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스케이팅은 스포츠 위에 예술이라고 하는 특별한 요소가 가미돼 인기를 끄는 종목이다. 동계올림픽에서 아이스하키와 함께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종목으로, 입장권 역시 매 대회마다 가장 비싸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최근 피겨스케이팅은 거품점수라는 오명 속에 점차 그 의미가 변질돼가고 있다. 기술과 예술의 조화와 아름다움을 추구해오던 피겨스케이팅은 이제 멀어져버린 지 오래다.

치솟는 점수 인플레, 피겨를 주도하다

 2017 유럽 피겨선수권 대회 시상식. 예브게니아 메드베데바(러시아)는 이번 대회에서 종전 김연아가 세웠던 총점 세계신기록을 경신했다.

2017 유럽 피겨선수권 대회 시상식. 예브게니아 메드베데바(러시아)는 이번 대회에서 종전 김연아가 세웠던 총점 세계신기록을 경신했다. ⓒ 국제빙상연맹


점수 인플레가 시작된 것은 2010년 벤쿠버 동계올림픽이 끝난 직후부터 시작됐다. '피겨여왕' 김연아가 2009년 세계선수권에서 여자 선수로는 최초로 200점대를 돌파하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고, 벤쿠버 올림픽에선 228.56점이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남겼다. 당시만해도 이 점수는 여자 선수는 도무지 접근하기 힘든 마의 구간으로 받아 들여졌다. 기술과 예술에서 모두를 압도해온 김연아는 전 세계 스포츠 기사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올림픽 챔피언이 됐다.

그러나 그 이후 피겨는 이 점수를 쫓아가기 위한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됐다. 그 시작은 매 시즌마다 변경되는 규정에 있었다. 이전까진 없던 언더로테(회전수가 부족할 시 7~80% 가량의 점수를 인정해 주고 감점)라는 규정이 생기면서 점차 200점대를 기록하는 선수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소치 동계올림픽에선 사상 유례없는 일이 벌어졌다. 세계선수권은 물론 그랑프리에서조차 금메달을 단 한 개도 따지 못했던 아델리나 소트니코바(러시아)의 홈텃세로 직전 그랑프리 파이널보다 무려 50점 이상 상승한 점수로 김연아를 제치고 올림픽 챔피언이 됐다. 이 사건은 그야말로 피겨계의 인플레와 메달에 치중하는 기폭제가 됐다.

이 직후부터 러시아의 피겨 독주가 시작됐다. 러시아는 동계스포츠 저변이 좋기로 유명한 국가다. 누구나 쉽게 피겨를 접할 수 있기에 인재육성에 있어 당연히 수월할 수밖에 없었고, 러시아만의 강점으로 작용했다. 그 덕분일까, 러시아는 매 시즌마다 새로운 신예 선수들을 대거 시니어 무대에 등장시켰고 항상 정상의 자리를 놓치 않았다. 2015년 세계선수권 챔피언 엘리자베타 툭타미쉐바, 현재 시니어 무대를 휩쓸고 있는 엘레나 라디오노바, 안나 포고릴리야, 그리고 지난해 세계선수권 우승을 거머쥐었고, 현재 여자싱글의 모든 세계신기록을 갈아치운 예브게니아 메드베데바 역시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은 매 대회마다 치열한 기록 경쟁을 펼쳤다. 이들이 경쟁이 가속화 되면서, 또 다른 피겨강국인 미국이나 일본, 캐나다 역시 이 흐름에 가세했다. 그 결과 현재 각국 내셔널 경기에선 세계 신기록을 훌쩍 뛰어넘어 눈을 휘둥그레 하게 만드는 점수를 기록하고 있다.

과거의 아름다움을 다신 볼 순 없는 걸까

 김연아의 아이스쇼 연기 모습

김연아의 아이스쇼 연기 모습 ⓒ 박영진


피겨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것은 스포츠와 예술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이 종목만이 가지는 독특한 매력 덕분이었다. 과거 피겨계의 전설로 불리우며 여왕으로 군림했던 선수들을 살펴보더라도 그랬다.

피겨 여자싱글 사상 두 번째 2연패의 주인공이 된 카타리나 비트(독일)는 1988년 켈거리 동계올림픽에서 '카르멘' 이란 명작을 남겼다. 당시 은반 위에 쓰러져 최후를 장식하던 모습은 두고두고 회자가 되는 장면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그녀가 이 연기를 선보인 직후 여자피겨엔 그야말로 '카르멘 열풍'이 불며 모든 선수들이 비트와 같은 감동을 주고자 이 음악을 선택해 연기했다.

그리고 김연아의 우상으로 알려져 있는 미셸 콴(미국) 역시 수많은 명작을 남긴 선수로 유명했다. 비록 올림픽 금메달은 두 번이나 도전했지만 그 뜻을 이루진 못했지만 팔색조의 매력을 뿜어냈고, 특히 솔트레이크 시티 동계올림픽 갈라쇼에서 자신이 금메달을 따면 축하하기 위해 미리 준비해뒀던 금빛 의상을 입고 눈물의 연기를 펼친 것은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했다.

2014년까지 선수로 활약했던 김연아 역시 그러했다. 그녀의 화려한 변신은 매 시즌 피겨계를 뜨겁게 한 최대 이슈 중 하나였다. 시니어로 데뷔한 시즌에 세계선수권에서 세계신기록을 냈던 '록산느의 탱고'나, 김연아의 쇼트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명작으로 꼽히는 '죽음의 무도'는 신채점제가 도입한 이후 최고의 프로그램으로 꼽힌다. 여기에 김연아는 구사하는 매 기술마다 '교과서'라는 극찬을 받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그녀가 토털 패키지라고 불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 이외에도 피겨계에서 전설로 꼽혀온 이들은 이와같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피겨는 그런 명작을 남기는 것보다는 점수와 기록에 치중돼 그와 관련된 경쟁에만 부추기고 있다. 200점대를 돌파하는 것은 이젠 그저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심판들이 주는 선물 같은 점수에 피겨계는 환호하고 있다.

이미 피겨는 판정과 관련된 심한 내홍을 겪은 바 있다. 2002년 동계올림픽 당시 페어스케이팅 경기에서 심판들의 담합 속에 러시아 선수들이 모두가 금메달로 예상했던 캐나다 선수들을 제치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이후 심판 중 한 명이 러시아 측에 매수된 사실이 폭로되면서 캐나다 팀에 공동 금메달이 수여됐고, 피겨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새로이 등장한 것이 현재의 신채점제다.

그러나 불과 12년 뒤였던 소치 올림픽에서 또 다시 이와 같은 판정논란이 일어났다. 결국 같은 일을 자초하고 반복한 셈이 돼버렸다. 이제 다음 올림픽인 평창이 불과 1년을 앞두고도 점수 인플레는 그칠 줄 모르고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 어쩌면 소치에 이어 평창에서도 우리가 기억할만한 프로그램 보다는 신기록에 치중하거나 또는 납득하기 어려운 챔피언이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저 당장의 이슈에만 급급해진 피겨스케이팅. 이 종목을 주관하고 있는 국제빙상연맹(ISU)은 매번 새로운 규정을 내면서 공정성을 강화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진정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피겨스케이팅은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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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스포츠와 스포츠외교 분야를 취재하는 박영진입니다.

음악이 주는 기쁨과 쓸쓸함. 그 모든 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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