 올레길 코스의 사진들을 떠올렸다. 그 아름다운 풍광 속을 거닐면 지난 시간들이 남긴 흉들은 말끔히 사라지고 새 출발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무작정 걷는다고 그런 반전이 일어 날리는 만무했다. 나는 그저 걷다가 해가 지면 잠에 들기를 반복했다. 덥고 다리만 아팠다. 일기장을 펴면 조급함에 그런 나를 비난했고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문장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결국 그 상태로 집으로 돌아왔다. 길이 내게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초월이 불가능한 삶

 영화 <와일드>의 한 장면

영화 <와일드>의 한 장면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삶이 뒤흔들리는 경험을 하고 튕겨져 나오듯 길 위를 걷는 사람들, 제주도에서의 나처럼 영화 <와일드>의 주인공 셰릴도 그런 이들 중 하나다. 아버지의 폭력과 가난에서 벗어나 이제 막 자기 삶을 살고자 하는 엄마 바비와 겨우 삶의 행복을 찾으려한 셰릴. 하지만 그녀의 엄마는 거짓말처럼 암 선고를 받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 힘들었던 어린 시절, 유일하게 사랑을 경험케 해준 엄마는 셰릴의 말처럼 그녀 삶의 중심이나 다름없었고, 이후 그녀는 바람을 피우고 마약을 하며 방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셰릴의 삶은 결국 한계에 봉착하고, 그녀는 엄마가 자랑스러워했던 딸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런 그녀의 눈에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PCT 트래킹 안내서가 들어오고, 그녀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기나긴 여행길에 오른다.

다시 '아름다움의 길'로 들어서겠다며 시작한 여행이었지만 그 과정은 셰릴의 생각대로 흐르지 않는다. 그녀의 불평처럼 그 길에는 온통 험난한 바위가 가득했으며 메마른 사막과 내리쬐는 햇볕이 펼쳐졌다.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배낭은 그녀의 몸에 쓸린 상처를 남겼고 맞지 않는 신발에 발톱은 뽑혀져 나간다. 또한 그녀는 여행의 와중에 성폭력 위험을 마주하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트래킹을 시작하며 그녀는 첫 방명록에 '몸이 그대를 거부하면 몸을 초월하라'는 에밀리 디킨슨의 격언을 적는다. 하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그것의 불가능함이다. 그 거친 길 위에서 그녀의 몸은 상처입고 고통 받기를 반복한다. 여성이라는 그녀의 조건은 편견과 불필요한 공포 앞으로 그녀를 데려다 놓는다. 지나간 시간의 끔찍함은 셰릴로 하여금 절규하게끔 만들고 엄마를 향한 그리움에 무릎을 꿇게 만든다. 그 몸은 초월할 수 없었다.

우리는 아름다워질 수 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셰릴이 삶을 살아온 방식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불운한 삶의 조건을 초월하고자 했고, 더 나은 인생을 살고자 욕망했다. 그래서일까 셰릴은 그러한 삶 속에서도 노래를 부르고 행복해 했던 엄마를 이해할 수 없어하고 그녀와 충돌하기도 했다. 주정뱅이와 결혼 해 남은 것이라고는 쓰러져 가는 집과 빚더미뿐인 웨이트리스의 삶이 뭐가 그렇게 즐겁냐고 엄마를 힐난한다. 영화의 초반, 셰릴은 읽어 본적도 없으면서 제임스 미치너의 책이 좋다는 엄마에게 그런 구린 책이 뭐가 좋냐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여행의 막바지 그녀는 엄마가 사랑했던 그 책을 읽는다. 그리고 트래킹의 마지막 방명록에, 셰릴은 미치너의 다음과 같은 격언을 남긴다.

"예상한 일에도 완벽한 대비는 불가능하다"

자기 삶의 조건을 초월하고자 하는 것은 누구나의 욕망이지만, 그것이 실패했을 때의 대가는 이루 말 할 수 없이 크다. 그리고 참 고루한 말이지만, 인생은 마음먹은 대로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굴러가지 않는다. 엄마의 죽음을 겪고 자기 삶에 어떠한 개입도 없이 그저 흘러가게 내버려 두었을 때, 어쩌면 셰릴은 보았을 지도 모른다. 날것 그대로인 삶의 맨얼굴을. 그리고 그녀의 말처럼 내버려 둔 그 삶은 참으로 야성적이기 그지없었다.

누구나 펼쳐진 초원 뒤로 강이 흐르고, 산이 병풍처럼 펼쳐진 아름다운 인생을 꿈꾼다. 하지만 대부분은 바위와 먼지투성이의 길을 걷는다. 사뿐사뿐 지나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우리의 몸은 살이 찢어지고 도랑을 구르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삶의 야만스러움이 우리가 아름답기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하는 셰릴에게 그녀의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네 최고의 모습을 찾아. 그 모습을 찾아내면 어떻게든 지켜내고."

나는 살고 싶어

 영화 <와일드>의 한 장면

영화 <와일드>의 한 장면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어쩌면 셰릴의 생각과는 달리 바비가 보인 낙관은 수동적인 회피도 단지 삶을 견디기 위한 위선도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것은 삶의 야만성에 관통되어본, 그래서 예상한 일조차 완벽한 대비가 불가능함을 알았던 사람이 그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방식이 아니었을까. 셰릴의 엄마는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그 주정뱅이와 결혼했을 것이라 말한다. 그 덕분에 너무도 사랑하는 딸을 가질 수 있었기에. 그녀는 자신의 말처럼 아무리 인생이 엄혹할지라도, 그 속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찾고자 노력했고 그것을 지켜내려 했다. 바비는 인생이 고통의 질곡으로 가득하다 해도, 가닿을 목적지가 암울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자 했다. 그 시간들은 가치가 없지 않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셰릴도 그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걸어온 길이기도 했다. 여행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간 이후에도 나는 여전했다. 홀로 침대에 누우면 외로움에 잠들지 못하다가도, 나지도 않은 인기척에 놀라 소리를 지르며 깨곤 했다. 매일 같이 술을 마셨고 퉁퉁 부운 눈으로 취기와 함께 아침을 맞았다. 충동적으로 낸 상처 위에 연고를 바르며 나는 언제까지 이 모양일까 스스로를 경멸하기도 했다. 인생은 전혀 공평하지 않아서 무너지지 않을 만큼의 소소한 행복을 안겨줬고, 숨을 쉴라치면 예상치 못한 충격으로 나를 몰아 세웠다. 그러던 나는 어쩌다 펜을 잡았고 비명을 지르듯 글을 꾹꾹 눌러썼다. 행운처럼 나를 환대하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왔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던져졌고 스스로를 방치한 채 흘러가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때서야 알게 된 것은 제주도에서의 도보 여행이 내게 남긴 것이 아무것도 없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깨닫는 것 없이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면서 발에 물집이 잡히도록 무작정 걸었다. 걷기로 했고 길이 있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삶이었다. 어디로 가는지 알고 가는 인생은 없다. 모르면서도 그 거친 표면에 부대끼며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초월할 수는 없다. 셰릴의 대사처럼 슬픔의 황야에서 나를 잃어버린 후에야 숲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니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다시 걷고 싶다. 그리고 앞으로 무엇이 올지 모르는 지금의 길도. 영화 속 바비의 이 대사를 기억하면서 말이다.

"쉽진 않지만 해볼 만한 가치는 있어. 오늘보다 훨씬 끔찍한 날들도 있을 거야. 거기에 질식해 죽는 것도 자유지. 근데… 글쎄다. 나는 살고 싶어."

와일드 인생 여행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